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고개지(顧愷之, 344년∼406년 경)의 작품세계-열녀인지도권(烈女仁智圖券)
<열녀도(列女图)> 또는 <열녀인지도(列女仁智图)>라고도 부른다.견사본(绢本)이며, 묵필로 착색했다. 세로 25.8cm, 가로 417.8cm다. 열녀도는 원래 동진시기 고개지(顾恺之)의 작품으로 이를 남송 사람이 모사했다.
한나라 성제(汉 成帝)는 주색을 탐하고, 조비연(赵飞燕)자매를 총애했으며, 조정의 권력은 외척의 수중에 떨어져 류씨 정권이 위험에 처했다. 초 원왕(楚 元王) 4대손 손광록 대부 류향(刘向 기원전77-기원전6年)은 이런 상황을 겨누어, 예로부터 시서상 기재된 현비, 정부, 총희 등 황실여인들의 자료를 모아 <열녀전> 한권을 편찬하여 한 성제에게 올려, 교훈을 명심하여 류씨정권 보존하고자 하였다.
당시 열녀전에는 부녀의 도덕규범과 국가 통치,혼란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위를 담고 있었으며, 모의(母仪), 현명(贤明), 인지(仁智), 정순(贞顺), 절의(节义), 변통(辩通), 얼폐(孽嬖) 7단락으로 구성 되었으나, 그중 인지편 일부만이 남아 있다.
한나라 류향(刘向)의 저작 <고열녀전(古列女传)>에 근거하면 인물은 창작되었고, 내용은 부녀자의 지혜와 미덕을 찬미하는 것이다. 송인의 글(题跋)에 근거하면 원래 15편이 있었으며, 남송시기에 이르러 이미 완전치 못했고, 현재 그림상에는 28인이 있은데 8 단으로 나누어지며 각 단마다 인물명과 찬사가 적혀 있다.
비교적 굵은 붓을 이용한 철선묘사로 선은 묵직하고, 인물 얼굴과 옷 주름 등에는 훈염법을 사용했다. 배경은 없으나 그림 사이에 병과 기둥 등 물건이 그려져 있다.
고개지는 인물화 창작상에서 '형태로 정신을 묘사(以形写神, 悟对通神)'하고자 했으며, 이 그림상 인물간의 상호관계를 처리하고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 생동감있고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위령부인(卫灵夫人)"의 장면상에서도 보면 위령공과 부인의 대화장면에서 그는 내심 부인이 선량하고 총명함 보이도록 표현했다.






열녀인지도, 두르마리 비단에 담채, 25.8 cm X 470 cm, 베이징 고궁박물관
<열녀인지도>는 고개지 초상화의 성취도를 보여준다 , 유향의 <열녀전> 중의 사건을 주재로 그린 그림이다. 원본은 약 천년 전에 소실되었고, 송대의 모본이 10단 중 7단이 수선을 통해 고궁에 보존되었다. 이전 시대인 한대의 고정적이고, 어색한 표현방식에서 발전되었으며 병렬구도 형식의 도입으로 공간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인물의 상호관계, 인물의 표정 형식화, 구상의 표현 기술 등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디.

晉朝畫家顧凱之所作《列女仁智圖》中叔向、叔魚母子部分,

전 고개지, <열녀인지도(부분)>,두루마리, 송 모본, 비단에 담채, 25.8×470cm. 고궁박물원:
고개지의 인물은 바람에 날리듯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윤곽선은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사족 -화성(畵聖)과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307-약365)가 서성(書聖)이라면, 고개지는 화성(畵聖)이라 부른다. 글씨와 그림에서 성인(聖人)의 반열에 들 정도로 뛰어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개지는 화가이자 탁월한 비평가였는데 그 이전에는 한 사람이 작가와 이론가를 겸한 예가 없었다. 전신(傳神:정신을 전하는 것)을 회화 비평의 최고 기준으로 삼은 고개지의 이론은 나중에 사혁(謝赫:500년경-535년경 활동)이 정립한 ‘6법(六法)의 바탕이 되었다.
<논화(論畵)>, <위진승류화찬(魏晉勝流畵贊)>,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등의 화론(畵論)을 남겼는가 하면,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 <여사잠도(女士箴圖)>, <낙신부도(洛神賦圖)>등의 두루마리 그림을 남긴 고개지는 사안(謝安:320-385)이라는 사람으로부터 “그대의 그림은 사람이 생겨난 이래 일찍이 없었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의 그림이 얼마나 흡인력이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그가 와관사라는 절에 <유마힐상>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인물의 표정이 얼마나 생생하던 지 얼굴에서 나온 빛이 온 절을 환하게 비추어 시주하는 사람들이 절 안에 가득 차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를 보면 고개지에 대한 평가가 자세히 실려 있다. 그는 사람을 그리면서도 수 년동안 눈동자를 찍지 않았다고 하는데, 전신(傳神)의 요체가 눈동자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지의 육체가 잘 생기고 추한 것은 작품의 오묘한 작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나 정신을 전하여 인물을 그리는 것은 눈동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손으로 5현을 타는 것은 그리기 쉽지만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는 것은 그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낙신부도>에서 여신이 속마음을 감춘 채 ‘차마 떨치고’ 가는 모습이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도 고개지의 이런 화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열녀인지도>와 <여사잠도>에서 유교사회에서 여성이 지켜야 할 도리나 원칙을 담아 그렸다. 그러나 같은 인물화이면서도 <낙신부도>는 당시의 가치기준과는 전혀 다른(오히려 상반되는)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고개지가 조식의 시에 매료되었다는 원인 못지 않게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괴(志怪) 소설에 크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괴소설은 초현실적인 사건을 기록한 괴담, 괴이소설 쟝르를 말한다. 고개지가 살았던 동진은 북중국을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와서 세운 나라였다. 불안과 혼란이 뒤섞인 망명정부에서 사람들은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매우 강했다.
때문에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든지'라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동진 때 간보(干寶)가 지은 『삽신기』나 곽박의 『현중기』는 모두 유령과 도깨비가 날뛰는 세상에 대한 얘기와 선계(仙界)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고개지가 여신과 인간의 사랑얘기가 담긴 조식의 <낙신부>에 솔깃했던 것도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가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혹시 고개지도 조식의 경우와 비슷한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