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사과를 먹다/황인숙
사과 껍질의 묽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렇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문학과지성사
<시 읽기> 칼로 사과를 먹다/황인숙
음식을 칼로 찍어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는 말에 흠칫했습니다. 칼로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나지 않으니 내가 겪었던 가슴 아픈 일들은 칼로 음식을 먹는 것과는 상관없겠지만 어쩐지 연관을 짓고 싶었습니다. 내가 겪은 가슴 아픈 일들에게 뭔가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거겠지요.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이십 대였습니다. 사랑도, 인간관계, 또 미래도, 쉬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늘 가슴 아팠고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웠습니다. 모든 게 다 걱정이었고 매 순간 비극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안달하고 힘들어했던 감정들은 모두 내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어떤 심리학가자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있습니다. 대화는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은 서로의 자세를 따라하고 비슷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 이유는 감정 전염 때문입니다.
우리는 웃는 삶을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서 웃습니다. 이 역시 감정 전염입니다. 웃음이 바이러스처럼 번지듯 슬픔의 감정도 쉽게 퍼져나갑니다.
오늘 우울한가요. 감정 전염으로 마음이 가라앉은 건 아닌가요? 나는 어떤 감정 바이러스 전파자일까요? 불행 바이러스 전파자가 아니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기분 좋은 웃음과 유쾌함, 즐거움으로 버무려진 행복 바이러스를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겠죠.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커피소년의 노래를 들으며 ‘행복의 주문’을 중얼거립니다.
―정진아 엮음, 『맛있는 시』, 나무생각,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