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0이 넘으면 새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보단 뿌려놓은 것들을
거둬들여야 하는게 훨씬 자연스러울 나이입니다.
그 나이쯤 되면 주머니 속 불룩한 지갑엔 황금빛 카드가 너댓장 꽂혀있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주눅들만한 장짜리 명함도 서너장쯤 구색갖춰
꽂아놓고 술자리에선 그들과의 인연을 힘주어 역설하며 '글마 내가
키웠다
아이가' 호기를 부려야 술맛도 나는 그런 나이입니다.
명절이면 하다못해 무슨무슨 과장이나 무슨무슨 이사장 명함 꽂힌
굴비두름에 갈비짝이 가슴께 까지는 쌓여야 명절기분도 날법한 그런
나이입니다.
몸이 재산이라며 가시오가피에 홍삼에 옥돌침대에 철따라 체질따라
끔찍히
지몸 챙기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그런 나이입니다.
별로 특별하지 않아도 입이 딱벌어지게 잘나가지 않더라도 대부분 그렇게
산다는데 남들은 그러고 산다는데 그걸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바둥거려도 그게 안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에선 카드 대신 유인물이 나오던 사람.
나이 50이 넘어 허구헌날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던 사람.
아빠를 잃고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그렇게 이 모진 세상 남겨질
가족들에게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도 애비라는 이름으로도 수도꼭지
고쳐놓는 거 밖엔 남겨줄 게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힘겨웠을 마지막 휴가를 보내며 마누라와 함께 저녁을
먹는 걸로 그동안의 고마움과 평생의 죄스러움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수도꼭지 틀 때 마다 물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질 가족들 생각을 그라고
왜
안했겠습니까?
막내딸 끌어안고 "못난 아빠 용서해라" 그게 마지막인줄 알았다면 '아빠,
괜찮아 난 그래도 우리 아빠가 최고야' 천만번이라도 더했을 그 한마디를
평생안고 살아야 할 막내딸의 한을 그라고 왜 헤아리지 못했겠습니까?
구속된 동지들 면회 가서는 어떤 신신당부 보다 더 절박한 통곡을 목
메이게 쏟아놓고 돌아섰던 그 눈물의 의미를 이제사 헤아리며 가슴을
치는
동지들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을 그라고 왜 짐작치 못했겠습니까?
살기 위해서 호루라기를 불었던 사람.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10년이나 기꺼이 대의원을 맡았던 사람.
정말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어떤 타협도 할수 없었던 사람.
그날 새벽 걸었다가는 끊고 걸었다가는 끊고 끝내 마지막 숨소리만
흘러나오던 전화.
당신과 함께 새카맣게 타버린 그 전화기를 통해 무슨 말이 하고
싶으셨습니까?
이 땅에 50년을 살았던 당신에게, 50년을 뼈빠지게 상머슴으로 살았던
늙은 노동자에게 전과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당신이 떠난 1주일 후에도
법정에선 배 달호 피고인을 불렀다던 이 기가막힌 나라에 무슨말을 더
남기고 싶더이까?
청년이었던 시절부터 그 날까지 큰 딸이 장성한 세월 20년을 고스란히
바쳤던,소금꽃 흐드러지게 피고지는 소금꽃나무 당신을,징계자
가압류자로
내몰던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가 천국에 어떤 말을 더하고 싶더이까?
50년을 살고도 영정에 쓸 사진 한 장 변변히 남길 수 없었던 이 빌어먹을
세상에 무슨 할말이 더 있더이까?
유서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하셨습니까?
평생 노동으로 내려앉은 삭신에 신나를 붓고 다리가 오그라붙고 손가락이
타들어가고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숨통을 막아 마지막까지도 그렇게
고통뿐이었으면서도 뭐가 그리 미안합디까?
당신을 그렇게 죽인 자들은 문상 한번 안오는데 뭐가 그리도 미안합디까?
가압류가 생존권을 포기하라는 사형선고 임을 뻔히 알면서도 변변한
투쟁한번 못했던 자들에게 도대체 뭐가 그토록 미안합디까?
얼마나 더 죽어야 합니까?
다음엔 또 누구 차례입니까?
도대체 우린 언제까지 만장을 앞세워야 합니까?
한진중공업에서 30년을 일했던 노동자가 명퇴로 짤리고 모가지가
짤렸는데도 30년 오래된 습관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몸과 마음을
깨우는데 그 시간에 일어나 갈데가 없는 게 새삼 또 서럽더라는 강씨
아저씬 보일러공장 하청 노동자가 됐다는데 언놈이 아직도 개혁을
말합니까?
파업 한번에 전과자에 징계에 가압류에 그야말로 합법적인 패가망신이
보장되는 5%의 왕국에서 누가 여전히 복지사회를 떠듭니까?
두산중공업 악랄하다지만
부산에 가면 한진중공업이 그렇고
서울에 가면재능교사노조,건설운송노조,한국 시그네틱스 노조가 그렇고 목포에 가면 목포카톨릭병원 노조가 그렇고 광주에 가면 동광주병원 노조가 그렇고
울산에 가면 효성 노조가 그렇고 태광 노조가 그렇고
제주에 가면 한라병원 노조가 그렇고
발전노조, 철도노조,장은증권 노조 대우자판
노조가 그렇는데 누가 또다시 변화를 얘기합니까?
배 달호 동지,배 달호 열사여!
혼자 가기엔 너무 먼 길... 새카맣게 오그라붙은 몸뚱아리론 너무 힘겨울
구비구비 구천길이 아득하거들랑 언제나 처럼 호루라기 불며
앞장서시구려.
동지의 넋이 함성이 될 산자들의 투쟁속에 자본의 사슬을 끊어내고
노동해방 깃발 휘날리며 당당히 앞장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