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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원균
근래 영화 ‘명량’이 높은 인기를 끌면서 화제다. 이순신(李舜臣)의 명량대첩을 그린 영화다. 이 영화 성공을 계기로 이순신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났다. 이순신 평전 <부활하는 이순신>과 전기소설 <불패>를 쓴 나로서는 매우 반가운 현상이다. 영화 ‘명량’의 성공을 계기로 이순신 죽이기와 원균(元均) 영웅 만들기를 되돌아본다.
임진왜란 뒤 공신(功臣)을 선정하는데 1등공신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원균은 처음에는 2등공신으로 올라갔다. 공신도감 도제조, 즉 공신선정위원회의 위원장 격인 이항복(李恒福)이 선무공신을 정할 때에 원균을 김시민(金時敏)․이억기(李億祺)와 함께 2등으로 올렸는데 선조가 1등으로 바꾸어주었던 것이다. 그때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원균을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이제 원균을 오히려 2등으로 낮추어 책정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임금이 그렇게 생떼를 쓰자 이항복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하며 발을 뺐다.
“원균은 왜란 초에 수군이(부하가) 없는 장수였으나 이순신 덕택으로 해전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3도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이순신․권율과 같은 1등공신으로 책정하기 어려워서 2등공신으로 내려 책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1등공신으로 책정하겠습니다.”
선조가 원균을 1등으로 올려준 것은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파면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힘으로써 칠천량전투에서 참패하여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자신의 궁극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간교 음흉한 술수였다.
칠천량패전 직후 비변사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으로서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다.’면서 처벌을 건의하자 끝까지 원균을 감싸고돌면서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자 사관은 이렇게 통렬히 비판했다.
- 한산도에서 남김없이 패전한 원균은 시장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야 마땅하다. 또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원균은 성질이 포악한 일개 무지한이다. 이순신을 모함하여 몰아내고 통제사가 되었으며, 단번에 적을 섬멸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부족하여 패전했다. 그러고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바람에 장병들을 모두 죽게 했다. 이런 원균의 죄를 누가 벌주어야 하는가. …이런 일을 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버릴 것 같다. -
근래에도 가끔 독버섯처럼 솟아나는 돼먹지 못한 원균 명장론, 또는 원균 용장론은 이처럼 당시 국왕이던 선조가 원조였던 것이다. 도대체 원균이 무슨 명장이고 용장이란 말인가. 명장이라면 전쟁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빛나는 전공을 세워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그 어떤 사서에도 원균이 임진왜란이든 그 이전이든 어디에서 적을 무찌르고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는 기록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임진왜란 내내 여러 해전에서 원균이 함대의 앞장에서 적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선조와 원균의 후원세력인 서인들이 끊임없이 이순신을 깎아내린 까닭이 오로지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한 데에 있었다. 원균을 등용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원균을 1등공신으로 올리도록 강요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다. 1등공신이든 2등공신이든 원균을 공신으로 올린 것은 그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공을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 원균은 정말로 칠천량전투 때 전사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의심스럽다. 원균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진 칠천량해전을 다시 살펴보자.
이순신이 선조가 보낸 선전관에게 잡혀가고 그토록 원하던 3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차지한 원균은 이순신이 아끼던 역전의 장수들 대부분을 갈아 치우고 자신의 뜻에 맹종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히는가 하면, 군비는 허술히 하는 대신 운주당에 들어앉아 주색에만 빠졌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이렇게 나온다.
- 원균이 한산도에 부임해서는 순신이 시행하던 모든 군중 약속을 변경하고, 부하 장수와 군사들로서 순신에게 신임 받던 사람은 모두 쫓아버렸으며, 그 중에서도 이영남(李英男)은 전날 자신의 패전한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 더욱 미워하므로 군사들이 통분히 여겨마지 않았다. 또 순신이 밤낮으로 장수들과 함께 전략을 토론하던 운주당에서 원균은 애첩을 데리고 같이 기거하며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에 장수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또 술을 좋아해서 늘 취해 있었고, 그래서 취중에 부하들에게 함부로 형벌을 심히 가하니 군사들은 서로 말하기를, “만일 적병이 온다면 달아날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장수들도 그를 비웃고 군사에 관한 일은 전혀 말하지 않으므로 그의 호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
이런 원균이 통제사가 되고 이순신이 잡혀가자 일본 장수들도 “이순신이 없어졌으니 이젠 아무 걱정이 없다!”고 좋아하면서 잔치까지 벌였다. 1597년 정유년 6월 하순, 그래도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던 일본군은 또다시 이중간첩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후속부대가 곧 바다를 건너오니 조선 수군이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밀서를 전했다. 첩보를 받은 도체찰사 이원익은 도원수 권율과 상의하여 수군의 출동을 명령했다. 간첩 요시라를 이용한 일본군의 똑같은 간계에 세 차례나 넘어간 셈이었다.
명령을 받은 원균은 먼저 육군이 안골포와 가덕도의 왜군을 무찌른 뒤 수륙연합작전을 펴서 부산을 쳐야 한다면서 좀처럼 함대를 출동시키지 않았다. 여러 차례 독촉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함대를 끌고나갔다가 6월 18일에 안골포와 가덕도를 공격했으나 아무 소득도 없이 수군장수인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만 잃고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또 평산포만호 김축은 부상을 당했다. 패보를 받은 권율은 분노하여 6월 21일 원균을 사천까지 호출하여 곤장을 치며 재출동을 명했다. 한산도로 돌아온 원균은 할 수 없이 전함 200척을 이끌고 출동했다.
7월 4일 한산도를 출발한 조선 수군 함대는 5일에 칠천량을 지나고, 6일은 옥포에서 묵고, 7일에는 다대포를 거쳐 부산포로 향했다. 그런데 절영도에 이르니 1천여 척의 적의 대 선단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 함대를 보자 후퇴를 거듭했다. 유인작전이었다. 적이 후퇴하자 원균은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서 돌격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풍랑이 거칠어지자 한산도에서부터 4일간이나 격군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배를 저어왔는지라 싸움이 될 턱이 없었다.
일부는 울산 서생포까지 밀려가 적군에게 격파당하고, 원균은 남은 전선을 수습하여 가덕도로 후퇴했지만 벌써 왜군들이 배후를 지키고 있다가 사정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서 그때까지 일본 수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요 불패의 전함이던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 20척과 군사 400여 명을 잃고 원균은 다시 칠천량으로 후퇴했다. 칠천량으로 퇴각한 원균은 또다시 원수부로 불려가서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한데 불만을 품고 새로운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술만 퍼마셨다. 그러자 경상우수사 배설은 다음 해전에서도 패전이 분명하다고 보고 원균에게 여러 차례 안전지역으로 후퇴할 것을 권했으나 원균은 듣지 않았다.
7월 15일. 배설은 “칠천량은 수심이 얕고 물목이 좁아서 전선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원균은 “이대로 패해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만 할 뿐이었다. 그날 밤 달이 밝은 것을 이용하여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은 포성 3발을 신호로 칠천량을 기습했다. 전에 한 번도 없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은 아군은 용감히 싸웠지만 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게다가 주장인 원균이 끝까지 지휘하지 않고 전선을 이탈해 도주했다. 조선 수군은 궤멸하기 시작했다. 이억기와 최호 등이 그 싸움에서 자신의 전함과 더불어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배설만이 휘하 전선 12척을 이끌고 탈출에 성공, 한산도에 이르자 부하들은 모두 도망치게 한 뒤 군량과 무기들을 모두 불태우고 전라도로 도망쳤다.
원균은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積) 등과 함께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랐는데, 그 뒤의 자취가 종적 없이 묘연하다. 당시 선조의 특명에 따라 한산도에 파견되어 원균의 기함에 동승했던 선전관 김식(金軾)의 장계에 이에 관한 상세한 사정이 나와 있다.
- 7월 15일 밤 10시에 왜선 5, 6척이 갑자기 소동을 일으켜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불타버렸으므로 우리 장수들이 어쩔 줄을 모르며 진을 벌이지 못하는 사이에, 닭이 울 무렵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선이 몰려와 겹겹이 에워싸고 형도 근처에 가득 깔린 채 싸우거니 물러나거니 하여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군사들이 고성 땅 추원포로 물러나 진을 쳤으나 적세가 하늘을 찔러 우리 배들이 모두 불타고 깨지고 장졸들이 모두 불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때, 신은 통제사 원균과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몸을 빼어 육지로 올라왔는데, 원균은 늙어서 달아나지 못하고 혼자서 칼을 짚고 외롭게 소나무 맡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다 돌아보았더니 왜놈 6, 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면서 원균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는데, 원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만호, 안골포만호 등이 겨우 몸을 보전하였고, 모든 배가 불타는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왜적들이 무수히 한산도롤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
김식의 보고에도 원균이 적에게 죽는 장면을 봤다는 말은 전혀 없다. 또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이런 기록도 나온다.
- 원균은 생김새부터 그 몸뚱이가 비대해서 한 끼니에 밥 한 말과 생선 다섯 묶음과 닭이나 꿩 서너 마리를 먹기 때문에 언제나 배가 무거워 걸음을 잘 걷지 못했다. -
이 기록만 보더라도 오늘날 일부에서 ‘역사 재조명’이니. ‘원균 다시 보기’니 하는 아무 쓸모없는 구호 아래 내뱉고 있는 소리, 원균이 용장이었으나 때를 못 만나 불행한 최후를 맞은 비운의 장수라는 말이 얼마나 근거 없는 헛소린지 잘 알 수 있다. 원균이 그때 칠천량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는 또 한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자고로 군대란, 특히 원정군이란 없는 전과도 날조하고 부풀려서 보고하기 십상인데 그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의 보고나, 그 뒤 일본측의 기록에 조선 수군 총수 원균의 목을 베었다는 소리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원균에게는 제대로 해전을 지휘할 지략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장렬히 전사할 용기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최고사령관이 함대가 전멸당하기도 전에 배를 버리고 달아날 수 있었겠는가. 원균이 과연 명장이고 용장이라면 그토록 막강하던 조선 수군을 그처럼 어처구니없게 단 한 번 해전에 말아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개전 초에 경상우수영 함대를 모조리 수장시킨 원균, 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원균은 결과적으로 볼 때 선조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위해 이적행위를 자행한 2대 원흉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시대만 다를 뿐이지 이순신 죽이기라는 점에서는 선조와 오늘날의 원균 용장론자들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순신 장군의 잠을 깨우고 그를 두 번 죽이는 모독행위다. 다만 선조가 자신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의도에서 이순신 죽이기를 시도했다면, 근래 벌어지고 있는 작태는 역사를 비틀고 이순신을 두 번 죽여 상업적 이익을 얻고자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원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이순신을 철저히 모함하고 폄훼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자들이 작가란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등단을 했는가. 마스터베이션같은 자비출판을 해서 등단을 했는가. 자비출판이란 대체로 실력 없는 배우가 제작비를 대로 연극무대에 출연하여 배우로 등단했다고 자가발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한 발 물러나서 이순신 장군의 신격화를 비판하는 것도 좋고, 원균 영웅만들기도 그들의 자유라 하더라도, 이순신 장군을 패장으로 몰고, 심약한 겁쟁이로 몰고, 나아가 이순신 장군을 저급한 인격자나 비열한 음모가로 모는 역사왜곡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 본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400년 동안이나 이순신 장군을 나라와 겨레의 은인으로 숭앙해온 우리 선조들까지 모욕하는 그지없이 어리석은 짓이다.
이순신은 전투마다 앞장서서 적탄을 맞아가면서도 목숨을 걸고 승리를 위해 싸웠다. 그런데 원균이 해전에서 앞장섰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가 적탄을 맞았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원균명장론자, 원균용장론자들은 원균을 위해서는 없는 전공도 만들어내고, 심지어는 이순신의 전공까지 거의 다 원균의 전공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고 강변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은 100척에 이르는 막강한 함대와 무기를 모조리 바다에 쓸어 넣음으로써 자멸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서 1만여 명의 경상우수영 수군이 싸움 한 번 치르지 않고 모두 흩어져버리지 않았던가. 그렇게 부하 없는 장수가 되어 겨우 4척의 전선으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죽은 왜병들의 목을 잘라 재빨리 조정에 보낸 것이 고작이었다. 이것이 '명장' 원균의 빛나는 전과요 전공이었다. 일부 기록에 원균이 개전 초에 이순신에 앞서서 왜선 10~ 30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일방적 주장이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기록이 전혀 없다. 당시 영주(領主) 간의 전공 다툼이 극심했던 일본군의 사정에 비추어볼 때 원균의 함대와 싸운 기록이 전무하다. 일본군의 피해는커녕 개전 초에 조선 수군 판옥선을 단 한척이라도 파괴했다는 보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야말로 원균이 왜 함대와 싸웠다는 말이 전혀 공허한 소리라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이랴. 돌이켜보건대 임진왜란 해전의 승패는 전함과 무기, 또는 군사의 우열에 따라 갈린 것이 아니었다. 장수의 자질이 승부의 명암을 갈랐다. 원균은 아무리 우수한 전함과 화약무기, 역전의 용사가 있어도 장수가 용렬하고 무능하면 백전백패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여실히 증명해주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자에 이런 기록이 있다.
- 상(上)이 “통영의 백성들이 지금도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이충무공의 상(喪) 때는 백성들이 모두 흰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여자들도 모두 흰 치마를 입습니다.”하였다. -
원균이 이순신보다 훌륭한 명장이라면 옛날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이나 한산도 사람들이 어찌하여 구국의 영웅 원균을 추앙하여 단 한 번이라도 향화를 베풀었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을까. 또한 원균이 임진왜란 당시 출중한 용장이며, 그의 전공을 모두 이순신이 가로챈 것이라면 어찌하여 지난 400년 동안 그런 사실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을까.
필자는 이렇게 이 글을 맺는다. 원균이 과연 이순신보다 훨씬 훌륭한 명장이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 장병들은 어찌하여 ‘원릉군(原陵君 :원균)의 후예'를 자처하지 않고 ‘충무공의 후예’라고 하는 것인가. 무슨 까닭에 해군 함대에 ‘충무공 이순신함’은 있는데 ‘원릉군 원균함’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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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뿐 아니라
저급한 정치적 집단의 이해타산적 결과물, 과정물이지 아닐까요? 아무 관련없는 이방인, 제3자가 기록하더라도 개인적 호불호의 관점이 없을 수가 없기 어려운 일이죠
역사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대로 끼워 맞춰지는 퍼즐인가? 어떤 세력의 이득을 위해 역사 비틀기를 하는 자들이
가장 몹쓸 위인들이 아닐까요
그런 하찮은 자들 때문에 이충무공의 성업에 상처를 받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졸문을 읽어주시고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순신 비틀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적국인 일본에서 더 오래 깊이 연구해온 반면, 우리나라 일부 얼간이들은 되레 그분의 전공을 깎아내리고, 뭐 인간 이순신을 본답시고 나약한 인물로 그리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키가 145cm라는 자도 있더군요! 원균명장만들기를 하는 자들, 왜 원균함이 없는가는 생각하지 못하는지요?
천만이 보았습니다. 감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2천만도 가능할것 같습니다!!!
읽어주시고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를 보고 단순히 대승을 거둔 명장이란 사실만 알아서야 안 되겠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원균이 정말로 전사했는지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도 역사적 의문이지요.
평택시에서 시비를 들여 원균 평전도 만들던데... 참 갑갑합니다.
평택에 역사적 인물이 없기 때문일까요? 참 한심합니다.
원균 평전...... -_-;;; 뭐 히틀러 평전도 있긴 하니 원균 평전을 못 만들 건 아니긴 합니다만, 그 내용이 어떤 식일지는 궁금하군요. 원균명장설 쪽으로 이상하게 썼을라나...
@미주가효 네. 이순신 비하, 원균 명장. 이상하게 쓰고있습니다
@bergi10 평택문화원 홈페이지에 가서 소개글 같은 걸 읽어 보니 원균을 공이 많은 명장으로 묘사하는 책인 모양이군요. 문화원에 나온 목차를 보니 평전 결론의 부제가 '6. 결론 : 원균에 대한 평가수준은 그 사회의 성숙 수준을 규정한다' 라고 되어 있어 원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인 모양입니다.
더불어 작년의 평택 쪽 지역신문의 내용을 보니 원균 평전 제작과정에 대한 논의가 있던데 집필을 마감한 뒤 연말에 원씨 가문 대종회에서 감수를 한 다음에 출판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더군요. 평전이라 함은 공적만 높이고 잘못을 감추는 행장 같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비평' 하는 전기문이라 평전입니다. 특정 가문이 평전을
@bergi10 감수한다는 게 과연 '평전'의 취지에 맞는지 심히 의문이네요. 조상님에게 나쁜 이야기는 넣자고 할 리 없으니... (예컨대 이완용 평전도 몇 권 나와 있습니다만, 이완용 평전을 이완용 가문에 감수시키자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어쨌든 주요 기관에는 뿌리는 모양이니 우리 쪽에도 들어오면 한 번 읽어는 봐야겠습니다. 어떤 논리일지 내용이 궁금하네요.
평택에 원씨들이 집성촌을 이뤄 살고 그 후손 원유철이란 놈이 국회의원을 하고 있습니다
아참, 평해거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댓글까지 읽다 보니 본문에 대한 답글은 뒷전이 되고 댓글에 대한 답글을 먼저 달게 되는 주객전도가 벌어졌습니다. ^^;
졸문을 읽어주시고 호평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균명장론은 생각할수록 가소롭고 한심한 노릇입니다.
정말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세상이 어찌될라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충무공뿐아니라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던분들의 공이나 그 후손들은 극서민층이나 신불자로 사시는 반면, 매국을 했던 사람들이나 그후손들은 사회지도층으로 사는 이런 현실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네요...
현세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이 대통령 국무총리 ㅂ장관 국회의원을 하는 그늘에서 독립군 후손들은 헐멋고 굶주리며 공부도 못해 거지처럼 연명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모두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