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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익명의 천사>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 노인 시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소규모에다가 시골에 위치한 시설이었기에 후원자 찾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월말마다 운영자는 머리를 싸매야했습니다.
어느 월말이었습니다.
납부해야할 고지서, 지출해야 할 곳은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쥐꼬리만한 정부보조금은 금방 바닥이 나고,
빚이라도 내야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깜짝 놀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시설 통장에 당시로서는 ‘거금’에 해당되는 돈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익명으로 보냈기에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누가 보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급했던 시설 운영자는 답지한 익명의 후원금으로 우선 급한 불을 모두 껐습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는데,
운영의 어려움은 여전히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다시 월말이 다가와 이곳저곳에서 독촉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운영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통장을 확인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똑같은 액수의 후원금이 도착해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5년,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 익명의 천사는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그렇게 생명의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내왔습니다.
10년이 흐르자, 그 오랜 세월 동안 한결 같이 도와주신 그분이 어떤 분일까 사람들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고마웠기에, 어떻게 해서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완벽하게 추적을 따돌리는 익명의 천사 앞에 다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의 편법을 써서 그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답니다.
그 오랜 세월, 그 많은 후원금을 꼬박꼬박 보내주신 걸 봐서
재벌이나 큰 기업을 운영하시는 분이리라 생각했었는데, 큰 오산이었습니다.
구조가 건강하지만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이셨습니다.
어린 시절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분이었기에,
그리고 성장하기까지 고마운 분의 은혜를 많이 받은 분이었기에,
그 은혜를 익명의 자선으로 갚기로 결심하고 평생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너무나 고결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기에
시설 운영자는 이런 사실을 세상에 좀 알려야겠다, 이런 분 같으면 상을 받아도 큰 상을 한번 받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매스컴에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그 익명의 천사는 완고했습니다.
죽어도 취재는 안 된다는 신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부지기수로 기자들이 찾아갔었지만, 그 때마다 딱지를 맞았습니다.
작은 성취 하나라도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앞에서 드러낼까 기를 쓰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익명의 천사,
그분은 진정 하느님의 천사이십니다.
그분은 복음의 정수를 실천하고 계시는 분,
참 신앙인이십니다.
그분은 열심히 하느님 나라에 보화를 쌓고 계시는 분,
그래서 언젠가 영광스럽게 불멸의 상급을 받으실 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분이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저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가정 방문 판매업계의 전설적인 세일즈맨이 있었습니다.
후배 세일즈맨들이 이 전설적인 인물에게 그 성공 비결을 물었습니다.
“선배님, 저희는 아무리 돌아다녀도 사람들은 전혀 살 생각을 보이지 않습니다.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인데,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성공적으로 물건을 파실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전설적인 세일즈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별다른 비결은 없어요.
그냥 초인종을 눌렀을 때 문 열고 나와 보는 사람이 아주머니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이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아가씨, 어머니 계세요?”
전설적인 세일즈맨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구매자, 특별히 아주머니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즉, 아가씨라고 말해서 젊어 보인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긴 저 역시도 ‘아저씨, 아버님’라는 말보다는 ‘총각’이라는 말이 더 좋은 것을 보면,
남들에게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만, 긍정적인 말만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을 듣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할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선행을 베푸는 척을 하고,
남들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하기 싫은 행동도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할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을 주님께서는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우리들의 모습보다는 우리들의 내면을 더욱 더 잘 보시는 주님께서는
어둡고 더러운 위선적인 우리들의 마음을 분명히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와 기도할 때, 그리고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
오히려 사람들이 모르게 자선을 베풀고,
기도는 남들이 볼 수 없도록 골방에 들어가서 할 것이며,
단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숨은 일을 모두 아시는 분이시고,
그 숨은 일들을 기쁘게 보시고 모두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고참들이 장난삼아 이런 말을 합니다.
“너 누구랑 오래 사냐?”
자기랑 더 오래 군 생활을 하니, 자기에게 잘 보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을 떠올리며, 이 세상 삶과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비교해봅니다.
사실 이 세상의 삶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길어야 100년이겠지요.
하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어떨까요?
영원한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더 잘 보여야 할까요?
당연히 이제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하느님께 인정받는 데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지요?
- 인천교구 간석4동 본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위선자의 영혼>
프랑스 작가 알퐁소 도데는 그의 책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책에서
신앙인의 위선이란 어떤 것인지 정곡을 짚어 보여줍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으로
다른 수도원처럼 종을 살 돈이 없어 나무로 된 딱따기를 사용하여 기도시간을 알릴 정도였습니다.
보통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데
이 수도원은 가난한데다 마지막 남은 재정까지 바닥나서
이젠 끼니를 잇기도 힘들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에 젖소를 돌보는 일을 맡았던 고셰 신부는
불로장생주를 만들어 재정난을 해결하자고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술들이 대부분 수도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주조 기술을
육 개월 동안의 노력으로 되살려내고 불로장생주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그 술은 불티나게 팔렸고 수도원은 재정의 회복을 넘어서서 돈방석에 앉게 됩니다.
고셰 수사는 그 덕으로 사제 서품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매일 술맛을 보느라 어느새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비틀거리며 흥청거리는 수사를 본 신부들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며 그를 내쫓았습니다.
어느 날 고셰 수사가 미사 중에 또 술주정을 하게 되었고
정말로 귀신들렸다고 여겨져서 감금되게 되었고
그날부터는 혼자 기도하며 술을 빚게 되었습니다.
고셰 수사가 이제는 자신의 영혼까지 걱정되어
수도원장에게 다시 예전처럼 젖소를 돌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원장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니 걱정할 것 없다. 술을 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니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를 빚으라. 주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그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순진한 고셰 수사는 원장의 말에 순종하여 계속 술을 빚었고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신부나 수도사들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 그것을 운반하느라
미사까지 거르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녁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는 고셰의 영혼을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자고 권고합니다.
그 때 술을 빚고 있는 고셰 수사의 슬픈 노래와 고함소리가 낡은 건물 저편에서 들려옵니다.
이때 신부들은 염려하며 말합니다.
“이를 어쩌나!
교구의 신자들이 저 소리를 들으면 큰일인데...”
수도원 전체를 한 사람으로 생각해 보세요.
겉은 멀쩡해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영혼인, 고셰 수사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렇게 겉과 속의 분열을 이루어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셰 수사가 다시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진실 되게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고쳐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은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행동으로 거짓이 없는 사람의 영혼은 살게 되고
위선자의 영혼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위선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선행을 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면서부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부터,
저절로 위선적이 되고 그렇게 영혼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칭찬받으려고 하고, 내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하면서부터,
즉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면서부터 위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선행은 숨기고 자신의 단점은 드러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심판하게 될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도 하느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위선자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시들게 하지 말고
주님께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집시다.
<짧은 묵상>
논문을 쓰다보면 가장 힘들 때가 교수님과 생각이 맞지 않을 때입니다.
아무리 나의 확신이 옳다고 생각해도
지도교수와 의견이 다르면 괜히 더 나쁜 감정 생기지 않도록 내 의견을 잠시 접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의 신학을 가장 잘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에게까지 온전히는 이해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누가 거짓말이라도 다 이해해주는 것처럼 말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주위에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이해받을 수는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가족도 친구도 나를 어느 정도까지만 이해해 줄 수 있지
완전히 알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 마음을 몰라준다고 섭섭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자녀를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판 받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물론 나를 이해해 줄 유일한 사람이라 믿었던 이에게 비판 받으면 살아갈 힘마저 잃게 됩니다.
등록금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선생님에게 심하게 모욕을 당한 한 아이가 연쇄 살인범이 되기도 하였고,
또 미국으로 이민 온 한 아이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였습니다.
이해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큰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관계 맺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받지 못하면
사람의 행동도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다행히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까지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까지 다 아시고 이해해 주시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며,
기도를 하던, 자선을 하던, 단식을 하던
오로지 ‘숨은 비밀까지도 다 아시는 아버지께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이해받고 싶어 하면서
서서히 유일하게 우리를 이해해 주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며
세상에 무인도처럼 동떨어져 혼자 남게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단 둘이 나누는 대화 시간,
즉 기도 시간은 꼭 가져야 합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주님과 대화를 나눕시다.
그러면 세상 누구에게서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던 예수님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나가셨던 그 분처럼,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 로마 유학중
오늘 복음은 기도하기엔 비교적 수월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천에 널려 있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이고 겉발린 행태들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더듬어 보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의 기도가 모자랄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시장구경하듯 이런 저런 위선적인 모습을 보고만 있어서는
영양가 있는 기도를 통한 위로와 힘을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때문에 좀 더 깊이 있는 묵상을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자신을 포함한 인간 일반의 깊은 본성에 대한 이해를 얻어야 하는 것이 이 때문이며,
오늘 기도의 요체가 되는 곳도 이곳입니다.
왜 우리 인간은 그토록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촉구됩니다.
왜 그토록 나팔을 불어대길 좋아하고,
과장된 포장을 즐겨하고,
카메라 플래시의 조명을 받으려고 기꺼이 목을 빼는가.
참으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청됩니다.
서글플 정도의 천박한 인간 내면의 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역시 단순히 어둡고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통합적 시각이 요청됩니다.
어떻게 그 통합을 제대로 알아들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한 차원 끌어올릴 것인가는
기도하는 이 각자의 몫입니다.
나아가 이 기도를 통해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이 뿜어내는 향과 아름다움에 대한 목마름을 잔뜩 길어올리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겠습니다.
천박하고 추한 것을 대하면서 품게 되는 역겨움을 통해,
진정 향기롭고 고졸 (古拙) 한 자태에 대한 흠모와 열정이 솟구쳐 오른다면
이 역시 이 기도를 통해 얻는 은총이 될 것입니다.
- 예수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나팔을 불지 마라/ ...해서는 안 된다/
...빈 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표정을 짓지 마라." 는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반면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나온다.
즉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해야 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이런 구분을 지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과연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부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아니면 긍정적인 모습이 많은가?
우리는 비교적 "... 하지 마라"는 것은 하고,
반대로 "..하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각자 "..하지 마라."는 것 중에 내가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 하라"고 한 것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가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고 싶어하고,
내가 하는 선행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예뻐 보이려고 화장도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화려한 경력이나 학력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들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잘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은 늘 경쟁의 대상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려고 하니까 늘 다른 사람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질투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급기야는 원수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요구하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도 말고,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금식할 때에는 애처로운 표정을 짓지도 말고
오히려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고 까지 말씀하신다.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떤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는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을 만큼
모든 것에서 초월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무렇게 살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삶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원칙은 분명하다.
즉 아버지를 닮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할 것이고
아버지를 닮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할 것이다.
반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것은 취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자신을 섬기는 자세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남들한테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모든 관심은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 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다.
이런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마음이 허전하고
그래서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한테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바쁘다.
그리고 여기 저기 쫓아다녀야 하고 좋은 것을 입어야 하고 항상 최고의 것을 지향한다.
그래야 남한테 칭찬받고 의롭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힘이 분산되고 산만하다.
안정되지 못하고 늘 쫓기며 불안해 한다.
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가기 때문에
조용하면서도 모든 힘을 한 곳으로 모은다.
따라서 시간 낭비가 없고 힘이 분산되지 않으며 한 곳에 투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과는 소원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투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하느님한테서 힘을 받고,
그 힘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발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한테 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한다.
사람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고
두 번째는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이 세 가지 관계는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져야
다른 관계도 원만하게 이루어 지고 삶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하고 해야 할 것은 최선을 다할 때
완덕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한발작 더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 전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진실과 겸손>
얼마 전 행사에 참여했다가 돌아오던 중 문득,
사람들의 얼굴이 가면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세련되고 부드럽고 우아하고 편안한 얼굴들이었지만
피상적인 대화가 왠지 공허했고 언뜻 사람의 얼굴들이 가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참 얼굴들을 보기 어려운 시절입니다.
사람들에게 좋게 보여야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기 위해
본의 아니게 가면을 쓸 수뿐이 없는 세상 같습니다.
허영과 위선의 가면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진실과 겸손이지만
멀어질수록 위선과 허영, 교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진면목은 진실과 겸손입니다.
온갖 먹을거리를 키워내는 흙을 보면
참 고맙고 저절로 ‘진실하다’ ‘정직하다’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재미있는 게 ‘흙’과 ‘사람’과 ‘겸손’의 관계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흙을 빚어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라틴어를 봐도 '사람(homo)'과 '겸손(humilitas)'은 흙(humus)'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흙같이 겸손하여 사람이요
흙 같은 겸손이 최고의 덕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흙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
흙을 닮아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할 수뿐이 없습니다.
이래서 기도하고 일하라는 우리 분도회의 수도가훈이 참 고맙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기도하며 몸으로 일하기에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우리 수도승들이요,
사실 이런 삶에는 거짓이나 위선, 허영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 나체의 몸 역시 참 진실하고 정직해 보입니다.
어제는 문득 샤워하는 중, 몸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평생을 온갖 시련을 겪어내며 정직하고 진실하게 견뎌낸 몸입니다.
큰 체구 같아도 작고 가난한 몸들이며,
희노애락(喜怒哀樂)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하고 약한 몸입니다.
하여 몸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에,
몸이 있어야 일도 하고 기도도 하고 사랑도 하기에
‘사람은 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예전 목욕탕에서 사람들과 나체의 몸들로 함께했을 때의 편안함도 생각납니다.
이런 말 그대로의 편안함은
모두가 가리지 않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몸으로 들어냈을 때의 평등감과 더불어
같은 몸을 지닌 인간이라는 동질감 때문일 것입니다.
옛 사막 수도승의 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가서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어라.”
몸처럼 진질하고 정직하라는 뜻이 함축된 말로
구원은 바로 몸 가까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참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흙과 몸입니다.
몸을 가리고 머리를 기르면서 거짓과 위선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의상이 날개라 옷에 따라 느낌도 다르고,
머리 스타일에 따라 사람의 인상도 달라집니다.
요즘 유행하는 성형수술 또한 일종의 가면과도 같습니다.
내적으로 빈곤할수록 가면을 쓰게 되고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기 마련입니다.
거의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늘 수도복에 삭발을 즐기는 수도승들,
허영이 거짓이 위선이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흙과 몸처럼 마음도 정직하고 진실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진실과 정직, 겸손이지만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위선과 허영, 교만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모든 행위들,
그대로 가면을 쓴 위선적 허영의 행위들이요
주님은 이런 위선자들을 질타하시며
제자들만이라도 진실하고 겸손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비단 자선, 기도, 단식의 수행에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전 영적 삶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거짓과 허영, 위선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이요,
진정 내적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참 부자들입니다.
사람들을 향할수록 갖가지 거짓과 허영, 위선의 가면들이지만
하느님을 향할수록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참 나의 얼굴입니다.
과연 가면을 쓰지 않고 참 나의 얼굴로 사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오늘 예언자 엘리야,
참 제 얼굴을 지닌 진실하고 겸손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늘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느님만을 들어냈지 자신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참 사제지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리를 미련 없이 제자 엘리사에게 물려준 엘리야의 겸손했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다음 대목이 겸손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생생한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
하느님은 평생 순종과 겸손의 삶을 살았던 예언자 엘리야에게
승천으로 보답하셨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우리의 모든 가면을 벗겨 주시고
당신을 닮아 진실하고 겸손한 당신의 사람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라.
마음을 굳게 가져라.”
(시편 31,25)
아멘.
- 성베네딕토수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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