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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규에게
상규야, 이제 가을이 깊어가는 모양이다.
너한테도 편지 써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너랑도 더 깊이 만날 기회를 못 만들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추석 전에 동창 홈피에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올려놓았더구나. 배경음악도 상당히 괜찮더라. 그것을 겨우 며칠 전에야 알았어요. 내가 요즘 번역한다고 별로 신경을 못 쓰고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를 두고, ‘남들이 안 가는 길로 간다’는 뜻으로 해 놓은 말도 있더군. 그건 니 말이 맞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아마도 나의 신체적인 결함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에도 많은 사람들이 항상 나를 무시하곤 했으니깐. 그래서 나는 참된 것, 더 깊은 것, 뭐 그런 것을 찾게 된 것 아니었나 싶다.
여기서 그 얘기를 좀 해도 되려나 모르겠네. 우리가 2학년 때 같은 책상에 앉았던가? 새삼 아련하다. 그때 기억에 남는 일 하나가 있다. 내가 옆줄에 앉은 보석이랑 ‘신’에 대해서 막 논쟁하고 있을 때, 니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면서 “니도 그런 거 하나?” 그랬지? 그 당시 나의 논점은, ‘죄 없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 분명히 신은 없다’는 것이었는데, 좀 유치한 발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고등학교 때부터, 아니 중학교 때부터 나는 삶의 주된 흐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좀 친 모양이다. 보이는 것만이 아닌, 보다 참된 것을 찾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려면 반드시 문과반으로 갔어야 말이 맞지. 그런데 어떻게 재수까지 했으면서도 그것을 못 바꾸고 그대로 공대를 들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도 서울서 재수했으면서 왜 다시 지방으로 내려 왔을까? 참. 나. 주위의 압력 때문이었겠지. ‘부산공대만 들어가면 평생 굶을 걱정은 없다’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때 나는 전혀 진지하지 못했다. 등록금 싼 곳이 먼저였으니까. 그렇다고 서울에 있는 국립은 꿈도 못 꾸었고.
그렇게 시작된 대학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있었겠냐? 더구나 우리 동기가 100 명도 넘게 부산대로 갔다고 했으니, 그냥 고등학교 연장일 뿐이었지. 공대 수업도 고등학교 때랑 꼭 같아서, 매일 8교시까지 다 찼었고, 토요일 오전 네 시간도 ‘공업제도’인가 하는 거, 공고 아이들 하는 거 그런 것까지 다 해야 했으니. 그런 날 나는 공대 제도관 화장실에 가서 거울 보면서, “야, 김기호, 너 이거 할라고, 재수까지 했냐?”고 물어보곤 했었다.
그래 학과 전공에는 전혀 관심도 못 두고, 영화연구회라는 동아리에만 파묻혀 살았다. 학사경고에 경고를 맞아가면서 겨우 제적은 안 당하고 살았지. 그렇게 뻣대다가 자퇴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으나, 아버지 반대로 해서, 도망치듯이 군대 갈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대학 4학년 때 가게 되었는데, 그 사연도 참 많다. 논산 훈련소에서 인철이 만난 일도 생각나네. 또 누군가 그런 말을 하더라. “너를 왜 군대 보내냐?”고. 그런 와중에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사람의 책을 읽었던 거지.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라는 책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한 30년 되어가네. 다른 얘기들은 내가 번역한 크리슈나무르티 책 역자후기에 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여기 홈피 게시판에 올려놓은 것도 있으니 한번 읽어봐라.
군대 마치고 복학, 85년 여름 졸업 후 바로 상경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그것도 평생 책과 가까이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최소한 내가 살아온 길, 그 인생 정도는 글로 써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때 대학, 대학원은 이미 교육기관이 아니었어요. 기업화가 진행된 거였지. 거기서 학과 조교까지도 했었는데, 조교는 교수 밥이더라고. 그 부패와 그 타락들은 일일이 말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1987년 봄에 급기야 어렵게 진학한 대학원도 휴학 아니 할 수가 없었지. 자퇴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까지의 내 자서전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해 4월에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사람의 의미를 확실히 알게 해 주는 일이 있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죽기 전에 얘기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때 이후로 내 삶이 점점 바뀌기 시작한 거다.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사람의 의미는, 2500년만에 고타마 싯타르타와 꼭 같은 사람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신 거거든. 이게 이렇다는 것은 이미 서양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다 인정된 일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종교계 있는 사람들이나, 그나마 지성적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에요. 다만 종교 권력 쪽에서는 극력 방어하려고 하겠지. 이게 퍼지면 자기들 사업이 안 되는 거니까 말이다. 종교는 사업이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겠냐? 행여 너는 절대로 그런 말들 듣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이후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지. 또한 대학이나 교수들에게 복종하는 한, ‘김기호의 인생은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더군. 그것이 지금은 ‘사회가 흐르는 대로 살아서는, 김기호 인생은 없다’고 말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대학에서 살아남아야 하겠기에, 최대한으로 참고 살았다. 그런데도 그 길이 안 보였어요. 교수라는 인간들이 너무도 꽉 막혀 있어서 말이다. 우리 친구들도 교수가 된 사람들 여러 명 있지만, 그 친구들도 참 많이 가슴 아파하고 있을 거다. 대학 교수라고 행복한 게 아니거든.
그런 와중에 겨우 강사 자리 하나 얻어서, 대학 강단에서 강의가 시작되었지. 그게 1993년의 일인가 보다. 그때로부터 마산의 경남대까지, 전국의 여러 개 대학에서 강의를 했어요. 우리가 이름도 못 들어본 대학에서도 강의하곤 했다. 그렇게 10년 세월을 보내고 나서, 결국은 시집에다가 양심선언을 하게 된 거다. 그 시집은 1997년 동민이와 승동이 형준이 출판하게 해 준 거였다. 그런데 양심선언 후에 외대에서 연락이 왔어요. 교양부에서 크리슈나무르티 관련 강의를 하는 전임교수로 일하라고 말이다. 그 의미는 실로 엄청난 것이거든. 그때 외대 교수로 있던 마고 선배님 한 분께서, 크리슈나무르티의 의미를 알고 계신 것이었어요.
그것은 당시 외대 이사장 결재까지 난 것이었고, 이제 98년 3월 임명장 받고 정식 교수가 되어서 강의할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새해 벽두부터 외대 파벌 싸움이 일어나서 결국 이사장이 바뀌고, 총장도 바뀌었어. 그리고 이전 결재 사항은 무시하게 된 거지. 그때부터는 이제 나는 외대 파벌로부터 죽일 놈으로 된 거야. 적반하장이지. 당시 관선 이사장 변형윤 선생에게, 내용증명으로 보낸 서신마저 전하지도 않고 속이고 있었고, 하여간 이 얘기들도 여기서 다 못한다. 결국은 낙향까지 하게 된 것이고, 그로부터 또 10 년이 흘렀네. 각설하고.
나는 93년도부터 대학 강의에서 내가 맡고 있는 과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조금씩의 시간을 내어서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소개해 왔고, 98년도부터는 강좌명과는 무관하게, 완전히 그 강의만 했다. 그것도 학교 당국의 묵인 하에, 자신들이 해 놓은 짓이 있으니깐. 하여간 당당히 강의계획서까지 내 걸고 했으니. 그래 그 강의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여러 명 된다. 물론 다른 학교에서도 그 강의 내용의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 그 아이들 가운데에는 마고 후배도 있다. 한 20년 더 지나 봐라. 그가 누구인지 너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겨우 나 정도의 사람이 소개해 주는 그런 강의에서도 아이들이 태어나더라니깐! 그 동안의 성과들은 국가 기관에 보고도 해 놨고, 우리 사회 지성이신 몇 분에게도 보고해 드렸다.
그 과정에서 영국 재단과 연결도 되고, 국제 크리슈나무르티 위원회 아시아 모임 참석차 2003년에는 태국에도 다녀왔다. 그리하여 지금은 크리슈나무르티 관계로 세계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 이게 퍼져가는 일에 대해서, 한국에서보다는 그쪽에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더라. 누군가는 더 이상 엇길로 나가지 말고 제대로 잘 걸어가라는 눈치도 주더군. 양심선언을 1997년에 했는데, 그 동안 내가 당한 핍박은 참 지독했다. 결국은 이렇게 교수는커녕 강사 자리도 다 잘리고, 천하백수의 처지로 되었네.
어쨌거나 나는 크리슈나무르티를 한국 사회에 연착륙시키려고 한 것뿐이다. 지금 번역하는 것도 그런 의미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게 조금씩 소문이 났나 봐. 그것으로 알게 모르게 내가 위험인물이 되어 있는 것이지. 심지어는 수강하는 여학생들의 ‘미인계’까지 신경 쓰고 살았으니. 정말 예쁜 애도 있었는데, 거기서 한번만 잘못 되었어 봐라. 난 그 길로 영영 사꾸라 되는 거였고, 매장 되는 거였다. 그거 아니라도 지금 아주 생매장이 되어 있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애들 이름은 못 밝힌다. 더 자세히 얘기하면, 그들은 증거대라고 나오겠지. 그렇게 되면 그 아이들은 또 뭐가 되냐? 그나마 이제는 대학 강사도 아니니 뭐.. 하여간 그래저래 이렇게 살게 되는 거다.
그런데 편지 너무 길면 안 읽을 거지? 이만 줄일란다. 다음에 또 편지 쓸 기회가 있을까? 아니면 번역 좀 미루고 내 하고픈 얘기를 좀 더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드네. 저번에 원국이 사부곡도 올라온 적이 있긴 있지만, 이 일은 사람들 많이 관심 있는 일이 아니라서 말이다.
하여간 조만간 또 보자. 밤이 깊었네. 항상 건강 유의하기 바란다.
2007. 10. 16. 새벽
마산에서 기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