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이외 영국 내
남성 여성, 부인 남성 여성, 부인
공작 Duke Duchess Prince Princess
(듀크) (두체스) (프린스) (프린세스)
후작 Marquis Marquees
(마퀴스) (마쿠이스, 혹은 마퀘스)
백작 Count Countess Earl
(콘트) (콘테스) (얼)
자작 Viscount Viscountess
(비스콘트) (비스콘테스)
남작 Baron Baroness Lord Lady
(배런) (배러니스) (로드) (레이디)
기사 Knight Dame
(나이트) (데임)
*국가별
영국식 상급 귀족 :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상급 귀족의 가신 : 종남작, 기사 (칭호 -> Sir)
상급 귀족의 맏아들 : 부모의 작위 계승
둘 째 : (칭호 -> Lord)
이후 : (칭호 -> Honorable-오너러블)
프랑스식 공작, 백작, 자작, 남작, 성주, 배신(가신), 기사
기타 : 매관귀족(판매용)
중세초기 프랑크왕국
상급귀족 : 공작, 궁중백, 변경백, 백작, 남작
하급귀족 : 직속기사, 기사
기타사항 "작위 부인"의 의미 : 1. 남편이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
자기가 작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
"여 작위"
Duchess, Marchioness, Countess
Viscountess, Baroness
기타사항2 "Prince, Pricess" 영국 외의 국가에서 공작, 공작부인으로 칭했음.
봉건 귀족: 기존의 혈통에 의한 귀족이 아닌, 충성을 서약하고 주종의 관계로 봉토를 받아 된 귀족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되면서 유명무실한 존재.
봉건 귀족 체제(제도상)
국왕 <-(대제후로 모인 봉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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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후 대제후 <-(제후들로 모인 봉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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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영주) 제후 제후 <- (기사들로 모인 봉신단을 제후는 거느린다.)
기사(최하의 귀족, 실제로는 봉토의 토박이 말단 관리격)
목적: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방안,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한 것, 상위 제후가 자신에 게 충성을 서약한 이에게 봉토를 떼어주며 제후로 만든다. 후, 왕의 경우 왕이 소유한 봉토보다 대제후가 소유한 봉토가 더 커버리는 경우도 있었음.
'봉건'단어는 중국 주에서 사용하는 국가 체제, 비슷한 개념으로는 신라 6부체제, 일본 다이묘 등이 있음.
《황족, 왕족》
emperor His Imperial Majesty('폐하'에 해당) 황제, 제왕
(엠퍼러) (히즈 임페리얼 매져스티)
empress Her Imperial Majesty 여제, 여왕, 황후
(엠프레스) (허 임페이얼 매져스티)
king His Majesty ('전하'에 해당) 왕, 국왕, 군주
queen Her Majesty 여왕, 여자 군주
queen consort (퀸 콘서트-허걱! 콘서트!) 왕비
prince consort (프#47538;스 콘서트)여왕의 부군
prince 왕자, 태자, 세자, 세군, 작은 나라의 통치자, 왕, 제후, 영주, 군주, 영국 이외의 공작
the Crown Prince, the Prince Imperial, the Prince Royal 황태자
(더 크라운 프린스, 더 프린스 임페리얼, 더 프린스 로얄)
the Crown Prince (영국 이외의) 왕세자
(더 크라운 프린스)
the Grand Prince 태공
(더 그랜드 프린스)
the Prince Regent 섭정왕자
(더 프린스 레전트)
a prince of the blood 왕족, 황족
(어 프린스 오브 더 블러드)
pincess 공주, 왕녀, 황녀, 왕비, 왕자비, (영국 이외의 공작부인)
(프린세스)
the Princess Royal 제1공주, 왕녀
(더 프린세스 로얄)
the Princess Regent 섭정공주, 섭정비
(더 프린세스 레전트)
a princess of the blood 왕녀, 황녀, 공주
(어 프린세스 오브 더 블러드)
《세습귀족》
duke 공작, (공국 또는 소국의) 군주, 공, 대공
a royal duke 왕족의 공작
duchess 공작부인(미망인), 여공작, (공국의) 여공
marquees(영국), marquis(영국 외) 후작, ...후
marchioness(영국), marquise(영국 외) 후작 부인(미망인), 여후작
earl(영국), count(영국 외) 백작
countess 백작부인(미망인), 여백작
viscount 자작, 백작의 대리, 백작의 맏아들에 대한 경칭
viscountess 자작부인(미망인), 여자작,
백작의 맏아들의 부인에 대한 경칭
baron 남작 Lord 성 (영국) Baron 성 (영국 외)
baroness 남작부인, 여남작 Lady 성 (영국) Baroness 성 (영국 외)
*Lord 경(후작.백작.자작.남작 및
공작.후작의 자식, 백작의 맏아들의 존칭)
《당대에 한하는 작위》
baronet(배러닛) 준 남작
knight 나이트 작, 훈공 작
dame 준 남작의 부인, 나이트에 상당하는 작위를 받은 여인의 존칭
squire(스콰이어) 시골의 대지주, 기사의 종자
page (페이지) 수습 기사
*Sir 경, 님, 씨(영국에서는 준 남작 또는 나이트 작의 이름 앞에 사용함. 성에는 붙이지 않음.)
'로드'는 주종관계일 경우 자기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서'는 지위 관계없이 서로 '서'.
*Lady 레이디, 귀부인, 숙녀(영국에서는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및 준 남작. 나이트 작의 부인과 공작. 후작. 백작의 딸의 경칭으로 성명에 붙여 씀.)
*황녀는 황실의 대부분의 여자(시집 안간)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공주는 왕이나 황제의 딸(양녀 포함)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나라 안에서 라면 공주가 더 높을 것이다.
*태자와 세자는 동양권의 명칭인데 태자는 독립국이나 중국 황실의 제 1 왕위 계승권자 인 왕자를 나타내는 것이고 세자는 종속국이나 신하국(그 외 그런 류들 전부)등의 제 1 왕위 계승자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 예로 삼국과 고려는 태자를 썼고 조선은 세자를 썼죠.
*왕의 딸은 정확히는 두 가지 칭호를 받는다. 공주와 군주.
공주는 친왕의 딸, 혹은 황제의 정실 자식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번역에 따라 다르지만) Princess의 경우, 이게 황제의 정실 자식으로 어딘가에 자신의 봉토를 가지고 있으면 그건 '친왕'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군주는 군왕의 딸(황제와 이성제후인 왕 작을 가진 가문)인 경우를 부르는 것과 황제의 측실 자식인 딸을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왕녀는 공주와 군주를 포함하지만, 대개 왕녀로 번역되는 경우는 공식적인 작위(Princess)를 받지 못하거나 비나 빈(정식 왕비들)의 자식이 아닌 인정받지 못한 왕의 소생의 딸을 부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중세는 크게 세가지 시기의 문화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결혼한 아들들과 그 아이들 그리고 그 손자들까지 합해서-열네살이면 성인취급을 받았던 당시의 사람들은 일찍 결혼했으며 따라서 세대차라는 것이 매우 미약했다- 20,3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다. 그리고 밤의 처소로 사용되는 방 하나에서 모두가 사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한무리의 사람들은 분할되지 않은 상태로 물려받은 상속재산을 최고 연장자의 지도하에 함께 관리했다. 이러한 것이 당시 귀족들의 가족이었다. 저항하기 힘든 상호의존-어느 누구도 자기 멋대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그리고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심성의 여러 특징 즉 약탈거리와 이득을 찾아 먼 곳으로 모험을 떠나거나 방랑을 하는 취향, 이제는 자신이 친족집단을 이끄는 것을 꿈꾸어 자기 상전과 경합관계에 있는 영주에게서 피난처를 구하는 아들들과 쉬이 죽지 않는 아버지간의 흔한 불화들, 이 모든것들이 가족의 재산공유로부터 오는 제약들로 설명된다. 그러나 가족공유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었다
중세에 있어서 모든것의 기반이었던 토지에서 찾을 수 있다. 토지 귀족이 농업 생산력의 증진을 자극했던 것은, 지배 계급이 농촌에 정착하여 대토지 소유계급이 되고, 바수스vassus의 신분이 하층민에서 특권 계급으로 변화하면서부터이다. 이제 봉신들은 거의 언제나 토지 형태의 봉을 점점 더 많이 수수하게 되었다. 일부 교회 영주들과 카롤링 왕조의 고위 관리들을 제외하고는 토지 귀족이 영지 경영에 직접 관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토지 귀족이 농민 대중들에게 지대와 부역을 요구하게 되자 농민들은 이 간은 지대를 납부하기 위해 경작 방법을 어느 정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10~13세기 소위 '농업 혁명'을 구성하게 될 결정적개선들은 미약하나마 카롤링 왕조 때 시작되어 비약적 가속력을 경험했던 1000년경까지 완만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환타지의 토대를 이루는 중세 시대. 그 시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단순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빵과 사냥해서 잡은 짐승 고기를 구운 것. 당신이라면 단순히 이 것들만으로 몇 일이고 몇 달이고 살고 싶은가?
서양의 기본적인 식사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테이크와 빵이다. 특히나 현대의 서구인을 생각하면 스테이크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고기를 제대로 먹을 수 있었던 계층은 소수의 통치자들 뿐이었다. 영국인들이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소를 계획적으로 방목하기 전까지 일반 민중은 한 달에 고기를 100g도 식탁에 올리기 힘들었다. (1994년 한국인의 고기 소비량은 한 사람당 하루에 100g 정도 라고 한다)
기실 중세 서구인의 주식은 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빵은 어떠한가. 빵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되었던 음식일까? 중세의 빵은 몇가지로 나뉜다. 가난한 사람의 빵, 부자의 빵, 귀족의 빵, 성직자의 빵 이다. 각각의 빵은 주 재료가 달랐다. 즉, 신분과 재산에 따라 하얀 밀가루 빵부터 보리빵, 호밀빵 등으로 식사의 질과 양이 큰 차이를 보였다.
그러면 중세인들은 빵만 먹고 살았던가? 설마.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이던간에 맛있는 것, 다양한 것을 먹고자 하는 욕구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조리법을 개발해왔으며 다양한 색채와 미각을 즐기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의식적(儀式的)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중세 초기의 음식
A.D 5세기에는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과 함께 지중해 세계를 장악하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중세 유럽은 암흑기로 돌입한다. 이 시기에 유럽 음식들은 매우 빈약해져서 곡물, 우유, 치즈, 그리고 야채가 주식이 된다.
이 시기에 요리는 수도원이나 교회 근방의 주요 농업 생산지를 통해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다가 1,000년 이후 수도사들로부터 평민들에게 전수되어 그 지방 특유의 요리들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요리 기술의 일반적인 경향은 몸에 좋고, 입맛을 돋우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의 개발이었으며, 준비에 들어가는 수고를 줄이고 과일과 야채의 신선함을 살린 것이었다. 빵은 갓 구운 말랑한 것이 아니라, 굳은 채로 먹기도 하고, 영양이 풍부한 수프를 만들어 베이컨을 띄워 먹기도 하였다.
중세 중 후기의 음식
1,200년 경이 되면 봉건제도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이 당시에는 상업과 사회적 활동이 재개되고 봉건 영주들의 생활은 풍족해진다. 봉건 영주들은 자주 연회와 파티, 그리고 마상시합을 열었다.
이 시기로부터 음식문화가 차츰 세련되고 화려한 조리법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마늘소스로 맛을 낸 구운 고기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아졌으며, 동방으로부터 향신료가 다양으로 수입되어 음식에 다양한 향을 입히기 시작했다.
중세 소스의 주 성분은 식초처럼 신맛을 내는 것이었는데, 때때로 신 오렌지즙이나 레몬즙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향신료를 많이 첨가하여, 신맛과 향신료의 맛이 매우 강했다.
중세의 요리는 재료의 맛과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다. '곰고기처럼 보이는 소고기', '송아지 고기같이 만든 철갑 상어고기'처럼 음식의 모양이 내용과 다르게 만들어졌으며, 천연, 인공 재료를 첨가하여 빨강,보라,파랑 등 요리에 다양한 색을 입혔다.
향신료 무역은 중세 초기부터 이미 거래가 있었으나, 십자군 원정과 의약품, 요리를 통해 수요가 많아지며 이 시기에 매우 활발해진다. 진기함과 높은 가격의 매력, 육류 및 생선류의 장기 보존, 그리고 음식의 맛을 다양하게 해주는 향신료들의 특성은 귀족들에게 매우 사랑받았다.
이 시기에 정향, 카르다몸, 갈랑가, 육두구 열매 따위가 향신료중 많이 사용되었으며, 고대에 다량으로 소비되던 후추는 별로 사용되지 않게 된다. 후추는 양에 있어서 베네치아 수입 향신료의 3/4를 차지했다. 가격이 싼데다가 쉽게 구할수 있어서 학생, 군인, 죄수 등 돈 없는 사회계층이 사용하는 향신료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반면, 귀하고 값비싼 향신료인 정향, 육두구 등은 귀족들만이 사용했다.
향신료의 사용은 참으로 광범위하여, 와인에 꿀이나 설탕과 향신료를 섞어 마시기도 하였다. 이 당시 조리책들에는 향신료의 섞는 법과 사용순서, 요리에 들어가는 시기에 대해 많은 조언이 실려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치즈는 완전히 일반화되어 고상한 사람들의 연회에 차려지는 요리 중에는 끼지 못할 정도로 흔해져버려 평민들의 주요한 식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