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법 개정에 대한 종교계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는 와중에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수뇌진들이 연일 대정부 공세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역시 제 아무리 성직자들일지라도 자신들과 이해관계에 얽히게 되면 인간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 올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대교구, 대전교구등 학교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가톨릭 교구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대정부 투쟁을 부추기고 있는데, 대체 저들이 과연 신의 대리자가 맞긴 맞나 싶다. 가톨릭 신자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내가 믿는 하느님과 저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과연 다른 존재일 것이라는 생각만 든다.
사학법 개정에 가톨릭이 가장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이유는 그 어떤 학교법인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일례로 대구대교구의 학교법인인 선목학교법인에서 운영하는 현황을 보면 쉽게 알수 있다.
선목학교법인 산하에 유치원이 26개, 초등학교 1개, 중학교 8개, 고등학교 9개, 대학교가 6개(이건 대구대교구 홈피에 근거)다. 여기에서 대학교 6개는 사실 대구가톨릭대에 소속된 단과대학들을 캠퍼스별로 구분한 것이라서 실제 대학수는 1개임.
여기에서 아무런 선입견없이 본다면, 하나님의 어린 양들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들 하기 쉬운데, 실상 이것도 양파의 껍질을 까듯이 조그만 까면 그 허상을 알게 된다.
대구대교구청에서 직접 투자를 해서 설립한 학교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 대구대교구 소속 신부들이 사재를 털어서 설립하거나 혹은 외국선교단체에서 설립하거나 또는 가톨릭 신자가 설립하여 대구대교구청에 학교운영을 넘겨준 경우이다.
대표적인 예로 대구가톨릭대학인데, 이 대학의 전신은 효성여자대학교로서 이 학교의 설립자는 전석재 신부였다. 이 양반이 누구냐면 김수환추기경이 일본군복을 입고 함께 찍은 사진의 주인공이라는 설이 많다(이건 내가 확인할 길이 없으니 장담은 못합니다만, 넷상에서 그런 걸로 보여짐).
효성여대가 1952년 전석재 신부에 의해서 설립된 이래 이 양반이 40년 가까이 학장과 총장 자리에 있었다. 1988년부터 전석재총장 퇴진운동이 이 대학에서 벌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로 인하여 총장자리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교주가 물러난들 달라질 일이 있을까. 이후로 효성여대는 형식상 교구청 산하 교육기관에서 실질적인 교육기관으로 된 것이다.
대구대교구청에서 직접적인 교육투자를 통해 설립한 학교는 몇 손가락 꼽을 정도이다. 각 교구에서 직접저인 투자를 통해 설립한 학교가 그다지 많지 않으면서도 저토록 많은 학교를 거느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종교가 가지는 특성때문이다.
결국 각 학교의 설립자나 단체는 가톨릭이라는 동일한 정체성과 종교적 신앙심에 근거하여 교구청에 헌납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서울대교구든 대구대교구든 헌납이나 기증받은 학교를 자신들이 설립한 것처럼 행세하고 한 걸음 더나아가 사유재산 운운하면서 사학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개방형 이사제를 거부하는 논리 자체가 하늘 우러러 너무도 부끄러움이 많은 짓이다는 것이다.
현재 사학법개정에 반발하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과연 성직자인지를 되묻지 않을수 없다. 진정 이들이 하느님의 대리자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를 말이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인지만, 회의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이다.
사실 가톨릭의 수뇌부들이 연일 대정부 공세를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기개는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유신정권과 신군부정권하에서 지금과 같은 기개를 왜 보여주지 못했는지 의아하기 그지없다.
수많은 이들이 권력에 의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심지어는 목숨마저 잃어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때 우리 잘나신 가톨릭의 수뇌부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침묵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핍박받는 어린양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신부들의 현실참여를 끝임없이 방해하고 이들을 차별적 대우를 함으로써 좌절을 겪게 만든 한국의 가톨릭 주교단들과 이들에 빌붙은 상처받은 영혼의 신부들이 색깔론을 들먹거리면서 사학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방방뜨는 꼴락지가 엿겨움만 더할 뿐이다.
황교수건이 문제가 되는 연구의 투명성과 정당성이 담보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처럼 사학법개정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사학재단의 운영의 투명성과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엠비씨 PD수첩에 의해서 문제가 불거졌을때 초기에 진화하지 못한 것은 바로 황교수의 연구절차상의 문제와 조작이 내재되어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학재단의 운영상의 투명성과 정당성이 담보되어 있다면, 개방형 이사제를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결국 구린내가 진동하고 있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진정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성직자라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당당해야 하고 투명해야 하는 것이다.
오랜세월동안 폐쇄적인 학교법인 운영의 방식에서 탈피하는 것이 두려운 것을 왜 전교조를 끌어들여서 학교운영의 파행 운운하는 것 자체가 저 높은 곳 에 계시는 하느님도 웃을 일이다. 지금의 가톨릭 수뇌부들의 행태를 보면 과거 중세 로마교황청에 하느님의 대리인인 성직자가 아닌 권력자로서의 성직자들의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모습들과 오버랩되는 것이 과연 오바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의 가톨릭의 수뇌부들 그리고 여타 종교단체들의 뻘짓은 종교적 역할을 망각한 탐욕과 교만에 가득찬 인간들의 군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정교가 분리된 사회에서 종교의 원칙은 사회의 원칙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요즘 들어서 드는 생각은 참 우리 사회가 단일종교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라는 것이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불교든 현 시대의 종교집단의 수뇌부층은 성직자가 아니라 탐욕과 교만에 가득찬 위선자들이다. 위선에다가 교만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우리 사회가 다종교 사회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시 내 의지에 관계없이 태어나 얼마되지 않아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머리가 좀 굵어지면서 그나마 내 마음의 안식처로서 그리고 온갖 위선과 거짓된 삶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종교로서 내게 다가오기에 지금까지 계속 얼뜨기 가톨릭 신자로 살고 있다.
진정 낮은 곳으로 임해야 하고 이 사회의 가진 자들이 아닌 소외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하고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천명으로 여겨야 할 성직자들 특히 고위직에 있는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탐욕과 교만함이 넘쳐나는 한, 결코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존경했고 돌아가신 아버지 다음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세상을 보는 눈을 깨우쳐 주신 신부님의 말씀이 떠 오른다. 그 신부님 왈 "토마스, 사람이 죽어서 천국으로 들어감에 있어서 낙타가 바늘구멍보다 더 힘든 종자들이 누군지 아니"하면서 "그건 말야 바로 성직자라는 인간"이다. "
"성직자의 길로 들어선 순간부터 천국의 문은 바늘구멍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렇기에 성직자는 바늘구멍과 같은 천국의 문을 들어가지 못하면 그건 성직자로서 생활을 다한 것이 아니란다" 이 말과 함께 내가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들이 아마도 바늘구멍과 같은 천국의 문을 아예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밖에 없다. 돌아가신 그 신부님의 말씀처럼 저들은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서는 안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판단할 자격이 없다. 단지, 신만이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탐욕과 교만으로 얼룩진 저들 성직자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전체의 모습이지 않을까.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내가 지녀야 할 양심과 원칙을 지켜낼려고 노력하지 않은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그런 날들이다. 나 또한 탐욕과 교만이 다른 이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반성하는 그런 시간들이다.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찬 가톨릭 고위 성직자들이여, 천국의 문이 당신들에겐 바늘구멍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 것을 천상에 계시는 하느님의 바램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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