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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0일(목)
* 시작 기도
(출 3:11-12a)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
모세는 애굽의 왕자, 곧 자기의 힘이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자 애썼습니다.
이를 위하여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형제와 애굽의 군사가 싸우는 것을 보고 애굽 군사를 쳐죽여 모래에 묻는 일도 있었습니다.
다음날 이스라엘 형제들끼리 싸우는 것을 본 모세가 형제끼리 왜 싸우느냐면서 말리자 그 중 한 명이 네가 어제는 애굽의 군사를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는 말에 그 일이 탄로난 것을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의 두려움의 이유는 당시 바로(투트모스3세)왕은 모세의 정적(政敵)이었습니다.
투트모스3세인 바로는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핫셉수트 공주의 사위이긴 했지만 모세가 핫셉수트의 양자이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바로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항상 모세를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하여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면 당장 모세를 처단하려 했기에 모세는 바로의 군사를 죽인 일로 인하여 미디안으로 도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을 치던 모세는 호렙 산에 이르러 꺼지지 않는 떨기나무의 불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서 그들을 영도하여 출애굽시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거사를 이루려고 할 때는 눈도 깜짝하지 않던 하나님이 지금 자신이 아무런 힘도 없고 겨우 양치는 목동인 자기를 향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출애굽시키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말씀보다도 그에게 ‘임마누엘’ 곧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장 귀하고 힘이 되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도 동일하게 그 말씀을 주십니다.
하여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14:1-14
제목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나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 나의 묵상
언약 공식은 하나님과 우리가 왕과 백성, 아버지와 아들,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가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새 언약 백성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우리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이처럼 신랑되신 주님께서 신부인 우리를 데리고 함께 살아갈 신방을 마련하고자 하신다.
신부는 두려움에 떨면서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신랑 되신 주님이 그런 신부를 안심시키고 계신다.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는 부자이시다. 우리가 함께 살 방도 많다. 그래서 우리가 살 신방을 마련하러 지금 내가 가려는 것이다. 내가 가서 우리가 살 집을 마련한 다음에 다시 와서 너를 데리고 가서 함께 살자. 그런데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의 길을 너도 알고 있잖니?”(1-4).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그토록 보여주시기를 원했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실 때가 되었다.
그곳은 곧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인 주님의 신부들과 함께 거할 장소인 신방으로써, 창세전 곧 만물 위의 세계를 말한다.
그곳은 태초에 아들이 아버지의 품속에 거하던 그 나라이다.
그곳에 가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할 신방을 준비하시고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그곳으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주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던 부활을 이루시고자 함이다.
(요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그런데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곳의 가는 길을 너희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 길은 다름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은 또한 내가 가야 할 길인 것이다.
주님이 약속하신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무덤의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요12:32-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도마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제법 솔직한 사람인 것 같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궁금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도마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고 그 길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이에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아버지도 안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고 또한 보았다.”
아버지가 계신 그 나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한 길, 예수님밖에 없다.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생명을 가지신 아들 예수님이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아담 안에서 ‘만들어진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 생명’으로 바뀌었다.
내 안에 태어난 생명, 즉 아들의 생명이 살아 숨쉰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며, 그분이 바로 길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만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요10: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래서 주님은 나를 아는 자는 아버지를 안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고 또한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아들 되신 주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하나이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로 거하시면서 자신에게 계시해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또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요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신 요구에 대한 답변이셨다.
나는 도마와 같이 주님이 가시는 곳과 가는 그 길이 어디인지 잘 몰랐던 자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 말씀은 그저 관념적인 수준에서 이해했을 뿐이다.
주님이 통과해야만 하는 그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요, 나 역시 그 십자가의 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통합복음인 롬6:4절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동안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이제 내가 연합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무덤에 장사되었다.
이 복음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십자가로 나아가게 하며 또한 무덤에 장사되어 그곳에서 주님과 말씀으로 사귐을 갖는 성전을 짓도록 만들었다.
하여 이제는 매일 말씀묵상을 통하여 십자가로 나아가며 거기서 얻는 힘으로 나에게 닥치는 무덤을 벗어나려고 하기보다는 그곳에서 잠잠히 주님과 사귐의 시간을 갖는다.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듯 나 역시 그곳에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새 생명, 즉 아들의 생명을 입고 일어난다.
이 일은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하루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부침의 연속이지만 이제는 내 힘을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오히려 그 시간을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 선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모래 위에 지은 교회가 무너지고 깨져서 반석 위에 다시 지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영화와 명예, 권세, 부(富) 등 총체적인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작금의 교회가 거머쥐려는 것들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번 심판을 통해서 더 낮아지고 겸비해야 한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런데 이 시대의 목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 놓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무너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그 장본인은 바로 내가 아니던가?
하나님의 뜻과 언약을 알지 못하고 그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애매한 이들만 더 고통을 당하고 그 심판은 더 길어질 뿐이다.
(창 43: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야곱은 애굽의 총리 요셉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는 말에 모든 것이 자기를 해롭게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애굽으로 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다.
그렇게 하면할수록 고통은 가중 될 뿐이다.
이에 가나안 땅에 기근은 더욱 심해진다.
기근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야곱으로 하여금 양식이 있는 애굽을 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야곱은 알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근시안적인 모습으로 육신적 고민만을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허투루’가 없다.
모든 일이 언약 안에서 행하신다.
나와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 비록 고통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화살을 누군가에게 돌리기 전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이 시대 변질되어 가고 있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철저히 주님 앞에 회개하고 지금 그 자리가 주님과 함께 하는 무덤으로 받아들여 주님이 원하시는 뜻인 영생을 얻어 누리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순간순간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이 솟구쳐 올라와 한바탕 휘저어 놓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정욕의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틀지는 못하도록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막아섭니다.
하여 오늘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도마와 같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하며 주님의 온전한 가르침 앞에 머리를 조아리오니 주여 이 종을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이 가신 그 길로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으로 하루를 살게 하소서.
현재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일어나는 체제 전쟁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작금의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고 나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 앞에서 변질된 나 자신과 교회의 모습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욱 통회하며 자복하여 십자가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나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인정하며 무너지는 성벽의 틈을 막아서는 자로 나와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연약한 주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사 육신의 질고로 당하는 고통 앞에서 믿음 잃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을 믿고 나아가는 믿음의 군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