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14 - 후시미 이나리 신사를 보고 우지시에 도착해 우지 공원을 구경하다!
간사이 여행 사흘째인 2024년 9월 20일 교토 시내에서 니조성을 보고 니시키시장에 도착해
시장을 구경한후 시장 골목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는.... 렌터카를 타고 교토 남부
후시미에 도착해 주차한후 후시미 이나리 진자 (伏見稲荷神社 도하신사) 신사를 구경합니다.
오늘날 일본에는 12만개의 신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신사가 바로 여우상과
붉은색 도리이 鳥居(조거) 가 상징인 3만 2천개의 이나리 신사인데 총본산은 바로 교토 후시미
이나리대사 伏見稻荷大社 로.... 827년에 '정일위 이나리다이묘진 正一位稻荷大明神' 이 되었다나요?
이나리 는 '벼의 생장' 을 뜻하는 말로 여우는 일본 민간에서 신의 사자 로 간주되었는데
여우와 동일시 되기도 하는 이나리신 은 근세 이후 상공민의 신 으로 널리 받아들여
졌으니그 기본은 도작 농경민의 신 으로서 흔히 일본인의 민족성에 딱 들어맞는 신 입니다.
이제 교토를 떠나 우지시를 거쳐 오사카로 가야 할 시간인데 옛 건물들을 보노라니....
문득 제2차 세계대전때 교토는 외곽에 군수공장이 많았던지라 원자폭탄 투하지
제 1순위였다고 하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비켜갔으니 교토에서 옛 건축물들을 봅니다.
1945년 8월 6일 사이판 인근 티니안에서 0시 30분에 이륙한 원자폭탄을 실은
에놀라 게이호는 먼저 출발한 정찰기들로 부터 기상 정보를 수집합니다.
그러니까 원자폭탄을 실은 비행기보다 먼저 출발해서는 무려 7시간을 비행하여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모지코) 로 향한 3대의 비행기로 부터...... 해당 도시의
당일 아침의 기상상태를 보고받은 결과 날씨가 가장 좋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 합니다.
이때 이후 히로시마에 거주하던 사람 20만명 가까이 죽었는데, 그중에 3만명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원폭 투하는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남의 일이 아닌 것 이지요?
그 사흘 후에 고쿠라를 향해 출격한 B29 폭격기는 기상 상태와 연료 문제로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 되었으므로 고쿠라(모지코) 는 기상이 안좋았던
탓에 무사했는데.... 다음 후보지는 교토와 니가타, 요코하마이니 이들도 운이 좋았나요?
도쿄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왕(천황) 이 죽으면 이후 일본인들이 결사항전할 것이
염려되어 원폭 투하지에서 먼저 제외했는데..... 군수산업의 요충지이자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제 1 순위 였던 교토가 제외된 것은 무슨 이유 일까요?
미국 전쟁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이 교토 투하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으니..... "일본의 정신적 수도를
파괴하면 전후 민심 수습에 어려움을 겪을 것" 이라는 주장이었는데, 2차 대전후 미국과 소련
의 대결이 예상되던 차에, 교토가 피격되면 일본 국민들이 소련편에 붙을까 염려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스팀슨 장관은 개인적으로는 1920년대 필리핀 총독 시절에 수차례 교토를
방문했으니 "역사와 문화의 도시 교토의 향기" 에 취했다고 하며...... 또
다른 참모부 장성은 과거 신혼여행을 교토로 간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토시에 대한 재래식 공습에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소이탄
폭격은 수시로 허가했으니..... 재래식 공습으로 오랜 역사 문화유산을
제외한 교토 일반 시가지와 공장, 이화학연구소 등의 여러 제반시설은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대도시에 비해 일본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는 폭격 강도가 약했던 건 사실이고 이러한 이유로
전후 새롭게 태어난 다른 도시들과 다르게 교토는 전근대 시기의 풍경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로시마 원폭 3만명 사망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선인도 참전했었나? 의아한 사람도 있겠으나
스스로 "천황폐하의 황군" 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나 만주 군관학교에 스스로 지원한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10만명이 넘는 조선인(한국인) 들이 일본군 군복을 입고 일본군으로 미군과 그
연합군인 중국군, 팔로군, 영국군, 호주군, 인도군 및 소련군과 싸웠으니..... 500명에 불과한
광복군은 그 세력이 너무나도 미약한지라 일본군과 단 한차례도 전투를 하지 못한 것과는 비교됩니다.
일본군 출신은 대한민국 초대 참모총장 부터 21대 까지 이응준, 채병덕, 정일권, 백선엽, 장도영 등 18명
(중임3명) 전원에다가 국방부장관 유재흥 등과 육군 대장 박정희 등 그 수는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광복군 출신은 그 숫자가 500명에 불과한데다가 그 일부는 중국의 사관학교를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은 정규 육사 교육을 받지 못한데다가 일본군과 단 한차례도 전투를 치르지 못했으니
실전 경험이 없는지라 21대 까지 육군 참모총장 전원이 일본군 출신이고 광복군 출신은 전무한 것이지요?
1920년대에 태어난 조선 젊은이들은 자라면서 일본의 통치를 받았으니, 자진해서 일본군 육사나
일제의 만주 군관학교에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입대했던 사람들 말고도... 그외 본인의 의사
와는 반대로 학도병 이나 징병에 군무원, 정신대 및 노동자 로 끌려갔던 사람들도 부지기수 입니다.
속국이나 식민지가 되면 종주국의 용병 노릇을 안할 수가 없으니 고려는 몽골의 지배하에서 2차례에 걸쳐
일본 침공에 앞잡이가 되었으니 쌀등 식량을 대고 말을 길러 바치며 900척 전선을 건조한후
고려인 선원이 배를 몰고 또 고려군이 몽골군에 앞장서서 일본군에 돌격해 화살받이가 되어 죽어갔습니다.
옛날 페르시아나 로마도 속국의 사람들을 병사로 동원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국은 1차 대전에서
50만명의 인도인들을 군인으로 징집해 이라크로 진격시켜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게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전쟁에서 이기면 인도를 독립시켜 주겠다는 약속은.... 전후에 영국은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요르단을 추가로 식민지로 삼았으며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차지합니다.
일본은 1900년 의화단때 베이징을 점령한 서양 8개국 일원이었고, 1905년 러일전쟁때 영국과 동맹이었으며
1914년 1차대전때 영국, 미국과 연합군이었고.... 1918년 볼세비키 혁명 저지를 위한 시베리아 출병 때도
미군과 연합군이었으니, 2차대전때 미국 요구대로 중국에서 철수했으면 5번째도 같은편으로 승전국 입니다!
그럼 2차대전 후에 한국이 미국과 같은 편인 일본에서 자력으로 독립하자면 인구 2천만의 알제리가 1954년
부터 8년간 150만명이 죽고서야 독립한 전철을 밟았을 것인데.... 아마 한반도는 피로 물들었을 것이라?
한국인에게는 일본 강경파가 온건파에 승리해 미국과 전쟁을 벌인게 결과적으로 너무나도 다행스럽습니다!
인도인들은 1차대전에서 수만명이 죽었는데도 독립을 하지 못했는데, 2차대전에서 일본군이 싱가폴
을 함락했을 때 포로로 잡은 영국군 가운데 인도인 병사는 무려 8만명이었으며 그후 일본군이
인도로 침공할 때도..... 인도인 병사들은 앞장서 버마 전선에 투입돼 영국군의 용병 노릇을 했습니다.
조선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 희생자 외에도 태국과 말레이, 인네등지에서 영국군과
네델란드군등 포로 감시원으로 있으면서 포로에 대한 가혹 행위로 인해 전후 현지에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전범으로 사형등 처벌 받은 조선인도 백수십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것은 아니고 보급이 뒤따라야 하니 조선인들은 강제로 쌀과
콩을 공출해 일본군 군량을 댔고 탄광에 끌려가 석탄과 철광석을 캐고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며 그외 여자들은 정신대로 재봉틀을 돌려 군복과 탄창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강제 동원된 조선 노무자들은 남태평양에서 곡괭이와 삽으로 피땀 흘려 활주로를
건설했으니 여기서 출격한 일본 제로 전투기들은 미군 함정을 공격해 폭격
으로 침몰시켰으니..... 본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투 수행에 이바지한 셈 입니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생ㄱ가을 떨쳐버리고는 다시 차를 타고 우지시에 도착했는데 여기 우지강에는
긴 섬인 타치바나 섬(Tachibana-shima) 과 좀 짧은 섬인 토노섬 (Tono-shima) 이 있습니다.
차를 주차한후 다리를 건너 토노섬 (Tono-shima) 으로 들어가니 여기 조성된게 우지공원으로 봄에는 사쿠라
마츠리가 열리고, 여름에는 하나비 타이카이, 가을에는 우지 덴라쿠 마츠리, 차 마츠리 등이 열립답니다.
붉은 다리를 건너 4.3 헥타아르에 달한다는 섬인 우지공원(宇治公園) 은 휴식하기 좋은 곳인데....
다리 아래에는 우지강 유람선 선착장이 보이니 주 고객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라고 합니다.
도노지마(塔の島)섬에 조성된 공원에 들어서니 먼저 보이는게 우키시마 십삼중석탑(浮島十三重塔)
이며 우지강 건너편으로 다리밑으로 흐르는 작은 폭포(?) 가 보이는데 여기가 명소인가 합니다.
그리고 공원에 강가에는 우리에서 날개짓을 하는 소리가 들려서 다가가 보니 십여마리의 야생 가마우지
가 보이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 낚시가 좋은 관광자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근에 옛날에 "우토로 마을" 이 있었으니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우지시의
군사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징용했던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 거주지 라고 합니다.
우토로 마을 (ウトロ地区) 은 6,000평 땅에 1,300여명의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비행장 건설에 투입되었는데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조선인 노동자들은 방치 됩니다.
생계수단을 빼앗긴 징용자중 일부는 배삯을 구하지 못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공터를 닦아 무허가
정착촌 을 이루고 살았는데 교토부 소유 우토로 마을은 일본이 패전하자 토지 소유권이 닛산 자동차
그룹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닛산자동차 그룹은 1987년 이곳을 부동산 회사인 서일본식산에 전매 합니다.
토지 매매 계약으로 조선인 징용자 및 가족들은 강제 퇴거를 강요받게 되자 1989년 일본의
양심세력을 중심으로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이 결성되고
우토로를 살리기 위한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이어 2004년에는 우리나라에도 알려지니....
한일 양국의 성금으로 3분지 1 정도 토지를 구매 했는데 2017년에 재개발로 마을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근의 안내도나 또 휴대폰으로 구글에 접속해 보아도 그런 마을이 보이지 않으니 그만 찾기를 단념합니다.
그러고는 오늘은 늦더위로 날씨가 너무 무더우니 한참 걸어서 가야하는 윤동주 시비는 우리 손주 3명에게는
너무 무리한 일이라 어쩔까 망설여지는데..... 공원에서 예전에 여기 우지에 왔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