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불(生佛) 틱낫한 스님의 아미타불 수인(手印)
유명한 사람은 무언가 다를 것 같아 보인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좀 더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 틱낫한 스님이 그런 케이스이다.
살아 있는 부처
틱낫한 스님(1926-)이 방한 하였다. 지난 2003년 방문 이래 10년 만이라 한다. 아마도 마지막 방한이 될 것이라 한다. 나이가 이미 87세에 달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은 달라이라마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달라이라마와 더불어 생불,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 받고 있다.
2003년 방한 하였을 때 ‘경행’열풍이 불었다. 스님이 경행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년 만에 방한한 스님은 어떤 이야기를 하였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불교TV 사이트에서 특집프로에서 알 수 있었다. 모두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틱낫한 스님 방한 특집 대중강연의 제목이 ‘STOP AND HEAL’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석하면 ‘멈춤과 치료’이다.
분노 다스리기
스님은 잠실체육관에서 멈춤과 치료라는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강연에 참여 하려 하였으나 평일이고 거리가 멀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TV사이트에 동영상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모두 볼 수 있었다.
불교tv사이트에는 약 50분 분량의 동영상 세 편이 올려져 있다. 모두 인내를 가지고 다 보았다. 강의 내용은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대한 것이다. 주로 분노를 다스리는 이야기 위주이다. 그런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수행을 통해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람이구나, 나와 똑 같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나와 똑같이 고통을 겪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는 더 이상 예전처럼 화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비로운 눈에서 자비로운 수행의 결과입니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자애롭게 바라본다면 상대는 상대가 가지고 있었던 고통이 경감되고 줄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비로서 치유가 시작 되는 것 입니다.
( <특집>틱낫한 스님 방한 특집 대중강연 STOP AND HEAL 2부, 2013-05-18 불교TV)
틱낫한 스님이 영어로 이야기하고 혜민스님이 통역한 것이다. 그래서 혜민스님의 말을 녹취한 것이다.
스님은 플럼빌리지에서 이스라엘사람수행자들과 팔레스타인 수행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그런데 피해자라 볼 수 있는 팔레스타인 수행자가 가해자라 볼 수 있는 이스라엘수행자에게 오히려 “나와 똑같이 고통을 겪었구나”라고 생각하면 분노가 풀어 질 것이라 한다. 이렇게 “한 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치유가 된다고 한다.
경전에 나와 있는 말인데
이 대목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관찰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1)
상윳따니까야 둑가따경(Duggatasutta, 불행의 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 역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람이구나, 나와 똑 같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나와 똑같이 고통을 겪었구나”라고 관찰하라고 하였다. 부처님과 똑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왜 경전을 인용하지 않을까?
세계적인 불교지도자이자 살아 있는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틱낫한 스님이 한 말이나 부처님이 한 말이나 모두 똑같다. 이를 우연의 일치로 보아야 할까. 깨달은 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처님의 말과 동일한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스님이 말한 내용이 이미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스님의 말에 감동받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스님이 부처님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의 말을 인용하지 않았다. 세 편의 동영상 강연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어느 경전 어느 경에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다’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좀처럼 경전을 인용하여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만일 경전을 인용한다면 덜 깨달은 사람으로 오해 받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법문할 때 주로 자신의 이야기 위주로 풀어 나간다. 이는 깨달은 자는 모두 부처라는 대승불교의 독특한 불교관 때문이라 본다. 따라서 깨달은 자가 이야기 하면 부처가 이야기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본다.
틱낫한 스님은
틱낫한 스님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스님은 베트남에서 태어 났다. 그리고 4대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유명한 스님이라 하였다.
4대 생불은 누구일까? 궁금하여 구글 검색하여 보니 ‘달라이 라마’, ‘틱낫한’, ‘숭산선사’, ‘마하고사난다’라 한다. 부다피아 자료에 따르면 1996년 미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발간한 책에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 숭산선사는 입적하였기 때문에 생불이라 볼 수 없다. 마하고사난다스님은 틱낫한 스님과 함께 플럼빌리지 수행공동체를 이끄는 캄보디아 출신의 스님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두 분의 스님을 생불이라 말하고 있다.
틱낫한 스님의 소개에서 눈에 띠는 것은 베트남 임제종 출신이라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선맥과 같은 임제종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틱낫한 스님은 우리나라 조계종과 같은 종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이 가장 애독하는 경전이 ‘법화경’이라 한다. 그리고 ‘상즉종(相卽宗)’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상즉종은 영어로 ‘Order of Interbeing’라 한다. 여기서 인터비잉( Interbeing)이라는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로서 틱낫한 스님이 만들어낸 말이라 한다.
신조어 인터비잉(Interbeing)
인터비잉(Interbeing)은 무슨 뜻일까? 검색하여 보니 이도흠 교수의 논문이 눈에 띄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님의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은 스님이 창시하여 이끄는 불교를 상즉종(相卽宗, Order of Inter-being)이라 할 정도로 ‘서로 존재(inter-being)’라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침투하면서 다른 것들과 공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의미다.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까닭과 배울 점, 이도흠교수, 불교평론 2010-09-06)
틱낫한 스님이 만든 신조어 인터비잉(Interbeing)에 대하여 ‘서로 존재’로 해석하고 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에 있어서 ‘사사무애’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생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다.
스님의 인터비잉은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즉상입하여 서로가 서로를 창조한다는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스님의 상즉종은 대승불교의 법계연기를 기반으로 한 또하나의 종파를 만든 것이라 보여진다.
수행공동체 자두마을(플럼빌리지)
스님은 달라이라마와 함께 살아 있는 생불로도 유명하지만 세계적인 수행공동체 플럼빌리지 (Plum Village, 자두마을)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수행공동체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단풍림승원(Maple Forest Monastery)과 청산법원(Green Mountain Dharma Center), 녹야원 승원(Deer Park Monastery)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심지어 이스라엘에도 틱낫한 센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님은 어떻게 하여 프랑스에 세계적인 수행공동체 자두마을(플럼빌리지)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하여 약간은 비판적 시각이 있다.
이도흠 교수의 글에 따르면 “그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며, 다른 스님들이 소신공양을 하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갇힐 때 홀로 프랑스로 갔다.”라고 설명하였다.
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틱낫한이 남베트남의 반전운동을 확산시켜 남베트남을 패망시키는데 한 역할을 했고, 보트 피플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비판을 한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서 평화통일과 월맹을 옹호하고 티에우정권과 미국을 비난하던 경력으로 인해 혼자만 프랑스로 도망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월남이 패망하였을 때 남베트남에 남아 있던 다른 종교인들은 처형되었거나 수용소에 갇혔지만 틱낫한 스님이 프랑스로 망명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위빠사나와 선수행을 합쳐 놓은 듯한
살아 있는 생불로서의 틱낫한, 배신자로서의 틱낫한 이렇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틱낫한 스님이다. 그렇다면 스님의 사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이도흠 교수는 ‘지금 여기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한다. 스님은 임제종의 법맥을 잇고 있지만 수행방법은 빠알리경전에 입각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까야가따사띠경(몸에 대한 새김의 경, M119)과 마하사띠빳타나경(대념처경, D22)에 바탕을 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수행이라는 것이다.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이도흠 교수는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이도흠교수는 틱낫한 스님의 수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의 수행법은 몸과 마음 자체, 또 그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위빠사나 수행과 같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대상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는 점은 선과 같다.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까닭과 배울 점, 이도흠교수, 불교평론 2010-09-06)
스님의 수행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이면서도 선과 같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와 선수행을 합쳐 놓은 듯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움직임을 관찰하지만 결국 모든 대상과 하나로 되기 때문이라 한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마음챙김
틱낫한 스님은 영어로 법문할 때 마인드풀니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영어 마인드풀니스는 빠알리어 사띠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이를 통역한 혜민스님은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시종일관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이도흠교수도 그렇고, 불교계 신문 사이트에서도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두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영어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는 마인드(mind)와 풀(ful)의 합성어이다. 마인드는 ‘마음’이고, 풀은 ‘가득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단순하게 해석하면 ‘마음가득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명상, 주의깊음’으로 설명된다.
마인드풀니스에는 그 어디에도 사띠의 진정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띠는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라고 정의 되나 마인드풀니스에서는 기억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 단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는 것 이라 한다. 따라서 마인드풀니스의 번역어 마음챙김은 사띠의 원래 의미를 반영하고 있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나 기자들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틱낫한 스님이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라는 말은 모든 대상과 하나가 되는 선적 깨달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지금 여기’를 강조하며 멈춤과 치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 스님이 늘 하는 말이 영어로 ‘마인드풀니스’이다. 이를 우라나라에서는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초불연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를 보면 사띠에 대하여 모두 마음챙김으로 번역해 놓았다. 또 초불연의 각묵스님의 사띠설명에 따르면, 사띠가 수행의 용어로 쓰였을 경우 절대로 기억의 의미로 사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그래서 사띠는 마음을 해탈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와 같은 것이라고 운나바바라문경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의 마인드풀니스 설명에 따르면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위빠사나 수행과 같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대상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는 점은 선과 같다.”고 하였다.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선적 깨달음을 말한다. 화두가 타파 되었을 때 진여, 불성, 본마음, 참나와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학자, 기자, 번역자 들은 모두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분명한 사실은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마인드풀니스는 빠알리니까야의 사띠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MBSR에서도 마인드풀니스라 하는데, 철저하게 종교성을 배제한 용어를 사용한다. 단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는 수행기법만 적용한 것이다.
틱낫한 스님의 마인드플니스도 마찬가지이다. 수행기법만 가져 갔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사유하는 사띠라는 의미가 아니고 단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 차리는 수행기법만 가져 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인드풀니를 우리말로 옮겨 놓은 듯한 마음챙김을 빠알리니까야의 번역에 사용한다는 것은 ‘넌센스’라 본다.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Namo Avalokitesvara)
달라이라마와 함께 살아 있는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틱낫한 스님의 영상강연에서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본 틱낫한 스님의 특집프로 1편 ( <특집>틱낫한 스님 방한 특집 대중강연 STOP AND HEAL 1부, 불교tv 2013-05-18) 에서 본 관세음보살 정근 장면이다. 영어로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Namo Avalokitesvara)’라고 정근하는 장면이다.
아바로키테스바라 정근은 40여명의 플럼빌리지 법사단이 악기를 연주하며 합창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정근 하듯이 법사단이 독특한 운율로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하며 무려 20분간 정근 한다.
정근할 때 바이올린, 북, 첼로 등 다양한 악기가 동원된다. 그리고 정근이 무르익을수록 점차 점차 분위기가 성스런 분위기가 고조됨을 알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의 손동작
이때 전에 보지 못하던 광경을 보았다. 중앙에 앉아 있는 틱낫한 스님의 손동작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마치 부처님처럼 수인(手印)을 하였다. 법사단의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 정근이 무르익을수록 손가락 모양도 다양해진다. 그리고 분위기 맞추어 수인을 한 손이 움직인다. 마치 손을 이용하여 천천히 춤을 추는 것 같다. 그런 수인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틱낫한 스님의 수인(2013년 5월 13일 잠실체육관)
사진 : 불교tv사이트에서 디카로 촬영한 것임
스님의 수인을 보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하다. 법당에 가면 수인을 한 불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미타불 수인이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매우 이 다양한데, 스님이 취한 포즈를 보면 다음과 같은 아미타불 수인 중의 하나로 보인다.
아미타불 수인
틱낫한 스님의 마하무드라
불교tv에서 본 법사단의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 정근노래와 틱낫한 스님의 수인춤에 대하여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었다. 스님의 수인춤에 대한 것을 커트 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틱낫한 스님의 수인춤
출처: Lang Mai - Avalokiteśvara - Plum Village changting - summer2011
수인을 산스크리트어로 무드라(mudra)라고 한다. 무드라는 인계, 즉 손가락으로 맺은 표식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마하무드라는 밀교에서 표방하고 있는 네 가지 무드라 중의 하나로서 대인(大印)이라 한다.
감성에 호소하는 대승불교
플럼빌리지의 법사단의 관세음보살정근 노래와 틱낫한 스님의 마하무드라를 보면 대단히 의례적임을 알 수 있다. 이성 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듯 하다. 실제로 대승불교의 경우 테라와다와 비교하여 의례가 발달하였고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각각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라 본다.
열반을 지향하는 테라와다와 궁극적 실재와 합일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입장은 다르다. 대승불교는 감성에 호소 한다. 그러다 보니 북, 노래, 춤 등으로 신심과 환희을 고취하기도 한다. 또 스스로 체득이 안되니 불상, 조각, 탱화 등 시각적 형상에 호소 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테라와다의 경우 시각적, 청각적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때로 냉정하기 때문에 지혜롭지 않으면 법을 이해 할 수 없다. 그런 예를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대한 단속을 말씀 하셨다. 그 중에 시각능력과 관련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 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 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 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Adittapariyayasutta-연소의 법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단호하게 말씀 하신다. 인상과 속성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상(nimitta)’이란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총상(總相)’이라고도 한다. 한 번 흘낏 보았을 때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을 보았을 때 ‘여자다’ ‘남자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속성이란 손이나 발과 같이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細相)이라 한다. 예를 들어 ‘여자다’라고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난다음, 여자의 특정 신체부위에 대히여 부분적으로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상과 속성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순간포착인 것이다. 이를 ‘속행(速行)’ 또는 ‘자와나(javana)’라 한다. 따라서 수행자가 아름다움 때문에 정신-신체적 인상이나 속성에 매혹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혹 되는 그 순간에 타락해서 지옥에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지옥에 떨어지얼정 차라리 감각적인 시각기관을 작열하고 불꽃이 튀는 뜨거운 쇠바늘이 지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이성적인 테라와다불교
청각의 경우 쇠막대, 후각의 경우 손톱칼, 미각의 경우 면도칼, 촉각의 경우 날카로운 칼로 지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사유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비록 잠자는 것은 생명의 불임이라고 나는 말하고, 생명의 불결실이라고 나는 말하고, 생명의 몽매함이라고 나는 말하지만, 수행승들이여,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 사유에 사로 잡혀, 참모임의 화합을 파괴할 정도로 그처럼 사유속에서 사려하지 말라.( S35:235)”고 하였다. 망상과 희론에 사로 잡히느니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눈, 귀, 코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단속할 것을 말씀 하셨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반대로 여섯 가지 감각능력을 자극하는 것을 동원하여 깨달음의 방편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탱화 등 그림을 그린다든지, 북이나 노래 등으로 신심과 환희심을 고취하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대승불교는 감성적이고, 테라와다는 이성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의 비교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이 표는 2012년 6월 23일 테라와다불교 열린법석에서 마성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것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테라와다와 대승의 비교표
구분 |
테라와다 불교 |
대승불교 |
개인과 대중 |
-개인의 도
-개인적인 문제에만 초점
(상구보리) |
-대중의 도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것
(하화중생) |
분석과 직관 |
-분석적 방법
-교리를 숫자로 표현하여 분석적 |
-직관적 방법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
의식과 무의식 |
-심의식 차이가 없음
-의식을 중요시
-사유, 생각에 초점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하는 것
-신구의 3업 알아차림 강조 |
-내마음은 내마음대로 안되는 것
-식을 6,7,8식으로 나눔
-심층 무의식을 중시
-무의식이 나를 지배 |
아라한과 보살 |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라한 |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 |
이성과 감성 |
-이성에 호소
-논리적, 합리적, 때로 냉정
-지혜롭지 못하면 법을 이해못함(와서보라!)
-법을 알아차려 스스로 체득 |
-감성에 호소
-북, 노래, 춤 등으로 신심과 환희 고취
-스스로 체득 안되니 불상, 조각, 탱화 등 감성에 호소 하는 방식 활용 |
틱낫한 스님에 대하여 몰랐던 것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생불이라는 칭호까지 부여 받는 경우도 있다. 달라이라마 존자와 틱낫한 스님이다. 달라이라마존자는 아직 까지 정치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한 번도 우리나라에 오지 못하였지만 틱낫한 스님은 두 번 방문 하였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나마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승불교권의 스님이어서일까 좀처럼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 하지 않는 것 같다. 분명히 경전에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대승불교권에서 깨달은 자는 모두 부처이고, 그래서 깨달은 자가 말하면 부처가 말한 것과 같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 몰랐던 사항은 틱낫한 스님의 수행방법이다. 비록 논문을 통하여 확인 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스님의 수행법은 대승과 테라와다의 ‘혼합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빠알리니까에서는 ‘수행기법’만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우리 앞에 닥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현재를 살아간다.”라고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라는 말도 빠알리니까야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M131)”라고 이미 실려 있는 말이다.
틱낫한 스님이 지금 여기를 강조하며 마인드풀니스를 이야기 하지만 이는 빠알리니까야에 있는 수행기법 전체를 적용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알아차리는 일부분만 가져 온 것이다. 더구나 지금 여기를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선적 수행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스님의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학자나 기자나 번역자들은 ‘마음챙김’이라 한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의 말한 사띠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MBSR을 창시한 존 카밧진 교수나 상즉종의 틱낫한 스님이 마인드풀니스를 강조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단지 지금 여기서 라는 수행기법만 가져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드풀니스의 영어사전적 번역에 지나지 않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빠알리니까야에 번역에 적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보여진다.
“당신은 부처가 아닙니까?”
이번 틱낫한 스님의 방한을 계기로 몰랐던 사항을 안 것 중의 하나가 스님의 수인이다. 법사단의 아바로키테스바라 노래에 따라 스님의 손이 춤을 추듯이 천천히 움직이었는데, 이는 아미타부처님의 수인과 너무나 흡사 하다. 전세계인이 스님을 생불로 추앙해서일까 그 순간 만큼은 마치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스님들에게서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이고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엄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도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틱낫한 스님에게“깨달음에 이르렀느냐” “부처에 오른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본래성불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고 한다.
“당신은 부처가 아닙니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