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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友情의 늪 원문보기 글쓴이: 순둥이YH Kim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 통영 시민들이 나섰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통영 전시회 계기로 알려져 평범한 목사 부부 나서… 요덕수용소 수감사진·육성녹음 전시 통영 시민 ‘구출 탄원서’ 서명운동 1만여명 육박
파독 간호사로 독일서 결혼, 남편 강요로 北에 갔다 두 딸과 억류 월북 과정에 통영 출신 윤이상 연루
초등·중학교 동창 증언 잇따라 “윤이상 재평가돼야” 여론도 “전시회 끝나도 서명운동 계속” <주간조선 2161호>
▲ 신숙자씨와 딸 혜원∼규원/photo 세이지 코리아
예술의 도시 통영이 술렁이고 있다. 한 사진전이 잔잔했던 경남 통영 사람들의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노부인까지. 이 전시회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면서 관람객 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어졌다. 60~70대 토박이들 중에는 “이 전시회를 보고 나서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시회가 열린 장소는 경남 통영시 천대 국치길 38의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도서관 1층. 전시회 이름은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5월 25일~6월 19일). 이 전시회를 주관하는 곳은 통영기독교연합회와 통영현대교회(담임목사 방수열). 사실 ‘북한 정치 범수용소 전시회’는 새로운 게 아니다. 이 전시회는 세이지코리아와 한동대 북한인권학회가 지난해 10월 한동대에서 시작했다. 지난 2월에는 인사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되었고,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가 관람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통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지난 6월 13일 기자는 통영에 있는 경상대 해양과학대 도서관을 찾아갔다. 외벽에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흑백 가족 사진 한 장이 인쇄되어 있고 이런 글귀가 보였다.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
통영의 딸이라니? 흑백 사진 밑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사진은 1991년 작곡가 윤이상이 다시 월북하라고 회유하기 위해,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함께 건네준 가족 사진이다.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이 사진의 배경이 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됐다. 신숙자. 1942년 12월 10일 통영 서호동 출생.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 통영여중 9회 졸업.’
신숙자씨는 다소 체념한 듯한 표정이고, 두 딸 혜원·규원은 불안해하며 긴장한 듯한 얼굴이다.
요덕수용소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곳이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전시회가 지역사람들의 가슴을 때린 것은 북한 정치 범수용소인 요덕수용소에 갇혀 있는 신숙자라는 여성이 통영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오길남씨가 쓴 저서 ‘잃어 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도서출판 세이지)도 전시되어 있다. 오길남씨는 1993년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책을 냈다. 북한인권운동가 김미영씨가 이 책을 지난 6월 초 재출간했다.
전시회 주최 측이 만든 전시 팸플릿에는 신숙자와 그의 남편 오길남, 그리고 이들이 북한으로 가게 된 배경이 간략하게 설명되 어 있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아내 신숙자씨는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1985년 겨울 (오길남 박사는) 북한에서 좋은 교수직과 아픈 아내에게 최상의 진료를 보장하겠다는 북한 요원의 말을 믿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북한 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하자 오씨의 가족은 외부와 차단 된 채 세뇌교육을 받았다. 1년 후에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남한 부부 를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로 가던 중 탈출한다. 그리고 혜원·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 11세, 규원 9세였다.
오길남 박사가 북한을 떠나기 전, 아내 신숙자씨는 탈출에 성공하면 석 달 안에 빼내 달라.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 모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으라며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러운 범죄 공모자의 딸들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또 다른 희생자들을 만들지 말고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달라.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다. 그 범죄 공모에 절대 가담하지 말라! 도망쳐라!”고 말했다.’
이 전시회는 통영 현대교회 담임목사 방수열씨와 그의 부인 소신향씨가 주관하고 있다. 방 목사 부부는 지난 4월 말까지만 해도 북한인권 문제와 같은 시민운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신학대학원 졸업 후 서울에서 부교역자로 일하다 2004년 통영으로 내려와 목회 활동에만 전념해 온 평범한 목회자였다.
▲ 방수열 목사(좌) 통영여중 9회 졸업 앨범속의 15세 소녀 신숙자(우 상단) "내 짝지 숙자"라고 말하는 동기생 김순자씨
“석 달 안에 탈출 못 시키면 잊어라”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는 아무리 북한 동포의 비참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나와는 관계 없는 ‘먼나라 이야기’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자칫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될 뻔했던 전시회를 ‘통영 시민들의 이야기’로 만든 것은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2009년 여름, 소신향씨는 화성시 봉담읍의 흰돌산수양관에서 있은 ‘에스더기도운동본부 집회’에 참석했다. 이때 초청강사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특강을 했다. 소씨의 설명이다.
“그때 정치범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특별하게 관심이 있었던 주제가 아니어서 심각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강사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신숙자라는 사람의 고향이 통영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저는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통영? 우리 지역 사람인데, 하며 마음속에 동그라미를 쳐두었던 거죠. 돌아와서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1년10개월여가 흘렀다. 소씨는 정치범수용소 얘기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4월 초 김명희 목사(에스더기도 운동본부 소속)가 전화를 걸어왔다. 얼마 후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를 부산 동아대에서 할 텐데 한번 보고 통영에서 뒤를 이어 하면 어떻겠느냐는 얘기였다. 4월 28일 소씨는 남편 방 목사와 함께 동아대를 찾아가 전시회를 관람했다. 그러나 선뜻 통영에 전시회를 열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다. 동아대 전시회를 보고서 통영 전시를 마음속으로 굳혔을 때 소씨는 오길남의 처 신숙자가 통영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방 목사의 설명이다.
“통영은 뛰어난 예술가를 여러 명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음악가 윤이상이 통영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추앙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통영에서는 윤이상의 행적과 예술활동을 분리시켜 생각했습니다.” 방 목사 부부는 여러 날을 고민했다.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은 성경의 한 대목 때문이었다. 소씨는 기독교 성경의 이사야 5장20절을 보여줬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것을 삼으며 단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 인평초 병설 유치원생들이 설명을 듣고 있다(좌)/관람 소감을 붙여놓은 보드
통영여중 9회 졸업생
방 목사 부부는 고민 끝에 5월 17일, 통영 전시를 결정했다. 장소 물색에 들어갔다. 경상대 도서관 측과 전시회 개막 날짜를 ‘성경 배경 절기 세미나’(5월 23~25일) 마지막날에 맞추기로 했다. 통영현대교회에서 열리는 세미나에는 통영 지역 목사 부부 118명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5월 24일에는 김성욱 한국자유연합 대표의 북한 특강이 예정되어 있었다. 부부는 목회자 부부가 전부 모였을 때 이 전시회를 개막하면 그만큼 전파 속도가 빠를 것으로 판단했다. 더욱이 북한 관련 강의를 듣고 난 다음날 전시회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확인하면 효과가 높아질 게 틀림없었다.
방 목사는 전시회 콘셉트를 신숙자 모녀에 맞추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신숙자가 정말 통영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 했다. 방 목사는 오길남 박사를 통해서 알게 된 신숙자씨의 모교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요청했다. 5월 21일,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생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이렇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속도가 붙었다. 5월 23일 통영여자중학교 9회 졸업생이라는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동사무소에서 생년월일, 출생지, 부친 이름도 확인했다. 생가는 통영시 신정(서호동) 15번지, 부친은 신용중, 현재 통영에 남아있는 친척은 없었다. 신숙자 가족은 1남1녀였고 오빠는 일본으로 들어가 소식이 끊긴 것으로 확인됐다.
방수열 목사는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의 콘셉트를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로 정했다. 또한 방 목사는 관람객들에게 ‘신숙자 모녀 생사 확인 및 구출 탄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신숙자 모녀의 정치범수용소 수감이 윤이상씨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통영 시민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전시회는 서명자 수로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6월 14일 오전 10시. 경상대 해양과학대 도서관 1층 전시장. 노란색 원복을 입은 유치원생들이 자원봉사자 하명숙씨의 설명을 열심히 듣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인평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원생 24명. 유치원생에게 북한 정치범수용소와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를 어떻게 설명할까. 하씨의 설명이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모르는 아이들에게 정치범수용소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이라 그림으로밖에 그릴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통영 출신 할머니와 이모들이 그곳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어린이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할머니와 어머니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빨리 통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공부 잘하고 집안 형편도 좋았다”
인평초등학교 1~6학년생은 6월 19일까지 모두 이 전시회를 관람했다. 이에 앞서 6월 첫주에는 두룡초등학교 3~6학년 320명이 전시회장을 찾았다. 두룡초등학교 조진규 교장은 “아이들은 북한의 실정을 그대로 보고서 대한민국에서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조진규 교장은 “정치범수용소가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옆집에 있어야 할 통영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고 말했다.
전시장의 한편에는 전시회를 보고난 소감을 적어 게시하는 보드가 있다. 신숙자씨의 손주뻘인 초등학생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느낌을 적어놓았다. ‘신숙자씨 모녀뿐 아니라 수용소에 갇혀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출해야 합니다. 읽고 있으려니 화가 나네요. 빨리 정부가 나서서 이 사람들을 구해주세요. 파이팅!’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만약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제발 도와 주세요 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참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하루빨리 돌아오세요. 기도할게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이 통영땅에 북한 사진전을 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사진전을 통해 통영의 딸들이 저 북한땅에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곳에 갇혀 있다는 것이, 믿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사진전을 통해 알게 하심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루빨리 통영의 딸 들이 구출되고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이 중 특히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메모가 보였다. 통영여중 9회 졸업생 김순자씨의 메모였다. 9회 졸업생? 그렇다면 신숙자씨 의 동기생 아닌가.
기자는 주최측으로부터 김순자씨의 연락처를 알아 약속을 잡았다. “혹시 집에 중학교 졸업앨범이 있으면 가지고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1시간쯤 뒤 앨범을 들고 나온 김순자씨를 만났다. 김순자씨는 통영여중과 통영여고를 거쳐 통영에서 20여년 넘게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58년 9회 졸업생은 3개반에 191명. 한 반에 60명이 넘었다는 얘기다. 앨범을 넘겨보았다. 기자는 교가에서 한동안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교가의 작사가는 유치환, 작곡가는 윤이상이었다.
앨범에는 단발머리 신숙자의 사진이 있었다. 갸름하고 단아한 얼굴. 창씨개명을 강제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태어난 학생들이라 이름 끝자가 자(子)인 여학생들 수가 어림잡아 40%는 되어보였다. ‘자’는 일본어 발음으로 ‘~코’가 된다.
김순자씨는 열흘 전 집을 나와 길가를 걷는데 우연히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이름을 보고 중학교 2학년 때 짝꿍 숙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년월일을 보니까 거의 맞았어요. 통영여중 9회라는 걸 보니 거의 확실하데요. 집에 가서 앨범을 찾아보고 숙자를 확인했습니다. 6월 11일에 전시회장에 가서 책도 한 권 샀습니다.”
- 동기생 신숙자씨의 소식을 안 게 언제까지 입니까. “숙자가 공부를 잘해 마산간호학교로 진학했어요.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일하다가 파독 간호사로 나갔다는 소식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 후론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 그럼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까. “그럼요. 너무나 놀랐습니다.”
김씨는 이렇게 말하곤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 통영여중 9회 동기생들이 통영에 몇 명이나 살고 있습니까. “정확히는 모르겠고요. 매달 모임을 갖는데 10명 이상이 나옵니다.”
- 친구 신숙자에 대해 기억나는 일은 어떤 게 있나요.
“양볼에 보조개가 있었어요. 눈 밑에 핑크색 작은 점이 있었죠. 신숙자가 공부를 잘해 이 동네에서 마산으로 유학을 갔던 겁니다. 제 기억으로 숙자네 집이 잘사는 편이었습니다.”
김순자씨는 친구 신숙자를 얘기하면서 여러 번 눈물을 훔쳤다. 그때마다 대화가 끊어지곤 했다.
“지금 동창들에게 다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신숙자가 너무 불쌍합니다.”
앨범에는 1958년도 신숙자의 주소가 나와 있었다. 서호동 74번지. 기자는 방수열 목사, 김순자씨와 함께 주소를 찾아나섰다. 동사무소에 들러 위치를 확인한 뒤 10여분 만에 집을 찾았다. 집은 거의 옛집 그대로였다. 김순자씨는 74번지 집 앞에 서자 친구가 이사간 뒤에 이 집에 누가 살았는지를 줄줄이 꿰었다. 신숙자가 태어난 15번지 집은 언덕 위에 있었으나 그 일대가 공원 조성을 위해 헐린 상태였다.
서명운동은 6월 17일 현재 9232명을 넘어섰다. 통영초등학교, 통영여중, 통영여고 재학생과 동문을 중심으로 확산돼 가고 있는 중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통영에는 신숙자씨의 초등학교·중학교 동창들도 여러 명 살고 있다. 이경자씨는 초등학교 1학년 짝이었다. 이경자씨는 김순자씨에게 “초등학교 다닐 때 신숙자가 하루는 예쁜 가방을 메고 왔는데 아버지가 서울 가서 사가지고 오셨다고 말해 우리들이 굉장히 부러워했었다”고 말했다.
신숙자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 비탄에 빠져 있다. 학교 친구들, 간호사 친구들, 파독 간호사 친구들…. 방수열 목사는 지난 5월 30일 이메일을 받았다. ‘방수열 목사님께’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옮겨본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정말 고통이 되는 글이었습니다. 지금 독일에 있음으로… 그리고 마산동문이기에… 특별히 마음 쓰이고 지난날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 다시 독일에 돌아와 소식 접하게 되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이곳에는 87명의 마산 동문이 있는데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최대한 힘쓰려고 합니다. 나부터라도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이 가능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수고하시는 모든 분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기도와 지혜로 힘써 봅시다. - 독일서 박드보라 드림’
윤이상 평가 엇갈린 여론
통영에는 윤이상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공존한다. 윤이상의 간첩 활동을 아는 보수우파 진영은 “윤이상이 뛰어난 음악가인 것은 틀림없지만 명백하게 반국가활동을 해왔으므로 통영의 대표인물로 추앙하는 것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통영시와 윤이상 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술과 행적을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이한 입장 때문에 ‘윤이상 기념관’이 지어지고도 이름을 ‘도천기념관’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회장을 제공한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성길영 학장은 “솔직히 교회에서 주최하는 행사라 망설인 측면도 있지만 젊은이들이 북한의 현실을 알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전시공간을 빌려주기로 했다”고 말 했다. 조진규 두룡초등학교 교장은 “전시회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통영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 행적에 대해 확실하게 밝혔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헷갈려 합니다. 유족들은 그 당시 있었 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혔으면 합니다. 음악은 음악이니까요. 진실이 밝혀져야만 그 다음에 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봅니다.”
통영은 인구 13만의 도시다. 우리나라의 인구 13만 도시 중에서 통영만큼 탁월한 작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지역은 흔치 않다. 김춘수, 김상옥, 박경리, 유치환, 유치진, 전혁림 등이 통영에 태를 묻었다. 통영시는 혹시나 윤이상과 관련해서 있는 그대로 밝히는 것에 대해 꺼려하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통영에는 윤이상의 딸 윤정씨가 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통영을 찾는 관광객 수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것이다. 방수열 목사는 “처음 이 전시회를 시작했을 때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 는 반응도 들었다. 통영 사회 일각에서는 윤이상이 과거 독재정권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방 목사의 말이다.
“윤이상이 김일성 부자에게는 일등공신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악한 정권을 찬양한 것도 옳지 않은데, 더군다나 같은 동향 사람을 북한 정권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수용소에 갇히게 해서 한 가정을 완전히 파탄시킨 것은 매우 악한 일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이 통영의 대표음악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통영의 딸을 파멸시킨 자가 통영의 대표음악가 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번 사진전은 통영 사회에 던지는 충격파가 상당하다. 방 목사는 전시회가 끝나면 ‘통영의 딸, 신숙자 모녀 구출을 위한 시민모임’을 만들어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soosin153@hanmail.net)
방 목사는 시민모임으로 확산시키려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통영의 딸인 신숙자 모녀 구출운동은 단지 통영의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숙자 모녀는 곧 한국의 딸들입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 20년 넘게 갇혀있는 세 모녀는 우리의 잃어버린 딸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영에는 윤이상이라는 우상이 여전히 강력히 남아있다. 아내와 두 딸을 사지에 남겨두고 자신만 탈출한 못난 남자 오길남! 통일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재직했던 그는 현재 성북구 월곡동에 산다. 그는 1992년 9월 피 맺힌 ‘탄원문’을 썼다. 이 탄원문 에 음악가 윤이상을 어떻게 봐야 할지 답이 나와 있다.
위 사진은 1991년 1월 20일, 윤이상이 가족의 육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 한 개와 함께 전달한 가족사진 여섯 장 가운데 하나다. 그곳에는 큰딸 혜원과 둘째 딸 규원의 짤막한 편지도 들어 있었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아빠! 나 혜원이야요. 며칠 전에 아버지와 함께 생일을 즐겁게 보내는 꿈을 꾸었어요. 아버지! 부디 몸 건강하세요! 너무 오래간만에 아빠라고 소리 내어 부르니 울음이 납니다. 아빠! 나는 규원이야요!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보고 싶어요, 아빠! 아버지와 만나는 날 나는 무엇을 선물할까요? 아빠, 안녕! 1991년 1월 11일 평양에서'
못난 남편, 오길남 박사
다음은 오길남씨가 남긴 수기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도서출판 세이지, 2011년 5월 재출간, 원제: 김일성 주석 내 딸과 아내를 돌려주오)에 남겨진 신숙자씨의 말이다.
‘... 누구나 서 있는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모색하고 지향하는 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나는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어떤 백치도 어떤 눈먼 장님도 저지르지 않을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 받을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순한 사람들을 음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역할을 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돼요.
자주니 평화니 민족 대단결이니 그럴싸한 간판을 내걸고 사람의 피와 살이 되어야 마땅한 값진 것들로 전쟁 준비를 하느라 탕진하여 이곳 주민들은 허기져 있고 모두들 지쳐있어요. 사회주의라는 것도 아무런 내용물 없는 빈 껍데기나 베 쪼가리처럼 바람에 찢겨 펄럭거리는 허깨비에 불과해요. 무상 교육 제도, 무상 의료 제도 나발을 요란하게 불어대지만 모두가 다 빈 깡통이 에요. 의약품도 없는데 무슨 의료 제도예요, 당신, 인민들에게 나눠 줄 볼펜 하나 변변한 거 본 적이 있어요? 사회 보장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고 선전해대지만 치사(致死)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년퇴직 하면 한 달에 20원씩 받아요. 필터가 달린 담배 한 갑 값이죠. 이런 땅이 지구촌에서 몇이나 되겠어요.
이렇게 살려면 차라리 애들과 함께 죽겠어요.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 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줘요.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혜원 아빠, 당신 떳떳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야 해요. 올가미에 씌워서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는 한이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가서 석 달 안에 우리를 이곳에서 빼내 주세요. 그렇게 안 될 때 우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 제발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못난 사람처럼 눈물 흘리지 말아요. 나와 혜원이 규원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우리의 몸은 이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 속에 있겠어요. 백 번 거짓말하다 보면 한 번은 속아 넘어 간다고 보는 대남 사업 방송 기구의 앵무새 방송원 노릇하려고 반평생을 밤잠 설쳐 가며 공부했어요? 아니잖 아요. 청순한 젊은이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인돼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 범죄 공모에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 돼요.
도망치세요. 우리야 무슨 죄가 있어요. 그래도 죽인다면 죽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우리를 죽인다면 자기들의 체제가 병약하다는 걸 알리는 거예요. 그러니 함부로 죽이지 못할 거예요. 준이 엄마(송두율의 처)도 민중이 엄마(김종한의 처)도 앙큼한 여자들이에요. 나도 앙큼해져야겠어요. 독기 찬 저주를 독일에서 사는 여자들에게 보내고 싶지만 억제하겠어요. 다시 한 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 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요. 추악한 삶은 존귀하지 않아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나가세요.’
바보 남편, 오길남 박사의 <탄원문>
나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나의 처 신숙자(50)와 딸 혜원(16)·규원(14)이 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국제인권단체의 많은 도움이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나는 1942년 3월 11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인 부산에서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2년 국립 서울대학교 독어독문과에 입학하여 1969년 동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 저는 서울에 있는 독일문화원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서울 지부장인 독일인 에리흐홀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아 1970년 10월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독일 튀빙겐에 있는 튀빙겐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여 1976년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튀빙겐대학 부속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신숙자(현재 재북 중)와 결혼하여 두 명의 딸을 두게 되었습니다.
큰딸 혜원은 1976년 9월 17일, 독일 킬에서 태어나 킬 근교 크론스하겐에 있는 그림형제(Bruder Grimm)라는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둘째딸 규원은 1978년 6월 21일, 역시 독일 킬에서 태어나 언니와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나는 독일에서 1974년 3월부터 독일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반한단체인 ‘민건회’에 가입하여 그 구성원들로부터 한국이 독재 정치를 하 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1980년 3월 독일 정부에 망명을 하였습니다.
독일 유학 15년이 되던 해인 1985년, 나는 브레멘대학에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과 생산가격 이론의 재구성’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는 했지만, 나이가 43세나 되어 쉽게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고, 국내에 들어와 대학교수로서 일할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과거 ‘민건회’라는 반한단체에서 활동했던 경력 때문에 신변에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귀국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교통사고를 일으켜 부상을 당한 데다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혈액을 취급하다 간염에 걸려 휴직 상태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가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평소 친하게 지냈던 야채상 김종한(52)으로부터 “북에 가서 조국을 위해 경제학자로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나는 북한 체제가 나의 전공인 마르크스 경제학과 깊은 연관이 있고,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일해 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그러던 중에 독일에 있는 유명한 음악가인 윤이상(75)으로부터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북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서신을 받고 입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종한의 소개로 동독 주재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는(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 백 서기관이란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북한에 가서 경제학자로서 일하게 되면 메르세데스 고급 승용차도 제공받고 여러 가지 연구 활동이 보장되며 봉급도 많이 받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백 서기관에게 “나는 마르크스 경제학 추종자로서 북한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북한에 가서 일해 보겠다”고 입북할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북행하기 직전인 1985년 11월 말경 처와 입북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처음에는 처가 완강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처에게 “우리의 어려운 살림 형편을 극복하고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과 간염을 앓고 있는 당신을 치료하려면 북한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라고 강력히 설득하였습니다.
그러자 반대하던 아내는 울면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입북을 결정한 것 때문에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를 자신은 북한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아내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북한에 들어가서야 깨달았습니다.
1985년, 나와 처자는 대남 공작원인 백 서기관과 백치완(47)에게 독일 망명 여권을 맡기고, 대신 그들이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가공인물의 북한 공무 여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베를린과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나는 평양 근교에 있는 순안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경제학자로서 일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우리 가족은 모두 평양 대동강 부근의 어느 깊은 산속에 있는 동북리초대소에 수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소위 밀봉 세뇌교육을 받으면서 김일성에게 충성을 강요당하는 인간 로봇으로 전락되어갔습니다. 3개월 동안 초대소에서 사상 세뇌교육을 받은 후, 평양시 흥부동에 있는 대남 흑색선전 방송국인 ‘구국의 소리’ 방송 요원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곳은 그 방송이 남한 내에 실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거나 혹은 자진하여 월북한 많은 남한 출신 자들이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북한 당국이 남한을 적화 통일하기 위해 만든 공작 기구였습니다. 허황된 거짓을 마치 남한 내에서 방송하는 것처럼 속여 북을 추종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남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1986년 6월부터 1986년 11월 북한을 탈출할 때까지 이 방송국에서 민영훈 교수라는 가명으로 ‘종속경제 비판’ 등에 대해서 녹음하여 이를 남한으로 송출하였습니다. 이렇게 북한 당국은 입북하기 전에 나와 약속한 것과는 달리, 경제학자로서 일할 여건 도 제공해 주지 않았으며, 철저하게 나의 개인 생활을 통제하고 나의 요구 또한 완벽하게 무시하며 기만하였습니다. 1986년 11 월 25일 구국의 소리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 북한 대남공작기구 책임자인 리창선(67·현 사회문화부 부장)이 나에게 ‘독일 에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 2명을 덴마크로 유인하여 대동 입북시켜라’라는 끔찍한 공작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집으로 돌아와 처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진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처는 저에게 “인간으로서 도저히 살 곳이 못 되니 당신이 먼저 이곳(북한)을 탈출해 독일 정부 에 호소하여 우리를 구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입북하기 직전까지 독일 망명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독일 정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6년 11월, 나는 사랑스러운 처와 귀여운 두 딸을 지옥과 같은 북한에 두고 나왔습니다. 독일 유학생 2명을 덴마크 코펜하겐으 로 유인, 대동 입북하라는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에게는 북한 요원 백치완 등 2명이 따라붙었습니다. 나는 북에서 만들어 준 오경현이라는 가명의 여권을 소지하고 덴마크 코펜하겐 카스트로트 공항으로 침투 중, 공항 사열 요원들의 도움으로 동행한 북한 요원을 따돌리고 극적으로 탈출하여 독일로 돌아와 재정착하였습니다.
나는 북한을 탈출해서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이상을 만나 그에게 재북 가족을 송환시켜 줄 것을 수차에 걸쳐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1987년 10월과 1988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북한에 있는 처로부터 편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처는 평양시 형제산 구역 형산리 8반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후 1991년 1월, 윤이상은 처자의 육성이 녹음된 테이 프 1개와 가족사진 6장을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윤이상은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제 고용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다시 입북하여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통하여 재북 가족 송환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최후 수단으로 나의 조국인 한국에 들어가 당국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1992년 4월 10일, 저는 독일 주재 한국 대사관에 자수하여 1992년 5월 22일 입국하였으며, 현재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조국에 귀국하기 전인 1992년 3월과 4월 사이에 독일에서 재북 가족의 안전과 송환을 위해 UN민권위원회, 국제사면위원 회, 국제적십자사에 불쌍한 재북 가족을 송환해 달라는 간절한 내용의 호소문을 발송했습니다. 1992년 6월, 국제적십자사 홍콩 지사로부터 재북 가족의 근황을 알아보겠다는 연락이 왔을 뿐, 여타 기구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재북 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북한에 있는 나의 가족 신변에 위험이 따를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가족 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사 여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 밤마다 처와 두 딸의 생각으로 잠 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국제인권단체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나의 처와 두 딸은 지금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혹은 묵살당하면서 북한 에 억류돼 있습니다. 사랑하는 처와 귀여운 두 딸을 다시 만나 내가 태어난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 히 호소합니다. 진심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1992년 9월 오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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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