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최유현 자수장
불교신문 기사 입력 : 2022.12.28. 18:04
기자명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12년만에 자수 팔상도 완성…꿈같은 바늘길 80년”
통도사 팔상도 친견 10년 기도
2m넘는 대작 여덟폭 원만회향
자수만의 독창성 완벽하게 구현
구순에도 옛 작품 복원작업 지속
올가을 덕수궁 현대에서 전시회
날마다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곱게 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유지한다. 부산 중수원에 찾아간 12월7일에도 최유현 자수장은 한치 흐트러짐도 없는 표정과 몸짓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내내 잊혀지지 않는 한마디. “수놓는 사람은 생각없이 놓으면 안됩니다.”
날마다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곱게 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유지한다. 부산 중수원에 찾아간 12월7일에도 최유현 자수장은 한치 흐트러짐도 없는 표정과 몸짓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내내 잊혀지지 않는 한마디. “수놓는 사람은 생각없이 놓으면 안됩니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정수는 불화(佛畵)에 있습니다. 품격 높은 불화를 자수로 수놓으면 비견할 데 없는 작품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예천 용문사에 훌륭한 만다라 작품이 있어요. 귀한 유산을 보존하고 후대에 계승한다는 의미로 한번 가보시면 어떨까요?” 1979년 태평양 건너 첫 미국 뉴욕전을 앞둔 최유현 자수장은 당시 예용해(1995년 작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의 제안을 두말없이 수용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민화 자수 작품으로 자수계에서 인정받았지만 민화에 머물러선 안되겠다는 생각, 더 높은 경지의 자수를 놓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자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염원을 담아내는가에 고민하며 바늘길을 이어나가야만 ‘장이’에 그치지 않고 비로소 작가 예술가의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구순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꼿꼿한 자세로 자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최유현(89) 자수장을 부산 중수원(부산대 한국전통복식연구소 부설 공방)에서 만났다. 자수와 벗한 80여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느라 평상시보다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마른기침이 나서 목을 축이는 일 외에는, 90이라는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했다. 섬세하고 분주한 손놀림과 무한한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성실한 노력을 요하는 자수는 작품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지 가늠조차 어렵다.
통도사 팔상도(보물 제1041호)의 자수 밑그림을 얻으려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10여년간 ‘눈 도둑질’을 한 결과, 무려 12년에 걸쳐 ‘자수 팔상도’를 완성했다. 가로 152㎝ 세로 236㎝에 이르는 대작 여덟 폭. 부처님의 출생과 출가, 수행, 깨달음과 열반 등 부처님의 일대기는 물론 불교가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와 해탈에 이르는 과정 일체를 담아냈다. 원본에 담긴 회화의 경지와는 완전히 다른 자수만의 독특한 아름다움과 독창성을 제대로 표현해 냈다는 평가다.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으로 인정된 이후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쏟아 부어 완성해낸 예술혼의 결실이다.
바늘 끝에 온 신경을 모아 한 땀 한 땀 수놓았을 작가의 헌신적 노력이 눈에 선하다. ‘자수 팔상도’는 완숙기에 이른 완벽에 가까운 솜씨와 의지가 탄생시킨 한 편의 드라마이자 최유현 자수장의 인생 역작이다. “직접 염색한 천연수실을 사용하고 팔상도를 완성해 나가는 전 과정에서 열정과 예술혼을 쏟아부었습니다. 자연과 인물군상의 생동감 사실감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숭고하고 장엄한 정신의 가치까지 표현했습니다.”
최유현 불화자수가 더욱 값진 이유는 그림 그대로 수를 놓지 않고 창의적인 감각으로 자신만의 구도와 구성을 새롭게 디자인했다는 데 있다. 그는 “그림 그대로 베껴 쓰는 대신 색이나 디테일을 섬세하게 복원하고 배경이나 요소도 주제에 맞게 디자인해서 최대한 자수 작품으로서 독자성과 완성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77세인 2012년에 시작해 2년만에 완성한 ‘치성광여래도’는 최유현 불화 자수에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손꼽힌다. “통도사 비로암 북극전에 봉안되어 있는 치성광여래도 모본으로 수를 놓았습니다. 원 그림 그대로 본을 삼아서 자수를 놓기에는 구성의 완성도나 섬세한 부위별 표현에 있어 미흡한 부분이 있었지요. 모본을 보완하고 새롭게 도안을 추가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실제 작품의 네 모서리는 물론, 중앙에 자리한 치성광여래를 감싸고 있는 영롱한 구름의 자태와 빛깔 등 세부적인 구성이나 표현에 있어서 새롭게 보완되고 추가된 요소가 적지 않다. 모본의 한계에 제약받지 않고 완숙한 기량과 뛰어난 감각으로 작품 자체의 수준을 끌어올린 창의적 시도는 오직 최유현 자수장만이 가능한 예술영역이라 할 만하다,
앞서 최 자수장은 1984년 제9회 전승공예대전에서 ‘지장보살도’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이듬해 제10회 전승공예대전에서는 ‘나무대성인로왕보살번’으로 문화재위원상을 수상한데 이어 1988년 제13회 전통공예대전에서 ‘연화장세계도(270㎝×300㎝, 만다라)’로 대통령상을 거머쥐면서 ‘전통공예 자수계’ 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연화장세계’는 예용해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귀띔해준 예천 용문사의 만다라다.
전통자수의 대가 최유현 자수장은 10대 소녀시절 학교에서 배운 규방공예로 자수의 길에 첫발을 들였다. 바늘과 실로 새와 바위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마냥 신기했고, 성실과 노력의 예술에 마음이 이끌렸다. 20대에는 수예교사로 교단에 섰고, 이어 부산 광복동에 ‘최유현 수예학원’을 차려 승승장구했다. 지금 부산 서면의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가 당시 부산시청이었는데, 시청 앞에 부산서 유일한 시립문화원이 있었고, 거기서 ‘최유현 종합 수예 전시회’를 열어 판매율 90%에 육박하는 완판신화를 달성했다. 수예학원은 3교대로 돌아갈 정도로 수강생이 넘쳐났고, 우리 전통 공예품을 판매하는 ‘부산민예사’까지 문을 열었다. 1967년 독일 뤼브케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했을 때는 국가 원수급 국빈이 최초로 부산에 방문한 만큼 관에서 국빈선물용으로 자수작품을 요청하기도 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이라 했던가. 1970년 크리스마스날 전국을 들썩이게 한 광복동 화재로 가게는 화마에 휩쓸려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잿더미로 변했다. 손실도 컸지만 재건도 빨랐다. 1972년 재개장한 신라민예사는 또다시 정상궤도에 올랐다.
최유현 자수장은 70대에 들어서 한국 자수의 새로운 내일을 열어나갈 후학양성에 더욱 공력을 기울였다. 2013년까지 4년간 부산대 한국전통복식연구소 객원교수직을 역임하고 이후 석좌교수로 한국 자수의 전통과 기법을 전수하는 소임을 다했다. “한평생 자수인으로 살아왔으니 특별히 내세울 학벌이 없는데도 부산대에서 10년간 교수로 재직했으니 큰 영예가 아닐 수 없어요. 한국 자수의 명맥을 잇고 기량을 전수하는데 있어서 제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순의 자수장은 “이젠 나이 들어 예전처럼 할 수가 없어요. 눈도 허락도 안하고…”라고 하면서도, “죽었다 깨어나도 글쎄요 이렇게 기나긴 시간을 요하고 표현이 어려운 작가는 되기 싫어요”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손에서 바늘을 놓지 않는다.
“자수는 글이나 말로는 그 본질을 알 수 없어요. 직접 몸으로, 수천, 수만번의 바느질로 부딪혀 보고 체득해야 본질을 알 수 있어요. 저는 스님 공양도 제대로 못하고, 부처님 가르침도 잘 따르지 못하지만, 부처님의 진리와 자수의 본질이 둘이 아니라고 봅니다. 한 땀 한 땀 그 본질에 다가서는 거지요.” 올가을 그녀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수작을 들고 나타난다.
부산=하정은 기자
작가 최유현 , 팔상도 八相圖, 1987-1997,
비단에 자수 작가 소장(국립무형 유산원 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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