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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과 <돈키호테>
교산(蛟山) 허균(許筠)이 태어났던 생가 애일당(愛日堂)은 이제 흔적도 없고, 대숲으로 변한 빈터에 해풍만 쓸쓸한데, 멀리 동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그 자리에는 1983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와 양천 허씨(陽川許氏) 문중에서 세운 교산시비만 가끔 찾는 이들을 반긴다.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홍길동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홍길동전>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과정과 더불어 작가 허균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직도 드문 듯하다. 더군다나 허균이 유학(儒學)으로 입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차(茶)와 선(禪)에 깊이 통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매우 드물 것이다.
교산 허균은 선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불상을 모시고 불경을 외며 부처를 공경한다는 탄핵을 받아 간신히 얻은 벼슬인 삼척부사 자리에서 겨우 13일 만에 파면당하기도 했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제도와 관습에 용감히 도전한 쾌남아요 민중의 영웅이었다. 이 실존인물 홍길동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재창조한 허균은 조선왕조시대를 반항으로 살다간 풍운아요, 누구보다도 풍류의 멋을 깊이 깨달았던 풍류명인이기도 했다. 왕조사의 역적으로 몰려 역사의 무덤에 깊이 묻혀버렸던 이단자 허균이 시대를 앞서간 선구적 혁명가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불후의 걸작 <홍길동전> 덕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홍길동전>은 시대를 앞서갔던 조선왕조의 풍운아 허균이 지은 한글소설이다.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허균의 <홍길동전>은 몇 가지 기록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이다. 둘째, 조선왕조의 병폐의 하나였던 서얼문제를 소재로 삼은 최초의 사회소설이었다. 셋째, 주인공 홍길동이 의적이라는 점에서 반골소설이다. 넷째, 홍길동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실존인물이라는 점에서 실명소설이다. 다섯째, 주인공을 전설적인 민중의 영웅으로 만든 영웅소설이다. 여섯째, 홍길동이 갖가지 도술을 부리는 도가소설이기도 하다. 현대문으로 풀이한 <홍길동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 조선국 세종 시절에 한 재상이 있었는데 성은 홍(洪)이요 이름은 아무개였다. 명문거족으로 소년에 등과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니 인품이 조야의 으뜸이요, 충효 겸비하여 이름이 나라 안에 널리 떨쳤다. 일찍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한 아들은 이름이 인형이니 정실 유씨의 소생이요, 한 아들은 이름이 길동(吉童)인데 몸종 춘섬의 소생이다. -
이어서 소설은 길동이 서자로 태어나게 된 전말을 그려 보인다. 홍 판서가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용꿈을 꾸고 귀한 자식을 낳을 태몽이라 여겨 내실에 들어가 부인과 ‘일’을 치르려 하지만 부인은 체통 없는 짓이라며 거절한다. 이에 화가 난 홍 판서가 방년 18세인 몸종 춘섬과 관계를 가져 마침내 길동을 낳으니 아이의 기골이 비범해서 영웅호걸의 기상이었다. 길동이 어느덧 여덟 살이 되었는데 총명이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천한 첩의 자식이라 열 살이 넘도록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종들도 천대하는 것이 사무치는 한이 되었다.
홍 판서에게는 또 다른 첩 초란이 있었는데 춘섬과 길동 모자를 미워하여 죽일 흉계를 꾸민다. 초란의 사주를 받은 관상쟁이가 홍 판서에게 말했다. “공자의 상을 보니 마음속에 조화가 끝이 없고 미간에 산천의 정기가 영롱하게 어렸으니 장차 제왕이 될 기상입니다. 그래서 장성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니 잘 생각하십시오.” 그 말을 들은 홍 판서는 길동을 산중에 머물게 하고 엄중히 감시토록 한다. 길동이 육도삼략과 천문지리를 공부하는 것을 안 홍 판서의 근심은 더해 가는데, 초란은 특재라는 자객을 시켜 길동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특재는 길동의 손에 죽고 초란은 홍 판서에 의해 쫓겨난다.
결국 부모를 하직하고 집을 떠난 길동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도둑의 소굴로 찾아들어 두목이 된다. 수천 명 도둑의 우두머리가 된 그는 무리를 활빈당이라 하고, 온갖 지모와 도술과 둔갑술을 써서 합천 해인사와 함경도 감영을 터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 팔도를 휩쓸며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의롭지 못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 의적활동을 벌인다. 길동은 어느 날 부하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한다.
- “이제 우리가 합천 해인사에 가서 재물을 탈취하고, 또 함경감영에 가서 전곡을 도적질해 소문이 파다하게 날 터이고, 내 이름을 써서 감영에 붙였으니 오래지 않아 잡히기 쉬울 것이라, 너희들은 나의 재주를 보라.” 하고 즉시 짚으로 된 인형 일곱 개를 만들어 주문을 외고 혼백을 붙이니 일곱 명의 길동이 일시에 팔을 휘둘러 기운을 자랑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고 한 곳에 모여 어지럽게 장난치니 어느 것이 진짜 길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팔도에 하나씩 흩어지되 각각 수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다니니, 그 중에서도 진짜 길동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렇게 도술을 부리며 의적활동을 하던 홍길동은 자신을 잡으러 나선 포도대장까지 사로잡았다가 놓아주기도 한다. 결국 홍길동의 정체는 전임 판서 홍 아무개의 서자요 병조좌랑 홍인형의 배다른 아우라는 사실이 밝혀져 그들은 의금부에 갇히게 된다. 인형은 임금에게 길동을 잡겠다는 약조를 하고 경상감사가 되어 곳곳에 방을 붙인 결과 마침내 길동으로 하여금 자수토록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노릇인가. 그런 식으로 각도에서 잡혀 올라온 홍길동이 여덟 명이나 되는 것이었다. 결국 홍 판서의 하소연에 진짜 길동이 나서서 임금에게 이렇게 말한다.
- “소신의 아비가 나라에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소신이 어찌 감히 불칙한 짓을 하겠나이까. 다만 소신은 본래 천한 노비의 몸에서 났으므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었기에 집을 버리고 도적의 무리에 참여했으나, 백성은 조금도 해치지 않고 각 고을의 수령이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빼돌린 재물만을 갈취했지만, 이제 십 년이 지나면 조선 땅을 떠나 갈 곳이 있으니 엎드려 비옵건대 임금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고 소신을 잡으라는 명령을 거둬주소서!”
하고 말을 마치자 여덟 길동이 동시에 넘어지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 짚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임금이 더욱 놀라 진짜 길동을 잡으라고 다시 팔도에 명령을 내렸다. -
한편, 길동은 그렇게 조정을 우롱하고 사라졌다가 ‘병조판서를 한 번 시켜주면 조선 땅을 떠나겠다’는 소원을 들어주자 마침내 조선을 떠나 중국 남경을 거쳐 남해 율도국(聿島國)으로 들어가 5만 군사로 그곳을 점령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이상국 율도국의 임금이 된 홍길동은 3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홀연히 병을 얻어 7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홍길동전>의 줄거리이다.
허균은 선조 2년(1569)에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에 있던 외가에서 초당(草堂) 허엽(許燁)과 강릉 김씨(江陵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단보(端甫), 자호 교산은 출생지인 강릉 사천에 있는 산 이름에서 딴 것이다. 그의 부친 허엽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서 명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 대사헌 ․ 승지 ․ 부제학 등을 지낸 문인 ․ 학자 ․ 정치가였다.
허엽에게는 아들 셋, 딸 둘이 있었다. 맏딸과 맏아들 성(筬)은 전실 소생이요, 둘째아들 허봉(崶)과 막내딸 초희(楚姬)와 막내아들 균은 후실 소생이었다. 허균의 누나 초희가 바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이들 일가는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유례없는 명문장 가문이었다. 난설헌의 주옥같은 시와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은 오로지 남동생 허균 덕분이었다. 허균은 난설헌이 28세 한창 나이로 죽은 2년 뒤 <난설헌집>을 편찬한데에 이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藩)에게 이를 주어 중국에서 출간하게 되었고, 일본에서도 출판되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베스트셀러 시집이 되었던 것이다. 허균은 한 번 보거나 읽은 것은 잊는 법이 없어서 누나의 시집과 작은형의 문집은 물론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 등을 모두 자신의 비상하게 뛰어난 천재적 기억력에 의지해 엮어냈다.
허균은 5세 때부터 형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익히고 9세 때부터 시를 지을 만큼 재주가 비상했다. 그는 13세에 부친을 잃고 어머니와 작은누나와 함께 서울에서 살면서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시는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작은형의 친구로서 천재시인이었지만 모친이 천한 종인 양반의 서자, 즉 서얼이었으므로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불운한 처지였다. 허균이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간 것은 선조 27년(1594). 그러나 재주가 뛰어나고 자존심이 강하니 소인배의 시기와 모략이 끊임없었다. 그는 현실과 타협하기보다 불화를 택했다. 파면과 사직을 거듭하다가 벼슬살이 8년 만에 정삼품 당상관인 사복시정에 올랐으나 또다시 파직당해 산수 간을 넘나들며 풍류를 즐겼다.
허균은 포부는 컸으나 뜻대로 펼칠 수 없었고, 재주는 인정하나 사람됨을 알아주지 않는 관료사회의 편협함에 염증을 느꼈다. 자신이 세상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다고 여긴 그는 강호를 떠돌면서 재주는 있으나 불우한 서얼 등 처지가 불우한 벗들과 즐겨 사귀었다. 조선왕조시대에는 아비가 양반이라도 첩의 소생이면 벼슬길을 막는 서얼금고제도가 있었다. 나라는 비좁고 인구는 많은데 아무리 경천위지의 재주가 있어도 첩의 자식은 홍길동처럼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도 못했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했다. 허균의 스승 이달도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었으나 서얼이란 태생적 한계 때문에 평생을 술과 방랑으로 불행하게 보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비롯한 저작을 통해, 또는 벼슬길에서 이들의 편을 들어준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뒷날 허균은 ‘유재론’을 통해 적자와 서자 차별대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인도적 실리적 차원에서 서얼금고제도의 철폐를 이렇게 주장했다.
- 사람의 재주와 능력은 하늘이 준 것이므로 귀한 집 자식이라고 많이 주는 것도, 천한 집 자식이라고 적게 주는 것도 아니다. -
그는 또 ‘호민론’에서 이렇게 외쳤다.
-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백성이다. 정치가들은 백성을 물이나 불, 범처럼 두려워해야 하는데 제멋대로 학대하고 긁어가고 부려먹기만 한다! -
선조 36년(1604)에 황해도 수안군수로 나갔다가 1년 만에 쫓겨난 그는 3년 뒤에 부임한 삼척부사 자리에선 겨우 13일 만에 쫓겨났다. 재주가 빼어난 만큼 시기도 많이 당했고, 남의 시선을 꺼리지 않고 소신껏 행동했으므로 순탄한 벼슬길은 아예 기대할 수도 없었다. 세상과의 불화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찮은 일들을 가지고 소인배가 모략을 일삼는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따르라. 나는 내 뜻대로 인생을 살겠다.” 그는 유, 불 , 선 삼교에 통달했지만 그 어느 것에도 억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말도 했다. “성욕과 식욕은 하늘이 준 인간의 본성이므로 유교나 불교의 계율로도 속박할 수 없다. 나는 성인(聖人)의 가르침보다도 하늘을 따르겠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새 정권에 끈이 없는 허균은 다시 벼슬이 떨어졌다. 또 2년 뒤에는 과거시험관으로 복직했지만 조카와 제자들을 부정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그 이듬해 1월부터 11월까지 전라도 함열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귀양이 풀리자 그는 부안으로 들어가 기생 매창(梅窓), 중 해안(海眼) 등과 더불어 변산 채석강 적벽강 내소사 개암사 직소폭포 등 명승절경들을 찾아다니며 풍류를 즐겼다. 그가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선계폭포 아래 정사암에 은거하며 <홍길동전>을 지은 것도 그 무렵, 1612년 12월부터로 추정된다. 또 허균이 썩어빠진 세상을 둘러엎고 새 세상을 만들고자 혁명의 꿈을 키운 것도 그 무렵으로 추정된다.
허균은 당대에 시인으로 문명을 떨쳐 시는 1천 500수나 지은 반면, 소설은 6편에 불과하다. 허균은 소설은 괴담이라고 천시하고 공맹(孔孟)의 가르침만이 참된 도리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소설을 즐겨 썼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언문, 상놈의 글자라고 천대받던 서민대중의 글자 한글로 소설을 쓴 선구자였다.
<홍길동전>이야 말로 민중의 힘으로 부패한 정치,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고 이상국을 세우려는 허균의 원대한 의지가 집약된 걸작이었다. 현세의 홍길동, 현실의 활빈당 행수였던 허균은 원민들을 모아 자신의 활빈도를 만들려다가 귀양살이를 했고, 귀양이 풀리자 적극적으로 현실과 부닥쳐 타협 아닌 적극적인 대결을 벌이려고 했다. 그가 당시 실권자였던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의 힘을 빌려 광해군의 조정에 들어가 좌승지 형조판서를 거쳐 정이품 좌참찬까지 오른 것은 오로지 광해군의 그늘에 들어가 이이첨을 방패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광해군 9년(1617) 허균의 역모를 고발하는 비밀상소가 연거푸 세 차례나 올라갔다. 이는 이이첨이 허균의 세력이 커져 자신의 강력한 정적이 되기 전에 미리 싹을 자라버리려는 음모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허균은 그렇게 하여 의금부 옥에 갇혔고, 이이첨이 허균을 빨리 처형해야 한다고 광해군에게 압력을 넣음에 따라 그는 광해군 10년 8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해 그의 나이 50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백성이 주인이 된 새 세상이 되자 역사의 무덤에 깊이 잠들어 있던 풍운아 허균, 미완의 혁명가 허균은 민중의 영웅 홍길동과 더불어 국문학사의 선구자로서 화려하게 부활했던 것이다. 그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수정산 기슭 부친과 형들의 묘 사이에 있는데 시신이 없는 빈 봉분뿐이니, 이는 그가 왕조사의 역적으로 능지처참 당했기 때문이다.
국문학사를 빛낸 허균의 <홍길동전>과 세계문학사상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비교해 보자. 세계문학사를 빛낸 걸작 명작 가운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있고, 괴테의 <파우스트>도 있지만 나 개인은 <돈키호테>를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란 인간상을 창조한 지 400년이 지났지만, 돈키호테의 매력은 햄릿과 더불어 결코 늙는 법이 없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돈키호테는 무모한 사람, 저돌적인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등의 대명사처럼 굳어졌지만, 정작 그의 매력은 다른 데에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 그지없이 고상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심미적 태도, 비록 언행언동은 참을 수 없이 우스꽝스럽지만 사물에 대한 단순명쾌한 대응자세 등이 그의 매력인 것이다.
스페인의 국민문학에서 세계문학의 최고봉으로 우뚝 선 <돈키호테>의 출판 400주년을 맞아 세계적으로 다양하고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진 것을 보고 소설가의 한 사람으로서 축하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훌륭한 문학작품이 없는가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홍길동전>이었다. <홍길동전>은 우리 고전소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조선왕조의 풍운아요 이단자인 허균이 지었다.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이란 점, 조선왕조의 병폐 중 하나였던 서얼문제를 소재로 삼은 사회소설이란 점, 홍길동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실존인물인 실명소설이란 점, 그리고 영웅소설이란 점 등 몇 가지 기록과 특징을 지닌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제도와 관습에 용감히 도전한 쾌남아요 서민의 영웅이었다. 왕조사의 역적으로 처형당해 역사의 무덤에 깊이 묻혀버렸던 허균이 선구적 혁명가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홍길동전> 덕분이었다.
<홍길동전>은 백성의 힘으로 부패한 정치,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고 이상국을 세우려는 허균의 원대한 의지가 집약된 걸작이다. 현세의 홍길동, 현실의 활빈당(活貧黨) 행수(行首)였던 허균은 원민(怨民)들을 모아 자신의 활빈도를 만들려다가 귀양살이를 했고, 귀양이 풀리자 적극적으로 현실과 부닥쳐 타협 아닌 대결을 벌이려고 했다.
하지만 허균은 역모죄로 광해군 10년(1618)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해 그의 나이 50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 왕조시대가 끝나고 백성이 주인이 된 새 세상이 되자 역사의 무덤에 깊이 잠들어 있던 풍운아 허균, 미완의 혁명가 허균은 서민대중의 영웅 홍길동과 더불어 국문학사의 선구자로서 화려하게 부활했던 것이다.
마침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것도 <돈키호테>가 나온 시기와 비슷한 400여 년 전이었다. 필자가 여러 사료를 분석 ․ 검토해본 결과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것은 그가 함열에서 귀양살이를 마친 직후 부안 변산에서 은거하던 광해군 4년(1612)께로 추정된다.
<홍길동전>과 <돈키호테>는 어떤 점이 닮았고, 어떤 면이 다른가. 홍길동은 시대를 앞서간 의적이고, 돈키호테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력기사다. 그러나 이 두 주인공은 불의와 폭력을 응징하고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 싸우는 데는 형제처럼 닮았다. 다만 홍길동이 통쾌무비의 도술로써 탐관오리들을 징치하는 점에 반해 돈키호테의 무술실력은 언제나 비극적 결말로 끝난 희극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출중한 인물과 탁월한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법이다. 그것이 또한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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