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민족적 영웅이다. 그러나 이순신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만, 을지문덕은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전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아도 그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언제 태어나 어떤 벼슬을 지냈으며, 언제 어디에서 죽었고,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을지문덕은 평원왕이나 양원왕 재위 시에 평양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에서 가까운 평남 증산군 ․ 평원군 지방에 을지문덕에 관한 전설이 서려 있다. 그가 태어났다는 마을의 석다산은 현재 평남 증산군 석다리에 있다. 석다리에는 을지문덕이 어린 시절 글 읽고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평남 평원군 화진리 불곡산 동굴 속에서 글 읽고, 석다산 남쪽의 마이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며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도 있다.
수양제(隋煬帝)는 612년 정월에 고구려원정에 나섰다. <수서(隋書)>는 이때 양제가 동원한 군사가 24군에 113만 3천 800명이라고 한다. 군량 등 물자 수송에는 그 2배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이는 거의 300만에 이르는, 중국 역사상, 아니 당시까지는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그러나 6월이 될 때까지 요동성 하나를 함락시키지 못 하자 양제는 자신이 직접 요동성으로 달려와 독전을 했으나 그래도 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초조해진 양제는 신임하는 장수인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에게 30만 5천 명의 정예군을 주고 평양성을 직접 공격토록 명령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요동성을 우회하여 압록강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대신 을지문덕이 우문술과 우중문의 수나라 본영에 나타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을지문덕은 적진으로 찾아들어가 우문술과 우중문 등에게 항복하겠노라는 뜻을 전했다. 사실은 항복이란 거짓이고, 항복한다는 핑계로 적군의 허실을 탐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우중문은 출전에 앞서 양제로부터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이 오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밀명을 받고 왔기에 을지문덕이 제 발로 걸어서 찾아오자 이게 웬 떡이냐면서 속으로 기뻐하며 을지문덕을 붙잡아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항복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온 적장을 생포한다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고, 또 대국의 체면도 말이 아니라면서 반대했다. 우중문은 할 수 없이 을지문덕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을지문덕을 그대로 돌려보낸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듯했다. 나중에 황제가 이 일을 알면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곧 을지문덕에게 사람을 보내, “꼭 할 말이 더 있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난 을지문덕이 그런 잔꾀에 넘어갈 리가 만무여서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강을 건너가 버렸다. 우문술은 퇴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우중문과 의논하니 우중문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장군은 수십 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하찮은 적군을 쳐부수지 못 했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황제 폐하를 뵙겠소이까?”
우중문이 황제까지 들먹이며 나서자 우문술도 할 수 없이 그의 주장에 따라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을지문덕의 뒤를 쫓았다.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대신으로서, 또 적의 침략군과 맞선 최고사령관의 신분이면서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들어간 용기와 희생정신이야 말로 민족적 영웅의 풍모라 하겠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들이 더욱 지치도록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일부러 져줌으로써 적군을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했다. 수군은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다랐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자를 적진에 보내 이런 말로 거짓으로 항복을 청했다. “만약 군사를 돌이킨다면 반드시 우리 대왕을 모시고 가서 황제에게 항복하리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들을 조롱하는 저 유명한 오언시를 지어 보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 기묘한 방략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 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리. - (神策究天文 / 妙算窮地理 / 戰勝功旣高 / 知足願云止)
그제야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을 알아차린 우문술 등은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곳곳에 매복해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 군이 사방에서 이들 지친 수나라 군사들을 사정없이 추격하며 맹렬히 공격했다. 수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살수에서였다. 여기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는 등 수군은 참패했다. 그렇게 해서 압록강을 살아서 건너간 자는 30만 5천 명 가운데 2천 700명뿐이었다. 이것이 유명한 살수대첩의 전말이다.
그러다가 617년에 마침내 양제가 친위군의 쿠데타로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양제를 죽인 사람은 그의 평생 동지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이었다. 수 양제의 피살로 수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에 이연(李淵)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당나라이다.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을지문덕의 자취가 그 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가 을지문덕 장군 일대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35년에 을지문덕 묘를 답사한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0월 1일, 2일,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김준연(金俊淵)의 답사기이다. 그 글에 따르면 을지문덕의 묘는 평남 강서군 잉자면 2리 현암산 동쪽 기슭에 있으며, 을지문덕의 후손 돈종각(頓宗珏) 씨도 만났다고 한다.
평남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에 살고 있던 돈씨는 자신의 조상 을지문덕의 묘가 평북 의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평북 의주군 옥상면 자물촌 싸리골에 찾아가 보니 그 묘는 을지문덕의 조상 을파소(乙巴素)의 묘였다고 한다. 거기에는 을파소의 조부 을두지(乙豆智)의 묘도 있었다고 한다.
을지문덕의 후손이 어찌하여 돈씨가 되었는가. 고려 인종 때 묘청(妙淸)의 봉기가 있을 때 이 고을에 살던 을지문덕의 15세손 을지수(乙支遂) · 을지달(乙支達) · 을지원(乙支遠) 3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왔고, 그 공로로 인근 돈산(頓山)에 봉해졌으며, 돈씨를 사성(賜姓)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을씨가 을지씨로, 다시 돈씨로 변하게 됐다는 것이다.
또 한편 1938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조만식 ․ 최윤옥 ․ 김병연 ․ 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잉자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했다’는 내용이다. 평남 강서군은 현재 남포시에 편입되어 있고, 이에 관한 기록을 더는 찾을 수 없어 매우 아쉽다.
평양 근교에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단군릉을 조성한 북한이 을지문덕 묘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궁금하다. 또 후손인 돈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대한언론인회보>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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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을지문덕의 후손이 북한지역에 돈씨로 생존한다니 매우 흥미롭네요.
졸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 후손 중 일부가 6.25때 월남하지나 않았을까도 생각해봅니다.
솔직히 북한에 있는 것들은 신뢰가 잘 안가네요. 단군묘도 그렇고...
1935.10.01 동아일보 1면에서도 돈종각씨 이야기가 실렸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