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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빌1:19-26절)
우리가 평상시에 특별한 의미가 없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희망 사항’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깊이 생각해 보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희망 사항’이라는 말은 확실한 지식과 의지와 노력이 없이 그냥 하는 말입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실현 가능성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기대도 없고 소망도 없는 허공에 메아리치는 말입니다. 막연한 소원이나 현실성이 없는 꿈을 ‘희망 사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젊은 사람들에게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이 비록 현실적인 것이고 눈에 보이는 세계의 것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기대와 부푼 꿈을 가지고 뛰고 달렸습니다. 아무리 불가능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하여 인내하고 노력했습니다. 진성이라는 가수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실이 너무나 암담하고 눈앞이 캄캄하여 죽고 싶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무덤에 가서 소주 한 병을 먹고 앉아서 울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나는 일어나서 뛰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에게 태클을 걸지 말라.’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그 말이 좋아서 적어두었는데 이 가사가 후일에 노래가 되었고 크게 유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장차 무엇이 될 것이냐’고 물으면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장래의 소원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내 소원은 이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이것만은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고 무슨 목적을 말하면서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청년들은 정신 상태가 나약하고 생각하는 것이 빈약합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약한 정신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확실한 희망과 이상이 없기 때문에 결단이나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희망’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소망’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신자에게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소망은 바라는 바를 말합니다.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닌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절한 기대’라는 말을 바울이 사용했습니다. 헬라 원문에는 ‘아포카라도리안’이라는 말인데 ‘먼 곳에 있는 것을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본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소가 담장 너머에 있는 푸른 초장을 바라보려고 목을 길게 빼고 있다는 말입니다. 갈 수는 없습니다. 현실은 묶여 있을지언정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말이 간절한 기대입니다. 무슨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이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을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사자성어로 ‘학수고대’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뜻이 달라집니다. 즉 신앙의 미래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객관적입니다. ‘기대’는 인간의 마음이요 의지요 소원이지만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적 응답인 것입니다. 소원은 미래를 투사한 인간의 의지이지만 소망은 미래로부터 출현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내가 수렴할 때 소망이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소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내가 소망을 아는가, 소망이 있는가, 소망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높은 미래적 의지, 하나님의 그 약속을 얼마나 믿고 얼마나 알고 얼마나 확신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희망 사항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실 경영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진솔하게,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울은 그의 소망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습니다.
*빌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일반적으로 큰 전쟁의 전후 혼란기에는 교회 안에 이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신학자들이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믿음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 이적이 많이 일어납니다. 유럽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참패하고 프랑스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프랑스에는 전쟁의 참화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난치병이나 불치병이 생겨났고 병원이나 의술은 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병을 고치기 위하여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는지 궁금하여 구경나온 사람들도 있었고,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교회를 비판하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교회는 법석거립니다.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청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부상을 당하고 한쪽 다리를 잃고 목발을 짚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청년을 보고 수군거립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한 마디씩 합니다. ‘저 청년은 하나님께서 새 다리를 주시기를 바라는가 보다.’ ‘저 사람은 없는 다리를 고치려고 나왔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하지만 좀 지나쳤지.’ 그러나 청년은 사람들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목사님에게 다가갑니다. 목사님이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무엇을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청년이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새 다리를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한 다리로 두 다리를 가진 사람 못지않게 굳게 서서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도 사람들도 다 놀랐다고 합니다. 참으로 훌륭한 신앙인의 자세였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이 바랐던 것은 없어진 육신의 회복이 아니라 불구의 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신앙과 능력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환경이 달라지기를 바라십니까. 천지가 개벽을 하고 내게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라십니까. 하루아침에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어 벼락부자가 되고, 기적이 일어나서 죽을병이 사라지고 젊음과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라십니까. 신앙인에게는 이것을 소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 안에서,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소망에 따른 기대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소망과 기대는 현실을 초월합니다. 상황을 초월합니다. 나의 나약함도 완전히 극복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더러는 아무 목적과 의미도 없이 무작정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자기의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든지, 아니면 의미 없이 하루를 허비하든지 간에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진솔한 자기고백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게 되기를 생의 유일한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그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를 갈망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직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삶과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육체를 자랑하려고 한다면 바울 역시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얻게 된 구속의 은혜와 감격은 바울로 하여금 모든 것이 분토보다 못한 것임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결단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제 바울 안에 사시는 분은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합니다.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영생의 진리는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초월하게 합니다. 바울은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한 완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영생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동참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자에게는 죽음이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 다른 두려움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는 이 소망과 기대에 합당한 자세를 갖추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소망과 기대에 따르는 바른 철학과 바른 지식, 그리고 이에 합당한 생활이 있는지, 그것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변수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확실한 소망과 기대는 있는데 이에 합당한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그 소망과 기대는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용기와 진실한 행위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여기 한 학생이 있는데 소원도 있고, 희망도 있고, 소망도 있는데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노력이 따르지 않는 기대는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전쟁은 심히 걱정스러운데 대비를 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건강하기를 소원한다면 건강에 합당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지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실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건강을 바라면서도 건강에 해로운 행동을 일삼고 건강에 유익한 일에 절제하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에 건강하기를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설사 바른 믿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절제가 따르지 않으면 희망과 소망은 그 의미를 잃고 말 것입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행위가 있었습니다. 피나는 수고와 땀을 흘리는 고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망과 기대를 따르지 않았거나 처음부터 소망과 기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고속도로에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습니다. 한 번 길을 잘못 들어서면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하는 수없이 다음 번 출구까지 갔다가 인터체인지를 벗어나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면 목적지와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길을 안내합니다만 이것 역시 자기가 가라고 지시하는 대로 가지 않으면 끝까지 주기 주장을 하고 그 길로만 안내합니다. 운전자의 생각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그 결과 차는 정상적인 길로 가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면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를 쓸 당시는 로마의 감옥에 감금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재판의 결과에 따라 생사가 판가름 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자기가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무척 좋을 것이지만 자기가 살아서 주의 일을 한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도들에게 유익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빌1:23-24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초월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생의 삶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흔히 내세를 바라보면서 현실의 삶을 고해라고 생각하고 힘든 광야의 삶이라고 평가합니다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고해’라는 말은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이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용어는 아닙니다. 성도들이 광야의 길을 걷는 것은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것을 벗어나기 위한 훈련이요 연단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정욕이나 자랑이나 탐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생에서의 삶, 진리를 따라 사는 삶,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사는 삶 역시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삶이 자신만을 위한 삶이라면 진리를 위한 삶, 진리를 행하는 삶, 그리스도를 우한 삶은 타인들에게 기쁨과 안식을 주는 커다란 보람과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삶이 고난과 핍박이 점철된 삶이라고 해도 그것은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기피하고 무가치하게 보면서 내세만을 기다리는 삶은 결코 종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소망과 기대와 내 노력이 일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대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를 바로 읽고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운행하시는지 그것을 바로 보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십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 나라들의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교육이나 모든 것을 간섭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며 실상을 확실하게 살펴야 합니다. 확실히 이 세대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곤두박질치고 환경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잠시도 안심할 수 없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충격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역사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에 있는가를 깊이 상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지식의 시대입니다. 모든 것을 과학이나 지식에 의존하고 그것으로 판단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지식이란 일정 분야를 깊이 공부하여 그 분야에 봉사하자는 것이 근본 목적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사람은 무식해집니다. 전문가들이 연구한 것을 보면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지능지수가 가장 높다고 합니다. 대학을 가고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아이큐는 고작 9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누구나 훌륭해 질 줄 압니다만 공부를 많이 한 사람과 결혼해서 불행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차라리 무식한 사람하고 사는 것이 고생을 덜 한다고 합니다. 박사는 한 분야에만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사람 사는 일에는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분야에 전문화 되고 기능화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지 몰라도 너나없이 무식하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의사들이 한 분야에 전문의가 되면 다른 병에 걸린 사람은 진찰조차 못하는 것입니다. 감기 하나 못 고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든 일에 전문의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대통령도 그만 두면 한 사람의 시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전직 대통령이라고 특별대우하고 그 앞에 굽신거립니다. 아주 잘못된 관행입니다. 장관을 한 달 밖에 하지 못하고 쫓겨났는데 장관님으로 계속해서 대접합니다. 모두가 평등하고 깨끗한 시민이 되지 못하면 이 세대에 살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평등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우상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나 천한 자나 그 사람의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물질 리얼리즘, 유물주의, 유물 사관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가치나 자격을 물질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물질로 시작하여 물질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역사를 뒤돌아보면 물질을 우선시하던 나라들이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가난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유물론을 주장하고 실천에 옮겼던 러시아가 70년 만에 빵도 하나 없는 가난한 빈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와 도덕을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고 없애버리고 과학을 추구하던 나라들이 결과적으로 가장 비과학적인 인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구 유럽 나라들 중에 헝가리는 공산주의를 택했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가본 목사님들이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공산주의를 버리고 공립학교에서까지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그것을 확인하려고 학교를 찾아갔는데 실제로 교실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고 두 눈으로 확인했고 교장 선생님을 만나서 대화를 하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다시 한 번 놀라고 감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공산주의, 유물주의를 택했던 나라들은 다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오히려 민주주의를 한 나라들은 복음이 퇴색되고 사라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끊임없이, 변함없이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선교의 역사는 중단이 없습니다. 어떠한 고난과 환난과 역경과 재난이 따르더라도 복음은 땅 끝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망과 기대와 노력을 일직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빌1:25-26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자신의 석방을 확신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지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확신에 찬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교회에 편지할 때에 수많은 준엄한 책망과 경고를 말하였지만 동시에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의 책망은 안타까움의 표현이었고 결코 분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요구는 진리대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갖은 위협과 환난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완성하고자 하는 열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준은 오직 복음,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명예나 학식이나 자랑을 모두 버렸습니다. 세속적인 야망을 유보한 것이 아니라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이것이 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진정 그리스도께서 기준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중심이 된다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패하고 타락한 이 세상은 반드시 끝이 올 것입니다. 종말이 도적같이 곧 닥칠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 중심적이고 복음 중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의 방향을 내다보면서 과연 나는 이에 합당하게 사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자식이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되는 것입니까. 나 자신도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일입니까. 물론 그것도 무익한 일은 아닙니다. 가족이 화목하고 건강하고 부유하게 잘 사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가져야 할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신앙적으로 담대하게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 그 하나님의 역사의식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켜야 합니다. 분명히 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그 경륜을 내가 찾아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성령께서 도우심을 가능할 것입니다.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여 거룩한 역사가 나를 통하여 날마다 나타나고 이루어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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