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다음 영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그린 영화 '명량'이 지난 2일 하루에만 전국에서 관객 약 123만명이 들어 누적관객수 350만명을 돌파했다.
이로써 '명량'은 일일최다관객수, 역대 최단기간 300만 돌파 등의 신기록을 갖게 됐다. 하루 약 123만 관객은 2011년 7월 2일 '트랜스포머 3'가 기록했던 95만6500명의 기록을 제치고 역대 1위 일일 관객수를 기록했다.
이 영화는 개봉전부터 영화 공식홈페이지에 이순신 장군이 격파한 당시 왜군의 함선수를 놓고 논쟁이 일기도 했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이 13척(대장선 포함)으로 격파한 왜선 133척과 333척 논쟁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명량대첩에서 조선수군이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 조선수군, 360도 회전 가능한 '평저선'
[사진=위키피디아]
당시 조선 수군은 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이 전투함이었다. 이를 평저선이라고 부르는데,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갯펄이 많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발전한 형태로 본다.
평저선의 특징은 판옥선의 경우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선체가 무겁기 때문에 파도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강한 선체는 충파(적함에 돌진해 부수는 전술)에 강했다. 또 무엇보다 판옥선에 장착된 화포들이 총통류부터 비격진천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당시 왜군은 함선에 화포를 장착해도 잘 다루지 못했고, 왜군의 안택선은 평저선이 아닌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이었기 때문에 명량해협 같은 좁은 곳에서 선회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판옥선은 당시 왜군의 대장선보다도 더 크고, 높이도 높았다.
2. 화살이 조총보다 더 위력이 강했다
영화에서는 왜군이 조총으로 선제 공격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 조총의 최대 사거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50미터 정도였고, 화살은 200미터 이상 날아갔다.
난중일기 등의 사료에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경우 조선수군에게 돌격하다 함포사격에 배가 침몰한다. 그러나 침몰 전 구루지마는 조선수군의 화살에 벌집이 돼 지휘석에서 죽었다. 이 사실은 당시 조총은 근접전에서 위력을 발휘했고, 원거리에서는 화살이나 함포전에는 무용지물이었다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구루지마는 항왜 전사 '준사'가 물에 떠 있는 시신을 확인하고 건져내 참수했다.
3. 포위 당한 것은 이순신이 아니라 안위
명량대첩 초반에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선두에 나서 3시간 가량 분전했다. 이후 왜군 함선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판옥선의 장점과 함포 운용으로 별다른 손실없이 왜군함선을 격퇴했다.
이 이후 전장에 뛰어든 '안위'의 판옥선이 돌격하다 왜군 함선 3척에 포위당했고, 대장선이 왜군 함선 3척을 모조리 격침시키고 안위를 구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판옥선은 왜군 함선보다 높이도 높았고, 평저선이라 함포 발사 때 반동을 잘 흡수해 정확한 조준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4. 배설과 탐망꾼은 죽지 않았다
배설은 칠천량해전에서 일찌감치 자기부대를 데리고 전장을 이탈했다.
이 덕에 이순신 장군이 배설 휘하 10척과 또 다른 포구에 정박해있던 전선 3척을 회수할 수 있었다. 이중 1척은 파괴가 심해 12척의 함대가 꾸려진다. 배설은 원래 무례하기가 극에 달했다고 난중일기와 사서에서는 전하고 있다. 배설은 명량대첩 전에 무단으로 전장을 탈영했고,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후 1년 뒤에 권율 장군에게 잡혀 처형 당했다.
또 탐망꾼 임준영(실제 탐망 군관)은 영화처럼 죽지 않고 이순신 장군에게 적의 정보를 전달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게 했다. 그만큼 적정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일례다.
아울러 당시 백성들은 피난을 간 것이 아니라 산위와 바다에서 조선수군을 응원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적선 133척과 다른 기록에서 나오는 333척은 이 때문에 생긴 차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시 백성들이 본 왜수군은 후방부대까지 모두 333척이었고, 실제 조선수군과 싸운 왜수군은 133척이라는 것이다.
다른 기록에는 이때 참전한 왜군 함선 중 피해없이 퇴각한 함선은 10척 정도라고 한다. 반면 조선수군은 교전 중 사망한 병력이 10여명 정도였고, 부상자까지 합해 100여명도 안 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세를 완전히 뒤바꾸는 세계 해전사에서 몇 안되는 전투였음은 분명하다.
명량대첩으로 정유재란의 전세는 왜군에서 조선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후 이순신 장군에게 재해권을 빼앗긴 왜군은 보급로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남해안에 쌓은 주요 왜성에서 농성을 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