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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크고,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난...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신기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좀 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 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8,11-13
선거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 바리사이의 선택, 신앙인의 선택!
저도 모르게 또 월요일 묵상을 했네요.
월요일 묵상은 다음 주부턴 꼭 쉴게요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그 세대를 두고 탄식하십니다.
왜 하느님을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 이유는 이미 표징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이시고 창조자이심을 보여주는데 이것만큼 큰 표징은 없습니다.
만약 아이가 “아빠, 우리 아빠 맞아? 맞으면 한 번 날아봐!”라고 한다면 황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아빠가 아빠이기를 믿기 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가를 시험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아빠는 필요없고 슈퍼맨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자신 안에 이 세상에서 아빠의 덕을 보며
능력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로보트 기요사키’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 유명한 사업가입니다.
그는 물론 가난한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그보다는 부자 친구의 아빠가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어렸을 때부터 돈 버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키워준 아빠보다 부자 아빠를 따른 것을 더 잘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마음 안에는 아빠의 따듯한 애정도 좋지만, 이 세상에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자신을 키워준 아빠도 사랑하겠지만, 책 내용만 보면 그는 아빠를 ‘능력’으로 평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를 키워준 가난한 공무원이었던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에게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 아이의 성공을 위해, 집값의 상승을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성취되면 하느님을 믿겠다고 한다면 하느님은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슈퍼맨’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없는 것을 볼 때는 가차 없이 버립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능력 있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하며 자신들이 부려먹을 힘 있는 황소와 같은 하느님을 바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섞인 ‘양식’만큼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을 표징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대인지 아닌지는 ‘선거’ 때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선거 때가 되면 후보자들은 각자 자신에게 어떠한 능력이 있는지 어필합니다.
이는 벌써 아버지와 같은 후보가 아닌 슈퍼맨과 같은 능력자를 원하고 있기에 우리 자체가 바리사이처럼 돈을 좋아하는 나라가 되었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지도자의 자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바로 ‘비전 – 통솔력 – 청렴함’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입니다.
지도자는 마치 배의 선장과 같은데 길을 볼 줄 모르면 큰 사고가 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단력 없는 선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세월호 사고 때 깊이 체험했습니다.
비전 없는 지도자를 따라가는 것은 지옥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8,11-13: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세차장에서 일하는 소년이 열심히 차를 닦으며 광을 내고 있었습니다. 차 주인이 나타나자, 소년은 “진짜 좋은 차를 타시네요. 선생님 차가 맞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차 주인은 “내 형이 선물로 내게 주었단다.”라고 대답하자, 소년은 혼잣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좋을까?”
차 주인은 이 아이가 차를 사주는 형이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저도 그런 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자기가 받지 못함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받으려고만 하면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욕심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줄 것에 집중하면 그런 마음은 금세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받으려고만 할 때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지만, 주려고 할 때는 스스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해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받는 것에만 집중하는 욕심의 마음을 통해서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주는 것에 집중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나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지금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것만을 요구했던 그들이 과연 예수님을 알아봤을까요? 놀라운 표징을 직접 보고, 주님의 놀라운 말씀을 가까이서 들었음에도 믿지 못합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만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받을 것만을 요구하다가는 나의 변화 대신에 욕심과 이기심만을 간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너무 오래 걸리니깐, 한 번 만에 잘 되려고 하지 말고. 가치 있는 일은 빨리 되는 게 아니니까 더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황가람).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4,15)
성사를 보고
고해실에서 나오는 이들의
이마에는
카인의 표지가 찍혀있다네.
날마다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표징만을 요구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죄로 인해
우리가 세상에서
앙갚음당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표징을
회개한 이들의 이마 위에
선명하게 찍어주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원천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에서 비롯됩니다.
이 감동은 하느님의 영을
자신 안에 지닐 때 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불타오르지 않으면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이 함께하고
영 안에서 말씀이 휘감길 때
감동도 있고 권위도 생깁니다.
이 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기쁘게 행동하게 하는
성령의 충동입니다.
사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선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교우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 하나가 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사제가 어떤 형태로든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표징을 드러내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며
그만큼 죽어있다는 반증입니다.
내적인 감동은 분명 성령의 선물이며
이 시대에 보여주시는 또 다른 표징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2.17.월."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 12)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표징을 요구하다
사라지는
은총의
순간들입니다.
못난 우리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표징을
먹고 자라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상이라는
현존 속에서
자라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심장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과 무례가
일상이라는
표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어린
반성과 감사가
표징을
만들어냅니다.
감사에서
더 깊어지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 하루가
새롭게
펼쳐집니다.
삶의 표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영원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표징의 완성은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과 일상을
벗어난 표징은
욕심이며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큰 표징은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함께하시는
일상이라는
표징이 보이고
자아가 무너지면
교만과 집착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으로
마음을 닦는
살아있는
감사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감사도
진정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