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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목적지인 화순군 동면 '송파정'
다섯 형제가 아버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정자(위에서 뜻을 살펴본 바,
누정보다는 정자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를 세웠다고 한다.
원래 정자문화는 소외문화라는 설명과 함께 익히 들었던 하서 김인후, 조광조,
심재선생 등에 관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았고, 이렇게 정자를 찾으면
반드시 앉아서나 서서 주변 경치를 바라보라고 귀뜀 하는 자상함까지......
이곳에서 얼마전에 가야금 연주와 함께 소리꾼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담양은 정자문화와 가사문학이 발달한 곳이라고 알고 있다.
좁은 의미의 가사문학권, 넓은 의미로 정자문화권이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
그 세세한 의미까지 알고 이 말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좀더 명확하게 알아둘 필요성을 느끼기에 자세히 기록해둔다.
이 정자에는 가운데에 방은 없다. 물론 아궁이도.
남고 김삿갓이 3일간 머물렀다는 이곳 송파정,
바위 틈에서 오랜 세월 견디고 있는 소나무가 예사롭지 않다.
두번째 목적지 : 화순군 동면 '환산정(環山亭)'
和順郡 東面 瑞石里 하서마을 앞 서성저수지 곁에 있다.
환산정 가는 길이 환상적이다. 나무로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 환산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원래 이 위치에 없었으나 저수지로 인하여 옮겨 놓았다고 한다.
군데군데 신축된 건물들이 눈에 조금 거슬렸다.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中齋室 건물이다.
文化柳氏 百泉 柳涵이 소축한 정자로 백천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한양을 향하던 중
강화조약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이곳에 머물며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정자에는 가운데 방 한 간(칸이 아닌 간으로 써야 맞는다고 함)이 있다. 호남 정자의 특징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경상도 쪽에는 서원(동제, 서제로 불리는 선 후배 기숙사까지 갖춘
도산서원이 먼저 떠오른다. 기숙사까지 갖추고 제자, 후학을 양성한 곳이 바로 경상도 쪽 서원이다.
왠지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호남인의 피해의식 때문인가?)이 많고 그보다는 덜한 전라도 쪽은
쫒겨오거나 귀양 온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방과 아궁이가 딸린) 그곳에서 자연을 벗삼아 사색을 즐긴
이른바 정자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지금도 영남과 호남의 빈부격차가 느껴지는 건 여전하지만
이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닐 터.
현재의 '환산정' 편액은 원교 이광사 선생이 썼다고 한다.
이광사 선생 하면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 현판과 '추사 김정희'를 모른 체 할 수 없다.
조금 긴 이야기지만 전 후를 살펴보기로 하자.
......전략
조선의 서체는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개성적이며 향색(鄕色),
즉 민족적 색채가 짙은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추사는 이를 글씨의 고전,
중국 한나라 때 비문글씨체의 준경한 법도에 근거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중략
제주도 귀양가는 길에 추사는 전주,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다. 귀양살이 가는 처지임에도 추사는 그 기개는 살아 있어 대흥사의 현판
글씨들을 비판하며 초의에게 하는 말이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호통을 쳤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이겨 원교의 현판을 떠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 7년 3개월, 햇수로 9년.
추사는 유배중 부인의 상을 당하고, 유배중 회갑을 맞았으나 축복해주는 이 없는 외로움을 맛보았다.
처음엔 찾아주던 제자들의 방문도 뜸해졌다. 그런 중에 변치 않고 책을 구해다 주는 이상적의 마음에
감동하여 "날이 차거운 후(歲寒然後)에 소나무 잣나무 푸르름을 안다"고 '세한도'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귀양살이 하면서 그 외로움, 억울함,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추사는 글씨를 쓰고 또 썼다.
한나라 비문체 뿐만 아니라 각체를 익혔던 그가 여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듬뿍 실은 개성적인 글씨를
만들어 내니 그것이 곧 추사체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셔먼호 사건 때 평양감사를 지냈던 박규수가 "추사는 바다를 건너간 후
남에게 구속받거나 본뜨는 일 없이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평한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1848년 12월, 추사는 63세의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추사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초의를 만나 회포를 풀던 자리에서 추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추사 인생의 반전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는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었다.
추사 김정희, 그는 분명 영광의 북경이 아니라 아픔의 제주도로 갔기에 오늘의 추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다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리게 되었고, 그 왼쪽에 있는 승방에는
추사가 귀양가며 썼다는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이 하나 걸려 있으니 나는 여기서
조선의 두 명필이 보여준 예술의 정수를 다시금 새겨 보곤 한다.
- 네이버에서 옮김
강진의 백련사에도 이광사선생의 필체를 볼 수 있다.
이 환산정이라는 글씨는 붓으로 쓴 글씨가 아니라고 한다.
대나무를 이로 잘근잘근 씹어 붓처럼 만들어 먹물을 묻혀 글씨를 썼다 한다.
갈필이라고 하는데 대한민국에 다섯 분이 이 글씨체의 명백을 이어가고 있다고.
이 갈필로 쓰는 것은 나라가 흔들릴 때 우국충정과 글쓰는 이의 절개와 지조를 나타낸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이광사의 필체를 배워 쓴 글씨가 '운림산방'이라고 하는 이교수님의 말씀도 기억하자.
봄에 벚꽃이 피면 장관이라고 한다.
주변에 들어선 최근 건축물들이 경관을 어지럽히고 있지만, 문화재가 아닌 문화 류씨
개인 소재이기 때문에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많다고 심해설사는 전한다.
백천재 류선생 유적비" (호 백천재 , 이름 류암)가 있고 그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환산정 왼편에 자리한 200년 된 소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고 한다.(일명 씨받이 소나무)
멋진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곳, 봄이 되면 다시 찾아도 좋을 환산정.
그 환산정을 뒤로 하고 세번째 목적지는 임대정.
'임대정', 임대정 원림으로 유명하다는데,
원림이라 함은 자연을 그대로 끌어들여 정원을 만듦을 말한다.
소쇄원을 모른 체 지나칠 수 없다. 다시 소쇄원에 갈 기회가 있거든 담장 아래 흐르는
계곡물을 유심히 살펴 볼 일이다. 다리를 건너며 왼편과 오른편도 반드시 눈여겨......
'임대'라는 뜻은 산을 대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임대정 앞으로는 사평천이 흐른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라는 시를 화순군민 뿐만 아니라, 호남인들은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송정리 역사 안에 걸려있던 사평역이란 시가 지금도 그 자리에 걸려 있을까?
임대정 측면의 수림재는 '고반 남억'이라는 분이 낚시를 드리우고 주변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네모난 모양 연못 가운데 둥그런 동산이 있다. 그곳에 심겨진 배롱나무 몇 그루.
바깥의 네모 모양은 땅을 의미하고 가운데 동그란 모양은 우주를 뜻한다고.
임대정은 사해 선생 초려지로 바로 왼쪽에는 '반기'(작은 연못)가 있다.
가운데 돌을 하나 놓아두었는데 그 돌은 바로 자연을 뜻한다고 한다.
'세심'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쉽게도 물이 끊겨 마른 땅만 보이고.
정자 안에 우주와 자연을 끌어안았으니 이곳 주인은 세상 부러울게 없는 선비이지 않았을까.
하여
잠시 다녀가는 우리지만 어찌 그 신선놀음을 잠깐이라도 맛보고 가지 않을손가.
개구리밥이 동동 떠 있는 연못, 빠알간 우렁이(수입 우렁이) 알이 연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어떤 사람에겐 보이지 않았을 수도......
오솔길을 걸어 내려오며 멋진 한 컷!
11월 중순. 단풍의 절정기가 되면 갈참나무가 빨갛게 물들고, 애기단풍나무의 붉은 단풍과
노란 은행나무 단풍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는데......
우리는 조금 출출해지려는 뱃속을 달래며 오전의 마지막 순서인 오지호 화백 기념관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이성부 시인의 '광주에 가면'이라는 시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서울을 닮지 않은 광주를 만나고 싶은 자
무등을 등에 업은
지산동 골짜기 초가집을 찾거라."
오지호 화백의 호는 모후산인.
우리나라 서양 화를 개척한 개척자라로 당시에 서양화를 공부하려면 일본의 동경大를 가야 했는데
오화백은 일본에서 공부 하였으나, 우리 정서를 화폭에 많이 담았내기에 힘썼고 한국적인 인상파
화가로 자리를 굳혔다고 한다.
1층 전시관에 들어서니 벽에 걸린 액자 가운데 가장 커다란, 칸나꽃이 그려진 액자가 유독 눈길을 끈다.
색감이 화려하고 밝은 색을 많이 사용한 오화백은 따뜻한 마음과 화사함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최초로 김주경과 2인 화첩을 제작하여 발행했다고 한다.
당시 1,000부를 발행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집안 장롱 깊숙히 간직해 둔 화첩이 있거든 그 천부 중 하나가 아닌지 살펴 볼 일이다.
만약 그런 행운을 붙든다면 글과 함께 노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 않은가.
지하 전시관에서 본 초기(1929년) 작인 소녀를 감상했다.
지극히 한국적인 순수함을 간직한 어딘가 좀 세련되지 못한 듯한 그 그림 속의 모델이었던
소녀가 궁금하다. 그 후 53년이 흐른 1982년에 그린 유럽풍의 두 소녀 그림이 대조적이다.
더 깊은 뜻이 있으련만 다 헤아리지 못하고 서둘러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실이 이곳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집이 비어있다고 한다.
울타리에 매달린 잘 익은 호박 한덩이와, 담장 겸 장작을 쌓아놓은 장작더미 사이에 달밤도 아닌데
샛노란 달맞이 꽃이 수줍은 듯 피어있다.
이곳은 화순군 이서면.
물염정 근처 적벽 경치가 뛰어난 곳에 자리잡은 우리 일행이 식사 할 곳.
입구에 들어서니 화순군에서 보호수로 지정받은 수령 250년 된 우람한 느티나무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눈을 멀리 두고 주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보니 여행을 그리 많이 하지 못한 내 눈에도 범상치 않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마누라와 아들이 집으로 모셔가면 다시 이곳 동복으로 오기를 반복했다는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닐 것 같다.
식후에 둘러본 정원의 돌틈에 피어있는 탐스러운 다알리아 꽃이 가을 여행의 화사함을 더해준다.
송이송이 피어있는 다알리아꽃에 꿀을 따는 벌새와 벌이 붕붕거린다.
다알리아꽃과 벌새
가을에 핀 다알리아2
눈의 화사함과 포만감에 부러울 게 없다.
물염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물염정에 오르기 전, 저 멀리 방랑시인 김삿갓이 지팡이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 내게 다가올 것만 같다.
삿갓 시인은 이곳 정씨 집안 사랑채에서 기거하다 말년을 맞았다고 한다.
사후 3년 만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강원도 영월 노루목에 모셨다고 하는데,
생전에도 아내와 아들들이 고향으로 모셨으나 이곳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고 한다.
잠시 그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고 넘어가자.
1863년 3월 29일 전라도 동복 구암리에서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고,
3년 후 아들 익균이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 네이버에서 옮김
앗! 병풍 모양의 특이한 비(碑).
검은 돌에 흰 글씨라, 시를 읽고자 하나 의미가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걸 어쩌나
내심 걱정을 했는데 뒷면으로 돌아가니 이게 웬일인가!
모두 해석이 되어 있다.
비를 세운 이가 잘한 일 중 특히 잘 한 일이 이 일이 아닐까.
한 자 한 자 새긴 석공의 공로도 잊지 않겠지만, 후손들이 다녀갈 때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배려함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한 편 한 편 읽어 내려갔다.
첫 구절.
나의 한 평생을 돌이켜 보니 슬프다고 말한다.
찌르르 무엇인가 목줄을 타고 내려가며 눈앞이 흐려온다.
일행은 벌써 물염정에 올라 좌정하고 부르는데 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걸 눈치 채신 회장님.
펜을 굴리는 내 수고를 덜어주신다.
찰칵!
이 한 방이면 두고두고 안방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걸.
고맙습니다 회장님.^^*
비의 뒷면,
역시 뒷면. 글로 풀어놓음.
비의 앞면.
모두 모이셨나요? 삿갓 시인과 함께 멋진 한 컷.
비의 내용을 보기 전 사실 사진부터 찍었다고 말 못함.^^*
이곳은 '물염정'(勿染亭)
二西面 勿染里 同福川岸에 있다. 단층의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형이다.
중종. 명종대에 成均館典籍.春秋館博士 및 求禮.靈岩.錦山.礪山.豊基郡守 등을 역임한 勿染 宋庭筍이
구축한 정자이다.
정자는 16세기 中棄傾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후일 그의 外孫인 금성 羅氏 滄洲 羅茂松과
九葉 羅茂椿 兄弟에게 물려줘 현금은 羅氏門中에서 所有하고 있다.
수차례의 重修를 거쳐왔는데, 1966년에 다시 重創하여 1981년에 補修한 것이다.
亭內에는 金麟厚, 李植, 權○, 金昌協, 金昌翕등의 詩文과 勿染亭의 양여사실을 수록한
古文書형태의 현판이 있어 이채롭다. 28개의 현판이 있다.
물염정에서의 느긋한 식후 담소.
운주사 와불 얘기도 나왔는데, 와불이 투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심해설사로부터 들었다.
응회암으로 새긴 부처로, 이 응회암은 화산 폭발로 인한 재가 쌓여 된 것으로 돌 자체가 약해 세세히
조각할 수 없으며, 일본 토속신앙인 밀교에 관련된 민간신앙과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을 내어 운주사 대웅전 뒤 산신당도 살펴보고, 소설가 황석영의 '장길산'을 읽어보셔도 좋겠다.
화순적벽은 적벽강을 끼고 7km라고 한다.
백아산에서 물이 흘러 동복을 돌아 흐르는데 4군데의 적벽이 있다고 한다.
물염적벽, 노루목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붙인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차후 이 적벽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이 물염정 정자의 이름은 '물염'은 '티끌에도 내가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며,
'동복읍기'의 기록을 보면 송경순의 호가 물염이어서 이름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옥과 현감을 지낸 하서 김인후가 왕래하였다고 한다. 한양에서 순천가는 길목으로
이곳에서 동복 현감과 옥과 현감이 자주 만났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 물염정에 머물렀다.
물염정을 떠나며 걸려있는 편액들을 살펴보는데 아름다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낙엽을 주워
붉은 밤을 익히고
아내는 국화를 따서
흰 술에 띄우는구나."
오늘 밤에는 남편을 마주하고 맑은 소주잔에 쑥부쟁이 꽃잎이라도 띄워야 할까보다.
이 좋은 경치를 혼자만 즐기려니 한 집에 사는 사람에게 좀 미안하다.
아직은 그래도 덜 미안하다. 노루목적벽이 아직 저만큼에 있기에......
물염정을 떠나 상수도 보호구역 안으로 접어들었다.
아무나 함부로 올 수 없는 곳.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시는 문예창작반 동우들께서 뭉치면 능치못할 일이 없나니......
특별한 곳으로 안내되어 먼저 망향정에 들렀다.
우리보다 먼저 온 일행(그들도 특별한 이들?)이 있어 망향정 아래 위치한
망미정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다 만난 친구들.
빠알간 냉감열매가 나를 유혹한다.
김사익의 노래 '찔레꽃'이 생각나는 찔레꽃 열매와 억새 한 줄기
쑥부쟁이도 끼어 달라고 한 몫 거든다.
드디어 망미정(望美亭)
二西面 獐項里의 앞산에 있다. 원
래는 赤壁의 對岸에 있었으나 최근의 同福댐 공사로 인하여 이 지역이 水沒됨에 이건한 것이다.
단층의 팔작지붕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中齋室을 갖추고 있다.
赤松 丁之雋이 築亭한 정자인데 그는 淸淨齋 丁岩壽의 孫, 嘉淵 丁有成의 子로서, 丙子胡亂時
擧義하였다가 亂後 이곳에 은둔하면서 諸賢과 交遊하며 지내었다.
그의 死後 道內의 儒林들이 다섯차례나 상소하여 忠貞의 행정을 포상하라고 요구하였을 정도로
忠節로 당대에 이름높았다. 정자는 1646(仁祖 24) 년에 건립된 것이다. 赤松遺集이 전한다.
이 망미정 편액 글씨는 전 김대중 대통령 친필이라고 한다.
여기까지와서 쓴 건 아니고 가서 받아왔다고 하는군요.
종일 수고가 많으신 심홍섭 문화재전문위원의 환한 모습이 멋지군요.
쥐구멍이 있어 손수 쇠손을 석회를 발랐다고 하는데 문화재를 아끼고 보살피는
그의 정성을 엿볼 수 있었고, 지금 보이는 곳의 왼쪽에서 보면 또렷하게 그 흔적이 보인다.
이곳 망미정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뒤쪽에 병풍처럼 드리워진 능선과
백제의 철옹성과 수려한 노루목적벽 경관이 펼쳐진다.
자, 그럼 노루목적벽 경치를 보러 가지요.
이곳은 수심 96m로 이곳 물은 동복 본댐으로 흐른다고.
남면에서 이곳 경치를 감상하려고 걸어 올라온다고 한다.
저 위에 우뚝 솟은 곳은 백제의 철옹산성, 동학란 때 의병을 훈련하였다고 한다.
현재 보이는 수위는 2/3가 가라앉은 상태라고 한다.
'적벽동천'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물 속에 잠겨 있는데 물이 줄었을 때 탁본을 떠왔다는 심해설사.
망미정 望美停(전 김대중님 친필 편액) 앞에서 바라본 적벽경치
경관을 이어 붙인 4장으로 만든 노루목적벽 파노라마 멋진 사진작품을 만들어 주신 문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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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목적벽에서.
다음은 망향정에서 바라본 노루목적벽 경관입니다.
마지막으로 '화순 적벽'에 대한 자료.
전라남도 화순군 창랑천 주위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경승지(景勝地). 전남기념물 제60호.
1982년 10월 1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60호로 지정.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 약 7km에 걸쳐 발달한
크고 작은 수려한 절벽의 경관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동복댐 상류에 있는 노루목 적벽과 물염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이 있다.
* 노루목 적벽은 동복댐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 수려한 자연경관과 웅장함,
그리고 위락 공간으로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중이던 명유(名儒)인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가
이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하며,
그뒤 많은 풍류(風流) 시인묵객들이 이곳에 들러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 물염적벽은 규모나 풍치면에서 노루목 적벽에 미치지 못하지만
건너편 언덕 위에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이 있어 위락공간으로 이름이 높다.
* 보산적벽은 노루목에서 서쪽으로 약 600m 거리에 있는 보산리의
북쪽 계류가에 형성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으나 수량이 풍부하였다.
* 창랑적벽은 창랑리에 있는데, 높이 약 40m에 길이가 100m 가량 이어진
절벽군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 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적벽은 동복댐 보호구역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1996년 12월에 개설된 임로(林路)로 한결 쉽게 찾을 수 있다.
적벽 앞에는 망미정, 보안사지 석탑, 망향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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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을 위해 애쓰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귀한 사진 자료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미한 점 있더라도 어여삐 보아 주십시오.
기행을 다녀와 정리하다보면 얻는 게 참 많습니다.
이렇듯 수려한 경관이 가까이에 있었음에 감사하고,
자료를 찾으며 공부가 되고 또한 다시 되새기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지요.
전라도 닷컴에 들리셔서 심문화재위원의 맛깔나는 글들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44편이 올려져 있더군요. 고장에 대한 정이 유난함이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제 고장 함평에도 그런 분이 계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니 광주에도.
지루하셨지요?
그간 못한 숙제를 다했습니다.
기행일정을 정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군요.
뿌듯함까지 함께 선사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습니다.
문예창작반 동우회 여러분, 항상 건강하십시오.
11월 수업시간에 뵙겠습니다.
2007. 10. 25. 향원 드림.
첫댓글 아~~~ 문학기행 현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실감나는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꾸벅!
후기가 너무 멋있네요 자세한 설명 감사 드립니다.
문학기행 함께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교수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놓으시니 간접체험을 합니다.
문예창작 동우회원 여러분, 늘 평안하시고 건필하십시오.
이렇게 상세히 기행문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모가 불가능한 저로써는 큰 도움이 됩니다. 즐겁고 유익한 문학 기행이었슴을 다시 한번 회고합니다. 항상 밝고 맑은 미소로 문창반을 사랑해 주신 이상호교수님, 남점순교수님의 가르침 잘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선생님의 그 열정이 늘 부럽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항상 넉넉하게 아우르시는 그 따뜻한 마음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