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전학 가서 경험한 기억을 모티브로 해서 쓴 소설 ‘술떡’의 무대이다.
광주 민주화 의거 한 달 전에 사북사태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믈다.
80년 학교가 개학 하자마자 데모가 시작 되었고, 곧 바로 휴교가 되어서, 강릉으로 내려왔다.
집에서 놀다가 우연히 사북에서 광부로 있던 동네 선배로부터 사북 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데모하던 친구와 사북으로 갔다.
밤에 석탄 더미 위에서 시위대를 내려다 보다가, 뒤에서 누군가가 밀었고 나와 친구는 10 미터 석탄 더미 아래로 미끄려져 내려갔다.
아무 것도 못하고, 친구는 부상을 당해 입원을 하고 나는 바로 군대에 끌려갔다.
지금도 뒤에서 우리를 밀은 놈이 누군지 모른다.
친구는 나중에 민주당 도의원을 두 번 하다가 이번에는 낙선했다.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 영업소에서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 인상에 항의해 광부들이 일으킨 노동항쟁이 사북사태다.
동원탄좌 사북 영업소의 광부들은 1970년대 정부의 노동 3권 탄압 등으로 인해 기본권이 제약된 노동환경에 처해 있었고,
경영주의 부당한 임금 책정과 노조 지배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또한 지역 경찰, 정보기관 등 공권력은 회사 측과 유착하여 노조 활동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1979년 4월부터 6대 노조 지부장 선거 부정 의혹을 둘러싸고 1년여 동안 노조 운영이 파행 사태를 겪고 있었다.
1980년 4월 18일 오후 노조 지부장과 사북 지서장은 사북 지서 앞마당에서 노조원들에게 집회를 열어 토론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4월 21일 14시경 노조원들은 예정된 집회가 불허된 사실을 알고 그에 항의하였고, 이 광경을 찍고 있던 정선경찰서 소속 사복 경찰관이 도주하면서 광부들을 차로 치고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교통사고로 인해 흥분한 광부들은 사북 지서 등 주요 건물들을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였다.
4월 22일 오전 일단의 광부와 부녀자들은 노조 지부장의 부인을 기둥에 묶어놓고 집단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강원도 경 경찰의 진압 작전에서는 광부들과 주민들이 던진 돌에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4월 24일 노·사·정 대표가 11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은 200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하여 가혹행위를 하였다.
검찰은 31명을 구속 기소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사북사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복권 시키고 재조명 해야 한다.
사북사태는 전두환 정권의 광주민주화 의거의 전초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