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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장례식 당시 영상
몽양 여운형(1886(고종 23)∼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함양(咸陽). 아호는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출생. 아버지는 정현(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그는 14세 때에 용인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4년 만에 사별하고, 그 뒤 충주의 진씨(陳氏)와 재혼하였다.
15세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으나 1년도 못 되어 사립흥화학교(私立興化學校)로 옮겼다가 1903년 다시 관립우체학교(官立郵遞學校)로 옮겼다.
그러나 졸업 한 달을 앞두고 그 학교마저 그만두었다. 그 뒤 1907년부터 시작한 성경공부를 하여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1908년경에는 미국인 선교사 곽안련(郭安連, Clark,C.A.) 목사와 친분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1909년 사립기독광동학교(私立基督光東學校)를 세웠다. 1910년 봉제사(奉祭祀)의 집안 전통을 혁신하고 노복들을 풀어주는 등 안팎으로 변혁을 일으켰으며, 1911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또 중퇴하고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1917년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이 학교 역시 중퇴하였다. 1918년 상해에서 청년 동포들을 규합하여 민단(民團)을 조직하여 광복운동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또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총무간사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1919년 3월 임시정부 수립에 가담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이 우리 나라의 자치문제를 타진해오자 찬부양론이 있는 가운데 동경으로 건너가 당시 척식국장관(拓殖局長官)인 고가(古賀廉次造)를 비롯하여 노다(野田) 체신대신, 무단정치가의 중심인물인 다나카(田中義一), 그리고 미즈노(水野鍊太郎) 정무총감 등과 일련의 회담과 의견교환을 하고 돌아온 일도 있다.
1920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근로자대회(遠東民族勤勞者大會, 또는 遠東被壓迫民族大會라고도 불림)에 참석하였고, 상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1922년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1924년 중국국민당에 가입하여 한중상호협조를 위한 남방혁명군(南方革命軍)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였다가 영국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에 인도, 3년간 복역한 뒤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도 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장직에 취임하였으나 1936년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되자 사장직을 물러났다. 1944년 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여 그 위원장에 취임하여 광복에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양평 용문산 속에서 농민동맹(農民同盟)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하여 스스로 부주석(副主席)에 취임하였으며, 10월에는 인민당(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앉았다.
그러나 인민당은 인민공화국 선포,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1945.12.27.),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1946.1.19. 결성), 미소공동위원회 등에 대한 노선에서 공산당과 보조를 같이하였고, 또한 1946년 5월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을 때 좌익을 대표하여 중간적인 위치에 선 일이 있다.
◆ 잡지 '라이프'의 표지모델을 장식한 몽양 여운형. 1947년으로 추정된다. 그의 표정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여운형과 같은 중도파 세력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는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金奎植)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해방 후 몽양의 양평 생가 모습
◆ 1933년, '현대철봉운동법' 모델 사진으로 출연했던 여운형
◆ 1920년 인성학교
인성학교는 몽양이 세운 교육기관이다
◆ 1926년 인성학교 졸업장
◆ 파리 강화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김규식을 환영하는 중국 동지들.
신한청년단 등은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러나 큰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 1922년 1월 극동 노동자회의 의장단의 김규식(왼쪽 첫번째), 여운형(왼쪽 서 있는 사람)
1921년 말, 동방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여한 여운형. 레닌은 제국주의론에 입각하여 식민지의 해방을 지원했다. 그중 일환으로 동박 피압박민족대회를 열었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해 참여하기 위해 여운형은 몽골고원을 가로질러 이르쿠츠크로, 모스크바로 향했다.
◆ 1925년, 상해에서 친구들과.
맨 왼쪽 여운형의 모습이 보인다.
◆ 1926년, 상해 야구 상하이 공설운동장에서. 맨 오른쪽 여운형이 보인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이룬 1차 국공합작에서 여운형도 일정부분 역할을 했는데,1926경 결렬되면서 여운형도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상해로 몸을 피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여운형은 후단대학의 체육코치로 일하며 활동한다. 이 당시 체육대회를 겸하여 남양지역을 돌며 조선 독립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 1929년 7월 10일 용산역, 체포되어 귀국한 여운형
1929년 7월 10일 체포되어 조선에 도착한 여운형. 여운형은 프랑스 조계지역에서 체육코치를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와 영국의 관할에 있던 공동 조계지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는 영국의 묵인 하에 가능했다.
◆ 최초의 일장기 말소사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장기 말소보도는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다. 그러나 그 이전에(8월 15일)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는 조선중앙일보에서 일장기말소보도가 있었다.
동아일보는 이를 보고 같은 보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보도가 발각되어 큰 문제가 생기고 정간(8월 27일)되자, 조선중앙일보도 자진 휴간(9월 15일)하였다.
◆ 1934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백두산 천지 탐방
◆ 1934년, 서울을 방문한 영국 축구단과 여운형
◆ 1935년 경기기자동맹과 함께 한 여운형
◆ 1935년 경 안창호(중앙), 조만식(오른쪽)과 함께.
◆ 1936년, 동경환영회
◆ 1945년 해방 이후 건국동맹 회의에서 여운형, 서울 YMCA에서
◆ 1945년 8월 16일, 휘문보고 운동장에서
◆ 1945년 8월 16일, 연설을 위해 휘문보고로 향하는 여운형
◆ 1945년 8월 16일, 휘문보고에서 연설중인 여운형
◆ 1947년 좌우합작위원회 위원들의 마지막 기념촬영. 좌우합작위원회는 미군정의 지원 하에 우익과 중도파를 결집시키기 위한 위원회였다.
여운형도 좌우합작위원를 함께 시작했으나, 미군정의 간섭과 활동의 치우침으로 인해 그만두게 된다. 사진은 여운형이 암살된 뒤 촬영된 것이어서 그의 얼굴사진을 오른쪽에 오려 붙였다
◆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쉬띄꼬프와 여운형
좌우합작운동 실패 후 잠시 정계를 떠났던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난항을 거듭하였고, 이 와중에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달리는 차 안으로 난입한 괴한에 의해 총격을 받고 암살당하였다.
◆ 허헌, 쉬띄꼬프, 이묘목(통역사, 중앙 흰 양복), 김규식(흰 두루마기)과 여운형
여운형에 대한 테러는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첫 번째 테러 발생 이후 여운형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테러에 시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테러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고, 1947년 3월에는 결국 계동에 있는 그의 집이 폭파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여운형은 1947년 5월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서 총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달 뒤 여운형은 결국 12번째 테러를 피하지 못하고 암살당하게 되었다
◆ 1946년 박헌영과 여운형.
박헌영과 여운형은 해방 직후 함께 했다. 여운형은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조직력을 앞세운 박헌영과 종종 충돌하였다.
◆ 1947년 5월, 근로인민당 창당시 여운형.
이때는 좌익과 우익이 완전히 분열하며 대립했고, 테러나 난무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중간파들은 민족통일전선의 운동을 계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근로인민당이 창당되었다
◆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15분경, 몽양이 암살당한 장소.
몽양은 1945년 8월 18일 오전 1시부터 이때까지 알려진것만 총 13차례의 테러를 당했다. 수많은 피습과 총격과 자택 폭파 등...
총격 후 범인은 곧바로 도주했다. 경호원이 범인을 추격하였지만 갑자기 등장한 경찰에 의해 오히려 범인으로 몰려 시간만 지체되고 말았다. 이후 경찰은 한지근이라는 청년을 체포한 후, 이 사건을 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한지근은 미성년자라고 나이를 속여 사형을 면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일어난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끌려간 뒤 그의 생사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 여운형이 암살될 당시 입고 있던 옷
오른쪽 어깨와 등쪽으로 총알이 관통된 흔적과 핏자국이 보인다.
◆ 1947년 8월 3일 여운형의 장례식
◆ 여운형의 장례 직후 가족들의 모습
이 사건이후 여운형의 가족들은
- 부인 진상하(미확인) : 한국전쟁때 큰집하고 같이 계시다가 북한군이 후퇴할 때 같이 올라갔다.
- 장녀 난구(미확인) : 여운형 선생님 암살 이후 북으로 올라간 것으로 알고 있다.
- 둘째 딸 연구(1996년 사망) : 북행, 조선전선 의장,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 셋째 딸 원구(2009년 사망) : 북행,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국통일상 수상.
- 장남 봉구(1933년 사망) : 1933년 중국 상해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 둘재 아들 홍구(미확인) : 젊어서 돌아가셨다.
- 셋째 아들 영구(미확인) : 젊어서 돌아가셨다.
- 넷째 아들 붕구(1991년 사망): 북행, 조선전선 서기국 국장,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 1980년대 초반의 몽양의 직계 가족들
가운데가 둘째 딸 이연구, 그 뒤쪽이 셋째 딱 이원구, 오른쪽 첫번째가 넷째 아들 여봉구이다.
◆ 1990년대 초반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기념촬영한 몽양의 가족들
왼쪽부터 4째 아들 봉구, 둘째 딸 연구, 김일성 주석, 셋째 딸 원구, 조카딸 순구
◆ 여운형의 건국훈장.
그는 국가보훈처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두 번째)이 수여되었으나, 여운형의 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재심사를 거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첫 번째)이 수여되었다.
◆ 여운형 암살공범들. (모자이크 처리된 인물은 '제2 저격조'였던 '김훈'이라는 자인데, 이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된 이유는 MBC 다큐멘터리 제작 당시 인터뷰했을때라 신변보호상 모자이크 처리한겁니다.)
◆ 여운형을 암살한 범인들
1974년 2월 5일 몽양 여운형 암살 사건의 공범자라고 나선 유용호(일명 예근), 김흥성, 김훈(일명 승훈), 김영성등은 몽양의 암살은 한지근(일명 이필형)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5명의 암살단에 의한 조직적인 범행이였다고 주장했다.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은 여운형이 사망한 지 27년 후인 1974년이 되어서야, 여운형을 암살하는데 가담한 4명이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한지근과 자신들이 어떻게 여운형을 암살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 여운형을 암살한 범인들
이들은 이 사건의 단독범으로 알려진 한지근과 함께 사건에 관련되었다면서 이 사건의 총지휘자는 김흥성이였고 나머지 4명은 제 1, 2 저격수, 확인역등을 맡았고 제 1 저격수였던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서울지검 강력부 배명인 부장 검사는 몽야 암살 사건 진상 재조사에 들어갔다.
그들 말에 따르면 한지근 등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나갔다. 여기서 이들은 당시 극우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이 ‘민족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근환과 염동진은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였다.
◆ 1947년 3월17일 폭탄테러로 파손된 여운형의 계동 고택으로 이 건물은 결국 노태우 정부때 철거당했다.
1974년에 나온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곧 그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나온 직후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설명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가깝게 들어맞았다고 증언하였다.
◆ 여운형이 암살당한 자리에 동그라미 표시가 돼 있다
일본인 총독들로부터도 대통령감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여운형은 여러 차례 테러와 살해 위협을 당해오다가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결국 암살당했다.
결국 여운형 암살은 해방 직후 많은 테러 행위에 관여한 극우테러단체들이, 여운형의 좌우합작 노선에 불만을 품고 상호 연계하여 그를 제거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이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집을 근거로 활동했음에도 경찰에 의해 적발되지 않았다는 점, 여운형이 여러 차례 테러를 당했음에도 그 배후와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 무엇보다 암살사건 발생 이후 경찰이 사건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점 등을 보았을 때, 경찰 역시 이 사건을 사실상 방조했다고도 평가되고 있다.
◆ 꽃으로 싸인 상여의 운구는 손귀정을 포함한 112명의 청년들이 운구를 하였다.
참고문헌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나의 아버지 여운형』(여연구, 김영사, 2001)
『몽양 여운형 평전』(정병준, 한울, 1995)
『몽양 여운형』(이기형, 실천문학사, 1984)
『해방20년사』(해방20년사 편찬위원회 편, 희망출판사, 1965)
등.
첫댓글 김구, 여운형....이런 분들이 살아계셨다면 우리 민족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네요..
공산주의를 멀리하려한 우익주의자 김구와 공산주의적 사회 변혁을 시도하려한 여운형의 맞불이....
@듬직한사내 네! 그랬을것 같아요, 제 짧은 생각에 이승만과 김일성말고 김구와 여운형 어떤 역사가 쓰여졌을까 상상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