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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좋은글 & 감동글 스크랩 중랑천(中浪川)과 장미(薔薇)축제(祝祭)
조처음 추천 0 조회 37 16.05.24 19: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래전에부터 버려졌던 땅과 개울이 소생(所生)을 했습니다.

오래전에 중랑천위쪽에서는 방직공장(紡織工場)과

가죽공장(工場) 그리고 각종 공장(工場)에서 뿜어 나오는

폐수(廢水) 때문에 버려졌었고 크게 훼손(毁損)되어

생물(生物)들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강이 되었고

그리고 더한 것이 일반(一般)가정(家庭)에서 버리는

폐수(廢水)는 더 중랑천(中浪川)을 더욱 몸살을 앓게 만들고

물의 빛깔은 잿빛 나는 희색이었고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물에서 뿜어 나오는 고약한 냄새는 코를 찌르고

사람들이 중랑천(中浪川에 접근(接近)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이 시대(時代)에 사는 사오십 대(四五十代)는

참혹(慘酷)한 그 광경(光景)을 두 눈으로 봤을 것입니다.

옛 우리 속담(俗談)에 미꾸라지 용 된다는 속담(俗談)이 있습니다.

중랑천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중랑천은 맑은 물이 흐르고 많은 물고기들이

떼를 이루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랫글중에서)

 

 

 

 

중랑천(中浪川)과 장미(薔薇)축제(祝祭)

글 조 처음

 

중랑천을 끼고 물이 흐르는 좌측(左側)으로 둑이 조성(造成)되어 있으며

둑에는 장미(薔薇)를 심어 터널을 만들고 오월(五月) 중순(中旬)부터

장미(薔薇)가 피기 시작(始作)하여

6월말까지 계속(繼續)해서 피고 있습니다.

오래전에부터 홍수(洪水)를 미리 예방(豫防)하기 위하여

언제 부터인지 알 수 없이 둑이 만들어 져서6*25사변(事變) 후에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여 둑 위에 몇 개 부락(部落)을 이루고

살았는데 시대(時代)의 변천(變遷)으로 인하여

정부(政府) 시책(施策)으로 인하여 모두 정리(整理)되고

그 전에는 판잣집이 늘어 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지방(地方)에서 서울의 드림을 타고 올라와서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생활(生活)의 삶을 시작 했었습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이 자연적(自然的)인 발생(發生)으로

이 곳 둑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始作) 했습니다.

이곳의 둑의 길이는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공릉동을 시작으로

길게 한강(漢江)입구(入口)까지 이어 졌던 곳이 이곳 둑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기거(寄居) 하니까? 교회(敎會)도 생기고

이발소(理髮所)와 미장원(美粧院) 그리고 작은 구멍가게와

복덕방(福德房) 까지 별별(別別) 시설(施設)들이 들어서고

행정구역(行政區域)이 명시(明示) 되고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주거(住居)가 없으니 사람들이 자연히

이곳으로 몰려들어 마구 잡이로 집을 짓고 살았었습니다.

 

이때가 6*25사변(事變)이 터지고 서울이 수복(收復)이 되자

사람들은 지방(地方)에서 마땅한 일자리도 없고 먹고

살길이 막막하다보니 자연(自然)히 서울로 옮겨 오고

이곳에서 서울 생활(生活)이 시작되던 곳이 이곳 둑이었던 것입니다.

 

오랜 세월(歲月)이 흐르고 정부(政府)에서는 이곳을 정비(整備)하기 위하여

이주(移住)대책(對策)을 세우고 둑에서 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지금의 서울대가 있는 신림동이나 봉천동 같은 변두리에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주(移住) 시키고 이곳 둑을 을 보완(補完)해서

모든 집들을 강제(强制)로 철거(撤去)하여 둑에다 나무도 심고

길을 만들어서 오랜 기간(期間)을 방치(放置)해 두었는데

나라의 살림이 부강(富强)해 지고 민주주의(民主主義)가 도입(導入)되고

지방자치제도(地方自治制度)가 활성화(活性化) 되고부터 나라에서는

둑을 재정비하여 중랑천(中浪川) 아래에 양쪽을 개발(開發)하여

간선도로(幹線道路)를 만들고 둑에는 각종(各種)과일 나무와

장미공원(薔薇公園)이 조성(造成)되여 아름답게 가꾸어 졌습니다.

이곳의 내력(來歷)을 소개(紹介)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 졌습니다.

 

중랑천(中浪川)의 시원(始原)은 동두천에서 내려오던

실개울이 의정부(議政府)에서 합수(合水) 되어

중랑천이라는 이름을 얻어서 그 이름은 중랑구에서 따고

위로는 의정부(議政府)와 노원구 그리고 건너편으로 성북구와 동대문구까지

이어 지며 한강(漢江)하류(下流)에서 성동구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하천(河川)도 제자리를 잡아 가는 모양입니다.

중랑천을 끼고 흐르는 개울의 이쪽저쪽의 양쪽에는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고 이름도 생소(生疎)한 각종(各種) 풀들이 자라나서

사람들의 휴식(休息)공간(空間)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울 양쪽에는 의정부(議政府)에서 자전거(自轉車)길이

한강(漢江) 입구(入口)까지 이어 지고 배를 타고

깊은 강폭에 가야 볼 수 있는 누치와 잉어가

다리위에서 내려다보면 떼를 지어 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중랑천이 끝이 나는 한강(漢江)하류(下流)에는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사람들의 눈을 황홀(恍惚)케 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중랑천 전 구간(區間)의 여울에는

수위(水位)를 조절(調節)하게 하는 보(洑)가 만들어 지고

물위로 원앙새와 재두루미 그리고 논병아리와 긴 머리 황새와

나는 새에 대해서는 무례한 이라 잘 모르겠지만 갈대숲속에는

새들의 둥지가 간혹 눈에 뜨이기도 하고 아직 부화(孵化) 되지 못한

알들을 어미가 품고 있는 것을 간간히 볼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에는 버려졌던 땅과 여울이 낀 개울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물이 흐르는 물의 시원(始原)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그 지역성(地域性)에 맞게 각종(各種)테마 공원(公園)이

 조성(造成)되고 체육(體育)시설(施設)이

완비(完備)되어 시민(市民)들의 휴식처(休息處)로 자리 잡음을 했습니다.

 

오래전에부터 버려졌던 땅과 개울이 소생(所生)을 했습니다.

오래전에 중랑천위쪽에서는 방직공장(紡織工場)과

가죽공장(工場) 그리고 각종 공장(工場)에서 뿜어 나오는

폐수(廢水) 때문에 버려졌었고 크게 훼손(毁損)되어

생물(生物)들이 살 수 없는 죽음의 강이 되었고

그리고 더한 것이 일반(一般)가정(家庭)에서 버리는

폐수(廢水)는 더 중랑천(中浪川)을 더욱 몸살을 앓게 만들고

물의 빛깔은 잿빛 나는 희색이었고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물에서 뿜어 나오는 고약한 냄새는 코를 찌르고

사람들이 중랑천(中浪川에 접근(接近)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이 시대(時代)에 사는 사오십 대(四五十代)는

참혹(慘酷)한 그 광경(光景)을 두 눈으로 봤을 것입니다.

옛 우리 속담(俗談)에 미꾸라지 용 된다는 속담(俗談)이 있습니다.

중랑천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중랑천은 맑은 물이 흐르고 많은 물고기들이

떼를 이루어 이동하고 있습니다.

중랑천이 다시 소생(疏生)하여 살기 좋은

사람들의 쉼터로 발전(發展)했습니다.

우리민족(民族)은 6*25사변(事變)의 전란(戰亂)을 겪고

전 세계(全世界)에서 그 유래(由來)를 찾아 볼 수 없이

우리 민족은 오뚝이처럼 우뚝 솟아나서 일어섰습니다.

그런 힘의 원천은 중랑천(中浪川)에는 우리가 낸 세금(稅金)이

중랑천(中浪川)을 살렸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노력(努力)을 했기에 그래서

더욱 애착(愛着)이 갑니다.

아무 말이 없이 흐르는 중랑천(中浪川)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의 임무(任務)인 일만 완수(完遂) 합니다.

사람들이 중랑천(中浪川)에다 무엇을 버리거나

땅을 파가든지 해도 중랑천은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중랑천(中浪川)을

죽음의 개울이라고 생각(生角) 했었습니다.

중랑천(中浪川)은 이 시대(時代)에 사는 사람들의 쉼터이고

언제 부터인지도 모르게 새들이 날아들어 새들의

토박(土薄)이가 되고 그리고 철새들의 낙원(樂園)이 되어

사람들의 옆으로 바짝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거진 갈대숲사이로 새들이 지저기는 소리가 들리고

밤에는 들짐승들의 눈빛이 사람들의 눈과 마주쳐

놀라서 도망(逃亡)을 가는 광경(光景)을 가끔 느끼며

이런 모습(模襲)을 어디서 보고 느낄 수가 있습니까?

지금도 중랑천(中浪川(은 아무 소리도 없이 흐르면서

쉬지 않고 자기(自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유유(唯唯)히 흐르는 중랑천을 우리는 아끼고 보살펴서

우리들 후손(後孫)에게 물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장미(薔薇) 축제(祝祭)가 올해에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지 알 수 없지만

장미(薔薇) 계절(季節)이 오면 이 행사(行使)는 계속(繼續)될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중랑천 둑길을 걷노라면 등허리에 젖어 있는 땀들이

들어 가버리는 시원함을 느낍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중랑천(中浪川)은 말없이 흐릅니다.

이른 아침에 이슬 맞은 장미(薔薇)들이 방끗하고 웃으며 우리를 맞이합니다.

가을이면 붉은 감이 중랑천둑길을 화려(華麗)하게 해 주며

겨울이면 겨울대로 새로운 운치(韻致)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感謝)를 드리며 지금까지

불철주야(不撤晝夜) 애써 오신 중랑구청 관계(關係)

공무원(公務員)여러분의 수고(愁苦)도 빼놓을 수 없으며

여기에 감사(感謝)와 아울러 경의(敬意)를 표 합니다.

할렐루야! 감사(感謝) 합니다.

 

노래 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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