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월
초하루 계해일. 동이 틀 무렵 우왕이 숙비궁(淑妃宮)으로부터 노영수의 집에 갔다가 늦게 숙비궁으로 돌아와 신년하례의식을 거행하고 신하들의 조회를 받은 후 다시 노영수의 집으로 가서 묵었다.
○ 우왕이 숙비궁에서 병에 걸려 이틀 동안이나 나오지 못했다.
○ 우왕이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인유(姜仁裕)가 사위를 맞이한다는 말을 듣자 며칠 전에 그 집에 들이닥쳐 그의 딸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정비궁(定妃宮)에 두고 늦도록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바람에 결국 인일(人日) 하례 행사를 부득이 중지했다. 당시 딸을 둔 사람들은 왕에게 딸을 빼앗길까봐 겁을 낸 나머지 다들 혼례를 법식대로 치르지 않고 몰래 사위를 맞이하곤 했다. 호군(護軍) 송천우(宋千祐)가 지문하(知門下) 도길봉(都吉逢)의 딸을 처로 맞았는데 진작 왕에게 정조를 잃었다는 소문이 퍼졌으나 그 권세를 겁내 감히 쫓아내지 못했다.
○ 해도부원수(海道副元帥)인 전 개성윤(開城尹) 조언(曺彦)이 여주도(汝走島)에서 왜적을 공격해 배 한척을 나포하고 세 명을 사로잡자 우왕이 백금(白金) 50냥을 내려주었다.
○ 우왕이 정비궁(定妃宮)에서 강인유의 처에게 잔치를 베풀어주었는데 새벽이 되어서야 마쳤다.
○ 우왕이 최영을 데리고 회빈문(會賓門) 밖에서 사냥판을 벌이고는 최영에게 안장 딸린 말을 내려주었다.
○ 우왕이 강인유의 딸을 만나러 정비전(定妃殿)에 가서 늘 자고 오곤 했다.
○ 환관 김실이 처를 버리고 다시 사족(士族)의 딸과 혼인하려 하면서 혼례날 휴가를 청하자 우왕이, “여자를 나에게 보이고 난 뒤에 혼인하라.”고 말했다. 김실이 숙비(淑妃)에게 부탁해 간신히 왕의 허락을 얻어 혼인할 수 있었으나 왕이 늘 언짢게 생각하고 있다가 딴 일을 핑계로 그를 순군옥(巡軍獄)에 수감한 후 장차 죽이려 했다. 눈치를 챈 김실이 도주하자 대대적으로 수색하면서 그때 당직(當直)을 섰던 천호(千戶) 유극서(柳克恕)를 하옥시켰다.
○ 우왕이 강인유에게 안장 딸린 말을 내려주었다.
○ 안동원수(安東元帥) 황보림(皇甫琳)이 왜적 두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 왕이 격구장(擊毬場)에서 열병(閱兵)의식을 크게 거행했다.
○ 우왕이 순군(巡軍)에 들이닥쳐 유극서를 보고,
“네가 만일 김실을 다시 잡아들이지 못하면 그 놈의 죄를 내가 대신 져야한다.”
고 협박한 후 놀이도구를 꺼내 나가버렸다.
○ 우왕이 마암(馬巖)에서 무예 연습을 지켜보고는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다고 트집을 잡아 무예도감사(武藝都監使) 성중용(成仲庸)과 이빈(李斌)을 채찍으로 때렸다. 당시 모든 부대가 집결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전투 훈련을 하느라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 경상도 안렴사(按廉使) 이문화(李文和)가, 경상도 안에는 도적과 기근과 질병의 재난이 진작 사라졌다고 보고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왕에게 아첨하느라 거짓 보고를 올렸다고 비난했다.
○ 우왕이 마암에서 무예 훈련을 지켜보다가 직접 말을 몰며 활을 쏜 후 크게 취해 날이 저물어서야 정비궁(定妃宮)으로 돌아왔다.
○ 지신사(知申事) 염정수(廉廷秀)를 시켜 무예도감(武藝都監)에 술을 하사하게 한 후,
“얼마 전에 이빈과 성중용을 처벌한 것은 국가대사를 생각해 한 일이지 사적으로 화가 나서 한 일이 아니니 경들은 더욱 노력하라.”
고 달랬다.
○ 우왕이 사냥터로 가면서 궁녀 국화(菊花)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 2월
갑오일. 궁녀들이 송악(松嶽)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자 우왕이 직접 나가 마중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개를 향해 활을 쏘았다.
○ 왕안덕(王安德)을 양광도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했다.
병신일. 우왕이 왕흥(王興)의 집으로 가 그의 딸과 동침한 후 왕흥에게 말 두 필을 내려주었으며 그 후로는 항상 그 집에서 묵었다.
○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백호(百戶) 정여(程與)를 파견해 김득경이 자기네 군사를 살해한 이유를 질문했다.
경자일. 우왕이 밤에 마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양윤(漢陽尹) 장자온(張子溫)과 마주치자 그가 타고 있던 안장 딸린 말을 빼앗았다.
병오일. 우왕이 저잣거리로 나가 돌아다니다가 밤에는 정비(定妃)·근비(謹妃)·의비(懿妃)·숙비(淑妃) 등의 각 궁전에 들렀으며 마지막에는 왕흥의 집으로 갔다.
경술일. 우왕이 호곶(壺串)에서 사냥판을 벌인 후 밤에 돌아오다가 순군옥(巡軍獄)에 이르러 죄수에게 직접 칼을 씌웠다.
○ 왜적이 서해도 피곶(皮串 :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을 침구했다.
○ 만호(萬戶) 김을보(金乙寶)가 김천옥(金千玉)의 처를 강간했으므로 헌사(憲司)가 국문했다.
경신일. 우왕이 해주(海州)로 사냥나가자 최영과 이성림 등이 따라갔는데 우왕은 매를 팔에 얹은 채로 신월·봉가이와 나란히 말을 달렸다.
○ 김득경을 체포해 명나라 조정으로 압송했다.
○ 우왕이 임견미·이성림과 함께 정여(程與)를 극진히 대접하는 한편 몰래 장자온(張子溫)을 시켜 금 50냥을 뇌물로 주었으며 겸종(傔從) 세 명에게도 은 50냥씩을 주었다.
• 3월
○ 우왕이 해주로 가서 총애하는 여자들과 어울려 작천(鵲川)에서 놀이판을 벌이고는 옛 신평현(新平縣)으로 가서 사슴을 활로 쏘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당시 개경으로부터 해안지역에 왕 일행에 물자를 공급하는 수레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시인(寺人)과 내수(內竪)들은 왕의 총애를 믿고 함부로 횡포를 부려 안렴(按廉)과 수령(守令)을 욕보였다. 서해도의 이민(吏民)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모두 흩어져 달아났는데도 우왕은 그저 놀이를 즐기노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왕이 연안부(延安府)에 도착하자 마침 큰 비가 쏟아져 호종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비를 맞았으며 쓰러져 죽은 마소가 도로에 깔렸다.
○ 왜적이 영강현(永康縣 : 지금의 인천광역시 웅진군 및 황해남도 웅진군)을 침구했다.
기묘일. 우왕이 저잣거리에서 닭과 개를 활로 쏘아 죽인 후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으며 밤에는 왕흥의 집으로 돌아왔다.
○ 강인유가 처와 함께 송악(松嶽)에 제사를 지내자 우왕이 친히 피리를 불고 풍악을 잡히면서 상춘정(賞春亭)에서 영접한 후 만취한 상태로 밤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마주친 전 낭장(郞將) 전성길(全成吉)을 때려죽였다. 예의좌랑(禮儀佐郞) 김한로(金漢老)의 말을 빼앗아 궁녀에게 타게 했으며 돌아와서 왕흥의 집에서 묵었다.
계미일. 우왕이 저잣거리를 쏘다니며 놀다가 돌아와 정비궁(定妃宮)에서 묵었다. 강인유가 의복을 바치니 우왕이 강인유에게 말안장을 내려주었다.
갑신일. 우왕이 정비궁에 가다가 길에서 사동(私僮)을 만나자 그의 말을 빼앗고 직접 그를 포박해 순군옥(巡軍獄)에 수감시켰다.
○ 우왕이 최천검의 집에 갔다가 화통도감(火桶都監)으로 가서 화약 심지에 불을 붙여 보았다. 밤에 왕흥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후덕부(厚德府) 행수(行首) 이부윤(李富潤)이 왕을 불량배로 생각해 피하지 않자 우왕이 화가 나서 그를 하옥시키고 태형을 가했다.
• 4월
초하루 임진일. 크기가 주먹만한 우박이 쏟아지다가 여러 날 만에야 그쳤다.
○ 우왕이 도성 남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인 후 동강(東江)으로 가서 물고기를 구경했다.
○ 우왕이 신월과 봉가이를 데리고 도성동쪽 교외로 놀러 나갔다.
○ 전 서운부정(書雲副正) 방흡(方洽)과 낭장(郞將) 이문계(李文桂)가 인장을 위조한 죄목으로 참수를 당했고 한 패인 정안진(鄭安進)은 옥에서 죽었다.
○ 요동(遼東)에서 사람을 보내 농우를 사들이자 점우색(點牛色)을 설치해 서북지역의 백성들에게 교역하게 하는 한편 소 5백 두를 마련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낙인을 찍어 보냈으나 요동에서는 낙인이 찍힌 소는 우리 관청에서 바친 것이라며 값을 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후 폐지시켜 버렸다.
○ 황제가 억류되어 있던 우리 사신 김유(金臾)·홍상재(洪尙載)·이자용(李子庸)·황도(黃陶)·배중륜(裴仲倫) 등을 석방해 돌려보내면서 조빙(朝聘)을 허용했는데 이자용은 귀국길에 죽었다.
○ 왜적이 교주도(交州道)를 침구해오자 조인벽(趙仁璧)을 4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로 임명해 방어하게 했다.
○ 급제한 우홍명(禹洪命) 등에게 벼슬을 내렸다.
○ 우왕이 염국보(廉國寶)의 집에 갔다가 다음날 염국보가 학사연(學士宴)을 열자 또 들렀다.
○ 우왕이 정몽주(鄭夢周)의 집에 갔다.
○ 찬성사(贊成事) 심덕부를 동북면 상원수(上元帥)로, 지밀직(知密直) 홍징(洪徵)을 부원수(副元帥)로, 판덕창부사(判德昌府事) 김입견(金立堅)을 교주도 부원수(副元帥)로 각각 임명했다.
○ 우왕이 정몽주의 집에 갔는데 정몽주가 원로들을 위해 잔치를 열고 있기에 우왕이 마구 술을 들이키고는 잔을 잡고 꿇어앉아 이색(李穡)에게 올리면서, “사부(師傅)께서도 기생가무를 좋아하십니까?”라고 비꼰 후 그 자리의 기생을 데리고 나와 길에서 남의 말을 빼앗아 태우고 돌아갔다.
○ 왜적이 양주(襄州 :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를 침구했다.
• 5월
○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와 밀직부사(密直副使) 조반(趙胖)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은혜에 감사하는 한편 선왕의 시호와 왕위 계승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다. 은혜에 감사하는 표문은 이러했다.
“황제께서 은택을 널리 베푸사 저희들의 실정이 그대로 전달되니 스스로 감격에 넘치오며 온 나라가 기뻐 날뛰고 있습니다. 저 왕우는 다행히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태평성대를 만나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의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만, 타고난 성품이 우매하여 매번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천자의 위엄을 두려워 해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폐하께서 지혜로운 눈으로 겁에 질린 저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보잘 것 없는 공물을 받아들이시는 한편 늦게 바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또한 명백한 훈시를 보여주시어 사신의 왕래를 허락하시니 기쁨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며 올리는 말 한 마디마다 눈물이 절로 솟아납니다. 이는 폐하께서 원방(遠方)조차 감싸 안으시는 지극한 인덕과 어두운 곳마저 비추시는 큰 지혜로써 제게 딴 마음이 없음을 잘 아시고 저로 하여금 스스로 개과천선할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 나라에게까지 큰 은혜를 베푸시니 제가 어찌 제후의 도리를 더욱 성실히 지키지 않을 수 있겠으며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지 않겠습니까?”
선왕의 시호를 요청하는 표문은 이러했다.
“시호를 내리는 것은 충성을 권하는 방법이며, 부모를 현창하는 것은 효를 이룩하는 근본이오니 이에 폐하께 간절한 소망을 아뢰고자 합니다. 저의 부친 왕전(王顓)은 폐하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 모든 제후들보다 앞서 귀부해 상국의 제도를 공경히 따랐으며 책봉 받은 영토를 성실히 지켜오던 중 갑자기 별세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죽은 이를 현창하는 전례를 상고해 감히 시호를 내려주실 것을 요청하오니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일월같이 빛나는 인덕과 건곤같이 넓은 도량을 베푸사 특별히 은총을 반포하심으로써 고인의 넋을 위로해 주십시오. 그리되면 저는 부친의 정성을 성실히 본받아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할 것입니다.”
왕위 계승의 승인을 요청하는 표문은 이러했다.
“제후를 세우는 것은 먼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며, 작위를 계승하는 것은 선조를 잇기 위함이니, 이는 제왕된 이의 항상된 규범이며 자식된 자의 지극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저 왕우(王禑)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엄친을 여읜지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무상한 느낌에 더욱 슬픔이 깊어집니다. 다만 변방의 왕위를 비워두기가 어렵기에 더욱 간절히 호소하오니, 폐하께서 부디 큰 도량으로 천하만방을 똑같이 인덕으로 감싸주셔서 미천한 저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성스러운 분부를 내려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되면 제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백성들을 잘 보살피면서 성스러운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겠습니다.”
○ 왜적의 배 20여 척이 축산도(丑山島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정박하자 김사혁(金斯革)을 양광도 상원수(上元帥)로, 이화(李和)와 안주(安柱)를 교주삭방강릉도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했다.
○ 우왕이 교외에서 말을 달리다가 날이 저물자 화원(花園)에 돌아와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중에서 몇 편을 읽고 밤이 새도록 큰 대(大)자를 썼는데, 이는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 우왕이 기생 개성(改成)과 나란히 말을 달려 송안(宋安)의 집으로 갔다.
○ 우왕이 호곶(壺串)에서 사냥판을 벌이고, 밀직(密直) 반복해(潘福海)에게 말을 하사했다. 환관들을 시켜 행인들의 말을 빼앗아 기생들을 태우게 했는데 그 뒤로 상습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
○ 우왕이 호곶에서 사냥판을 벌이고는 환관 20명에게 말 한 필씩을 내려주었다. 도중에 유우소(乳牛所)를 지나다가 기르는 소가 말라빠진 것을 보고는 불쌍히 여긴 나머지 궁중 조리사에게 우락(牛酪)을 올리지 말라고 분부했다.
○ 우왕이 기생 10여 명을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냥판을 벌이면서 해풍군(海豊郡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 헌부(憲府)에서,
“판사(判事) 손용진(孫用珍)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그 나라 조정에서 본국에 대해 의심을 품고 국문했는데, 그가 오직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굴복하지 않았으니 그 충의를 포상해야 마땅합니다. 그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시며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후세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라는 소를 올리자 왕이 그 건의를 따랐다.
○ 우왕이 저잣거리로 나가서 쏘다니다가 저물어서야 화원(花園)에 돌아와 기생 및 내수(內竪)들과 함께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장난질을 하였다. 물통에 담은 물을 기생들의 옷에 뿌려 목욕한 것처럼 만들자 기생들이 모두 깔깔거렸는데 한 기생만 웃지 않자 왕이 그 여자를 매질했다.
○ 우왕이 호곶에 누각을 세우고 온갖 사치를 부린 큰 누선(樓船)을 만들고서 봉천선(奉天船)이라고 이름 지었다.
○ 숙비(淑妃)의 생일을 맞아 죄수들을 석방했다.
○ 우왕이 기생들을 데리고 남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인 후 화원으로 돌아왔다. 밤에 수화희(水火戲)를 하다가 실수로 불을 내어 처마까지 타들어가자 우왕이 옷을 벗어 물에 적셔서 불을 껐다.
• 6월
○ 우왕이 기생들을 데리고 나란히 말을 달려 동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인 후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오는데 노래와 악기 소리가 떠들썩했으며 왕은 말을 탄 채 춤을 추었다.
○ 이인임과 임견미에게 부탁하여 총애하는 기생 개성(改成)에게 쌀을 주었다. 이인임은 쌀과 콩 각 다섯 석을, 임견미는 쌀과 콩 각 열 석을 주었다.
병신일. 태백성(太白星)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무술일.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 우왕이 호곶에서 사냥판을 벌인 후 밤에는 화원으로 돌아와서 처용희(處容戲)를 하였다.
○ 사복부정(司僕副正) 변벌개(邊伐介)가 우왕더러,
“전하께서 날마다 행인들의 말을 빼앗아 기생을 태우는 통에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정 필요하시다면 여러 섬에 방목하고 있는 말들을 가져다가 사냥용으로 쓰십시오.”
라고 건의했다. 우왕이 옳은 말이라 여겨 변벌개를 보내 섬에서 기르는 말 30여 필을 가져오게 했다.
○ 우왕이 이인임의 집에 가서 이인임의 처 박씨(朴氏)와 함께 다야참(多也站)에 있는 별서(別墅)에 가려 했는데 박씨가 말이 없다고 사양하자 우왕이 행인의 말을 빼앗아 준 다음 함께 가서 데리고 간 기생들과 온갖 음란한 짓을 하며 즐겼다. 이인임이 또 개성에게 곡식 20곡(斛)을 주고 기생들과 내수(內竪)들에게 각각 2곡씩을 주었다.
○ 밀직사(密直使) 안익(安翊)과 밀직부사(密直副使) 장방평(張方平)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지(李至) 등이 소를 올려 사냥을 중지할 것을 간언하자 우왕이 지신사(知申事) 염정수(廉廷秀)를 시켜 그 글의 뜻을 풀이하게 하고는 갑자기 대노해,
“시국이 한창 위태롭고 어지러운데 이 자들이 나더러 말 타기도 익히지 말라니 이보다 더한 불충이 있겠는가? 엄하게 징계해야 마땅하다.”
라고 말함으로써 간언을 끊어버리니 재상들이 서로 보기만 할 뿐 한 마디 말도 못했다. 뒤에 우왕이 간관(諫官)의 이름을 모두 써서 보관해 두고는 “이런 자들을 시켜 왜적을 막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니, 이 때문에 많은 간관들이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 우왕이 기생들을 데리고 귀법사(歸法寺)의 냇물에 가서 함께 목욕하고 밤에 돌아오면서 전 개성윤(開城尹) 오충좌(吳忠佐)의 집으로 갔다. 오충좌의 처는 본래 단양대군(丹陽大君) 왕후(王珛)집의 여종이었다가 의순고(義順庫)에 적몰되었던 여자로 딸 셋을 두었다. 오충좌가 규정을 만들어 그 여자의 천역을 면제해 준 다음 환관들과 가까이 지내게 해 딸을 왕에게 바치니 이로부터 왕이 자주 그 집에 들렀던 것이다.
○ 왜적이 옹진(瓮津 : 지금의 황해남도 옹진군) 기린도(麒麟島)를 침구하자 해도만호(海道萬戶) 정룡(鄭龍)이 추격하여 세 명을 사로잡았다.
○ 요동(遼東)에서 상린(桑麟)을 보내 원나라 말기에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왔던 이도리부타이[李朶里不歹] 등 47명을 데리고 갔다.
○ 우왕이 호곶에 가서 새로 지은 누각의 감역관(監役官)인 이희춘(李希椿) 등 다섯 명에게 말 한 필씩을 내려주었다.
○ 왜적이 평해부(平海府 :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를 침구하자 강릉도(江陵道) 도체찰사(都體察使) 목자안(睦子安)이 격퇴시키고 다섯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임신일. 태백성(太白星)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 해도만호(海道萬戶) 정룡과 윤지철(尹之哲) 등이 전함을 거느리고 바닷섬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수색 체포했다.
을해일. 태백성이 이틀이나 낮에 나타났다.
○ 우왕이 호곶의 새로 지은 누각에서 묵었다.
○ 우왕이 기생들을 데리고 동강(東江)으로 가서 봉천선(奉天船)을 타고 물놀이판을 벌이고는 이후로 노상 물놀이를 했다.
무인일. 지진이 발생했는데 전쟁터에서 수천 마리 말들이 달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면서 담장과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대피했다. 또 송악(松嶽)의 서쪽 고개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지니 우왕이,
“이 지진은 하늘이 요동(遼東)을 뭉개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했다.
○ 명나라 황제가 김유(金臾)와 함께 명나라로 갔던 전 전공총랑(典工摠郞) 선지철(宣之哲) 등 38명을 석방해 돌려보냈다. 우왕이 그들에게 갓과 베를 내려주는 한편 일행 중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소재지의 관원에게 지시해 그 처자에게 곡식을 지급하게 했다.
기묘일. 사흘 동안 지진이 계속되었다.
○ 우왕이 기생들을 데리고 호곶에 가서 나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환관 정난봉(鄭鸞鳳)이 호곶을 찾아가 왕더러,
“전하께서 국사를 돌보지 않으시니 군왕의 도리에 크게 어긋납니다. 제다가 도당(都堂)에서 전하의 지시를 받지 못해 일이 대부분 지체되고 있으니 빨리 돌아와 업무를 보소서.”
라고 아뢰자 우왕이 그제서야 돌아 왔는데 조금 뒤 다시 호곶으로 갔다.
우측 7列 全羅道海道元帥▶陳元瑞 ▲
• 8월
八月 以子昌生辰, 宥二罪以下. 以同知密直崔元沚爲西北面都安撫使. 禑如多也岾李仁任別墅. 倭寇端州. 禑召廣興倉官, 語曰, “聞密城稅米多耗欠, 可徵本官, 勿徵其押吏.” 改成本密城妓, 押吏托以請之. 全羅道海道元帥▶陳元瑞, 捕倭二十餘人.
○ 왕자 왕창(王昌)의 생일을 맞아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
○ 동지밀직(同知密直) 최원지(崔元池)를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로 임명했다.
○ 우왕이 다야참(多也站)에 있는 이인임의 별서(別墅)에 갔다.
○ 왜적이 단주(端州 : 지금의 함경남도 단천군)를 침구했다.
○ 우왕이 광흥창(廣興倉)의 관리를 불러,
“밀성(密城 :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의 세미(稅米)가 수량이 크게 부족하다고 들었는데 그 지역 관리로부터 반드시 추징해야 할 것이며 압리(押吏)로부터는 징수하지 말라.”
고 지시했다. 본래 밀성(密城)의 기생인 개성(改成)에게 압리가 청탁을 넣었기에 그렇게 지시한 것이다.
○ 전라도 해도원수(都元帥) ▶진원서(陳元瑞)가 왜적 20여 명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