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오늘, 대구로 내려갑니다.
하루가 그저 한 시간처럼 후딱 간다고 투덜거리는 예진이와 아쉬운 인사를 해야 합니다.
이젠 많이 자라서 특별하게 놀아줄 필요도 없는 할미 할비인데, 그저 곁에만 있어도 좋은가 봅니다.
이 사랑의 관계 속에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여 주실 때
나의 주님을 밝히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본문 주해)
15~17절 :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상 인간은 이런 사랑을 할 수도 없고, 이런 기도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는 것이다.
‘또 다른’이란 예수님과 전혀 다른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가지신 분이신데 오시는 모습이 다른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육체로 계시기에 공간의 제한이 있지만, 그러나 보혜사로 오실 분은 그러한 제한이 없으시는 분으로서 다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이 같으신 분이시오, 이루어 내시고자 하시는 그 목표도 꼭 같다. 그래서 다른 말로 성령,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혜사’는 ‘도와주시는 분, 지켜주시는 분, 힘을 주시는 분, 위로하시는 분, 대언하시는 분’의 의미이다.
성도의 삶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이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의 고집을 꺾으시고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이다.
이 진리의 영은 세상이 받을 수 없다.(17절)
왜냐하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영이 진리의 영이다.
이 진리의 영이 오시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니 세상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증거이다.
18~20절 : 아들이 오신다는 약속이다.
여기서 아들이 오시는 것은, 종말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혜사로 오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는 자를 그가 있는 곳, 아버지 집에 거하게 하신다. 보혜사가 오지 않으면 아버지 집에 거할 수 없으므로 ‘고아로 방치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이에 세상은 아들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보혜사로 오시는 아들을 볼 것이다. 이는 그가 살아 있고 제자들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보혜사로 오시는 아들을 보지 못한다. 보혜사는 오직 영생 얻은 자 안에 거한다.
창세전부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거하셨다.(요1:1)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는 상태이다.
마치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듯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도록 하시는 장치가 바로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며, 이렇게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21~24절 : 아버지와 아들이 제자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다.
아들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아들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 아들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신다.
가룟인 아닌 유다(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며 묻는다.
그것은, 세상은 보혜사(보혜사로 임하시는 예수)를 알 수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아들의 계명을 지킨다.
아들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영생을 얻은 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영생을 전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영생을 전하여 사람들로 영생을 얻게 한다. 그리고 영생 얻은 그들과 서로 사귐의 공동체를 이룬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23절, 새번역)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자는 영생을 살지 않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는 영생에 무지하니 아들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며 도리어 아들을 박해한다.
(나의 묵상)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신 후 보내실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신다.
보혜사 성령님을 예수님의 영,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다른 이름이 있었어도, 나는 이 성령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또 오해했었다.
나를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분이라고만 알았지, 예수께로 나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한때 기도원 같은 곳에서 목이 쉬어라 외치며 기도하면 내게 성령이 임한다고 알았으니 얼마나 무식한 일이었는지.....
그 걸걸한 목소리의 기도원 원장들이나, 여러 기도원을 자주 찾아다니며 기도 많이 했다고 하는 권사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기억도 있다.
나의 간절한 소원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내게 성령이 임하지 않아서 뜨겁게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하는데 성령이 임할 리가 없다.
얼마 전에 치유 집회를 전문하는 어떤 사람의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치유 집회 자체에 대해 내 마음이 냉랭했고, 이미 이단 시비가 많은 사람이라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는데, 어떤 이유로 할 수 없이 보게 되었다.
참 놀라운 것은 그도 계속 ‘성령’을 이야기하고, ‘말씀’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다.
항간에 그의 치우친 집회의 성격에 신경이 쓰였든지 극구 ‘여러분이 병 나으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변명처럼 외치는 것이, 도리어 그의 저의(底意)가 ‘병 치유’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인 자들의 뜨거운 ‘아멘’ 소리는 그들의 마음을 교묘히 감추는 거짓의 소리임을 대번에 눈치챌 수가 있었다.
그 이후의 기도해 주는 장면은 동영상은 올리지 않아 볼 수 없었다.
물론 보여줄 리가 없다.
순종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성령충만 하지 않은 너의 탓’이라고 말하면 되니 얼마나 쉬울까 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득달같이 달려온 이들을 분위기로 사로잡아 성령을 들먹이며, 말씀을 들먹이며 영혼을 사냥하는 사탄의 하수인인 것이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니 병 치유나 인간 세상의 문제 해결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오신 분이니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언제 병 낫게 해 주시고,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는가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시지 않았는가?
이런 주님을 알지 못하고 그저 열렬히 ‘주여 주여!’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다시 오실 때 ‘나는 너를 모른다’는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땅에 붙은 연약한 마음의 인간들을 어둠의 세계로 몰아가는 사탄의 하수인들 역시 이 땅에서 그들이 이룬 부(富)로 좋아하다가 결국 영원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니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늘 인도하여 주신다.
본성대로 내 소원을 기도하니, 그것이 올바른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내게는 너무 어렵다. 아니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나 마음을 주관하시니 감히 주님의 뜻을 구하는 은혜를 맛보게 하신다.
세상에 붙은 마음으로 세상 것만 구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하늘의 것, 위의 것에 대해 사모하는 마음이 일게 하신다.
죄악 된 본성의 인간으로서, 스스로는 절대 품을 수 없는 마음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밝히 조명하여 주시니,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게 된다.
성경을 지식으로 알고자 하고 그것을 자랑하려던 마음을 보게 되고, 그를 통해 선한 것에도 늘 깔려있는 나의 탐심을 여지없이 보게 된다.
그 질기디 질긴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주님의 보혈로 정결함을 입게 된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
주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주님이 계심으로 나는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로 나아가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자가 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그의 계명을 지킨다.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로 이루신 영생을 전하는 일이다.
나는 주님의 이 사랑을 받은 자로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사랑은, 내가 받아 누리는 이 영생을 전하는 일이다.
이 일은 성령님이 아니시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주님은 하늘 보좌에서 나를 위해 중보하시고, 또 오늘도 성령을 통해 주님께로 이끌림을 받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복음을 알기 전, 내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동의할 수도 없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는, 씁쓸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염치는 있어서 전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았던가 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성령이 임하시고, 나를 거처로 삼으시는 성령님이 믿어지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 성령님과 동행하며 마음껏 영생의 삶을 증거하는 자로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된다.
(묵상 기도)
주님,
어제에 이어 오늘도
생명의 말씀에 숨 가쁘게 아멘합니다.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마구잡이로 기록해 보는 시간입니다.
저의 생각이 짧고, 표현력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를 두르시는 성령님의 따뜻한 미소를 느끼며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늘 말씀으로 정결케 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