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부는 하모니카
안영식
'고속버스 차창 넘어 외로운 소녀 울고 있네
가지 말라고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네,'
마음이 울적하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나는 하모니카를 분다.
하모니커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음색이 참 좋다.
길게 내 불 때는 모든 서러움도 함께 불어버린다,
또 내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모니카밖에 없기도 한 까닭이다.
하모니카를 처음 접한 것이 내 나이 열여덟, 아홉 살 시절이지 싶다. 친구들이 얼룩무늬 교련복을 입고,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부는 모습이 너무나 멋지고 부러웠다.
그러나 나는 교복도 입어보지 못하고 하모니카도 불지 못했다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아버지는 하모니카를 불거나 기타 소리가 들리면 금방 집안이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절대 금기시켰고 너무나 야단을 치시고 호통을 쳐서 아예 우리 집에는 친구들이 놀러 오지도 않을 뿐더러 나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기타나 하모니카를 집에 가져오지도 못했다.
그러나 못하게 하면 할수록 더 해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던가?
저녁이면 친구들이 동네 작은 간이역의 벤치나 개울가 다리 밑에 모여서 기타를 치고 하모니카를 불면서 청춘에 불을 지폈다.
나는 악기가 없어 항상 노래만 하는 가수였다.
어느 날 친구들 중에 누군가가 새로운 기타를 사 와서 헌 기타를 나에게 주었다.
아버지 몰래 내 방에다 숨겨놓고 기타 줄을 갈아 끼우고, 도, 레, 미, 파, 하고 조율을 하다가 아버지한테 들켜서 그날로 기타는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부피도 작고 감추기 좋은 값싼 하모니커를 샀다.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고, 내 불고 들이마시면서 음을 익히기 시작했다,
특히 땔나무 하러 산에 갈 때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다가 가면서 불고 오면서 불고 맞지도 않는 음을 맞추려고 머릿속이 휭 하도록 불고 다녔다.
흐르는 물을 섣불리 막으면 둑이 터진다고 했던가?
남들처럼 학교에도 다니고 싶었고 음악도 해보고 싶었다.
심지어 친구들이 운전학원 다닐 때 그것도 얼마나 다니고 싶었던가?
학교는 고사하고 운전학원도 못 가게 하고 농사일 하기만을 강요하는 아버님이 미웠다.
열 아홉 살이 넘어가면서 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다.
술을 먹는 횃수가 늘어났고 술의 힘을 빌려 아버지한테 반항도 했고 그런 날은 집을 뛰쳐나와서 누군가와는 싸우고 피를 봐야 했다.
소백산을 찾아오는 행락객들을 괴롭혔고 술과 담배를 빼앗아 피우기도 했다 .
파출소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논밭을 팔아서 합의금이나 치료비로 살림을 축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기타치고 하모니카 불면서 같이 놀던 친구들도 나를 경계하고 놀아주지 않는다.
몇년의 세월을 부랑아로 보냈다. 많은 친구가 군대에 갔지만
나는 학력미달로 군대에 가지 못했다.
어느 날 또 한 번의 사고를 치고 큰집이라고 불리는 교도소를 가게 되었다.
나를 오빠라고 불러주던 소녀가 있었다.
교도소를 출소하던 날 밤, 집에도 가지 않고 또다시 소주 한 병을 들고 동네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울가에 앉았다
언제 왔는지 소녀는 나에게 다가와서 "옛날처럼 착하게 살 수 없느냐"고 울면서 애원한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감정이었다.
처음 본 소녀의 눈물이었다.
그래 너와 함께라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어!
"가자!"
"나를 모르는 곳으로 어디든 가자!"
밤새워 개울가에서 소녀와 새로운 희망을 키웠다
밤에는 열차가 서지 않았다.
열차가 있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어찌 됐을까?
새벽길을 걸어서 십 리도 넘는 곳에 있는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내 수중에는 돈이 없다.
그녀에게 얼마의 여비 정도의 돈이 있다고 했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화장실 다녀온 사이 소녀가 사라졌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제과점에 소녀의 엄마, 오빠와 형부 언니가 소녀를 못 가게 붙잡고 있었다.
애원도 해 보았다.
매달려도 보았다,
그러나 절대로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이 소녀와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집에는 가기 싫다.
소녀는 집으로 잡혀갔다
나는 갈 곳이 없다.
기차역으로 향했다.
전에도 몇 번 해 봤던 무임승차를 하고 서울로 향했다.
돈 한푼 없이 상경한, 노숙자보다 못한 심정을 누가 알랴
교도소 주먹밥을 마지막으로 하루를 굶고 청량리 역전에서 구걸한 몇 닢의 동전으로 우리 동네 도로확장 공사 때 같이 일하던 착암공, 조기사님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그날, 충주에서 문경새재 넘어가는 도로공사를 가야 하는데 잘됐다고 같이 가자 했다.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그때부터 착암기로 돌에 구멍을 뚫어 다이너마이트로 돌을 부수는 착암공이 되어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발파장에서, 쿵! 쿵!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흙먼지 속에서 돌이 날아다닌다.
몇 번의 사고를 눈으로 봤다.
젊은 생을 그렇게 마감하기는 싫다.
새로운 직업이 필요했다.
공사장에서 만난 불도저 기사님이 나를 조수로 받아주어 불도저를 배우게 되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면허시험 문제집으로 공부하여
몇 달 만에 불도저 면허증을 받았다.
같은 회사에 3~4년 조수 생활을 한 사람들 모두 시험에 떨어지고 나만 붙었다.
이제는 떳떳한 기술자다.
그해 아버님을 찾아가서 지난날의 용서를 빌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얼마의 돈을 드렸다.
그 돈으로 개울 건너 대지가 넓은 다른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소녀가 궁금하다.
소식을 물어보니 부산에 사는 오빠가 데려 갔다 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그녀는 남의 집 아내가 되어 있었다.
잊어야만 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일정한 주소도 없이 소식 없이 몇 년을 보냈으니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녀는 아마 배신당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쓰던 중고굴착기들이 들어오면서 굴착기 기사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굴착기를 하기로 마음먹고 굴착기 시험에 도전했다.
굴착기 면허 시험도 단 한 번에 합격했다.
그 시절에는 1년에 두 번 시험을 칠 때였기에 한번 떨어지면 6개월을 기다려야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시험을 치기 전에 예상문제집으로 80점 이상이 나올 때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사우디, 중동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중장비 학원들이 많이 생겨나서 면허시험 합격자 대부분 학원생들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커 가고 살림살이가 낳아졌다.
굴착기도 이제는 내 사업이다 남들처럼 나도 자가용이 필요했다.
운전 면허 학원에 갈 시간이 없다.
문제집을 사다가 읽고 또 읽었다.
필기시험 치던 날 내가 제일 높은 점수를 맞아서 수험생들에게 박수를 받는 영광을 얻었다.
면허증 모두를 학원을 가지 않고 땄다.
아마도 내 팔자에는 학교나 학원에 다닐 운이 없나 보다.
일하는 틈틈이 시집과 수필집을 읽어 오다가 나도 한번 시와 수필을 써 보고 싶어 도전했다.
제16회 영남 문학 시조부문 등단
제40회 지필 문학 시 부문 신인상
창간 10주년 특별기흭 사람과 환경 문학인 협회 등단작가 특별상
제52회 지필 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이 모든 것이 학원이나 남에게 단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하고 독학으로 이루었다.
단 한 번의 낙방도 없었다.
특히 인생대학, 여성시대에 몇 번의 편지 사연이 소개되어 수필을 쓰는데 용기를 주었다.
어느 날, 하모니카를 부는데 같은 방에 있던 장비기사님이 하모니카를 왜 반대로 돌려 부느냐고 한다.
그 때 까지도 나는 어느 쪽이 고음이고 저음인지도 모르고 혼자 음을 터득하고 불었다.
돌려 불어도 아름다운 음이 나오는 하모니카 처럼, 이제 거꾸로 읽어도 멋진 시집과 수필집을 내고 싶다.
2015.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