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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
유동(流東) 이우종 편
석야 신웅순
밤 늦게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1998년 창간한『시조한국』신작 시조 원고 청탁이었다. 선생님께서 한국시조시인 협회장을 맡고 계셨을 때이다. 선생님과는 수원상설시조학교에서 몇 번 뵈었을 뿐 필자와는 살갑게 대화해본 적은 없었다.
필자의 단시조 연작「한산초-모시」를 보았다면서 필자에게 과분한 평가를 해주셨다. 그리고는 1년 후 돌아가셨다. 1999년에 가셨으니 20년이 다 되어간다. 창간호는 그만 종간호가 되어버렸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늘 가슴에 남아있었다. 선생님과는 그런 인연이 있었다.
가을 하늘이 맑다. 오늘에사 선생님의 시조집을 펼쳤다.
퉁기면 열 두 가락 목을 빼면 학의 춤이
일렁이는 여울물에 한동안 쫓기다가
가난한 동구 밖에서 물이 드는 도라지꽃
곱게사 여민 청자 물살 환히 밝아오고
다홍 고추 동동 띄워 고향의 맛 빚어낼 땐
우러러 하늘을 보면 과즙으로 끈끈했다
일월을 오르내린 꽃사슴의 발자국이
신화 저 편에서 무서리로 덮이는 밤
옷고름 다시 조이는 춘향이의 기침소리
-「모국의 소리」
시인의 시조는 ‘한국적’이다. 대표적인 것이「모국의 소리」이다. 모국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를 세가지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조이다.
가야금은 대표적인 12줄의 민속 현악기이다. 둥기둥 줄을 울리면 학은 목을 빼고 춤을 춘다. 무엇이 일렁이는 여울물에 한동안 쫓기고 있는 것인가. 가난한 동구 밖 어디선가에서 도라지꽃은 물이 든다. 목을 빼고, 일렁이고, 물이 들고 이것이 전통 가무의 멋과 흥이 아니겠는가.
곱게 여민 청자와 물살 환히 밝아오는 것, 다홍 고추 동동 띄워 고향의 맛 빚어내는 것, 우러러 하늘을 보면 과즙으로 끈끈했던 것. 청자와 물살이 끌고 가는 한국의 미, 정중동이 여기에 있다.
세월을 오르내린 꽃사슴의 발자국, 신화 저편에서 무서리로 덮히는 밤 춘향이는 옷고름을 다시 조이고 있다. 신화, 꽃사슴, 춘향에 이르기까지 질곡의 모국의 역사를 담담히 노래하고 있다.
「모국의 소리」는 멋과 흥, 정중동 그리고 질곡의 역사, 이 세가지 측면에서 서로 다른 소리를 현실감있게 들려주고 있다.
이우종은 196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탑」으로 당선되었고 한국시조시인협회장을 지냈다. 저서로『현대시조의 이해』외, 시조집으로 『모국의 소리』등이 있다. 그의 시조 개론은 시조창작에 관한 탁견으로 시조의 역사와 형식, 문제점 등을 다루었으며 특히 전통적 정형성의 설득력이 있는 논지가 주목되고 있다.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한 십년 살다보면 가난도 길이 들어
열두나 다랭이가 줄이 죽죽 금이 가도
당신의 웃는 동안은 청산 위에 달이 뜬다
장마루 놀이 지면 돌아올 낭군하고
조금은 이즈러진 윤이 나는 항아리에
제삿날 울어도 좋을 국화주나 빚어야지
아직은 두메 산골 덜 익은 가을인데
사랑이 응어리로 터져오는 밤이 오면
보리를 쌀이라해도 묻지 않을 양(羊)이어라
- 「산처일기(山妻日記)」
「산처일기」는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산에 사는 가난한 아내의 하루 일기이다. 그것을 시인은 텍스트 에서 관찰하고 있다. 부부의 사랑을 다루었다. 첫째수는 삶에 대한 태도요둘째수는 조상에 대한 효도요, 셋째수는 부부간의 사랑이다.
이 시조는 가난에 익숙했던 시절의 삶의 단면과 함께 전통적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묵상케 한 다. 유교적 가치관과 풍속을 풍기는 작품이지만 이 곳에 그려진 심성은 아직도 한국적인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이영걸의 「멋과 슬기의 시조」
전통적인 사랑과 한국적인 매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요약해 놓았다.
한 십년 살다보면 가난도 길이 든다. 열두나 다랭이 논에 줄이 죽죽 가도 당신이 웃는 동안 청산 위에는 달이 뜬다고 했다. 다랭이는 비탈진 산골짜기에 형성된 계단식 작은 논빼미로 가난을 상징하고 있다. ‘열두나’는 일년 열두달 자연의 이치와 가야금 열 두 줄로 전통을 상징하고 있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이에 순종하며 사는, 가난하면서도 언제나 웃고 사는 그런 달관한 산촌의 삶을 노래하고 있다.
장마루는 긴 널로 죽죽 깔아서 만든 마루이다. 거기에 노을이 지면 내 낭군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즈러졌지만 윤이 나는 세월이 흐른 항아리이다. 거기에다 제사에 쓸 울어도 좋을 국화주를 빚는다. 가난하지만 내 낭군을 사랑하고 조상을 위하는 효심은 이리도 지극한 것이다.
아직은 두메 산골 덜 익은 가을이지만, 밤이면 사랑은 응어리로 터진다. 열정적인 사랑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보리를 쌀이라해도 묻지 않는 아내는 이리도 순한 양이다. 가난하지만 삶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 성숙하고도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꽃잎
떨어지네나뭇잎도 떨어지네
모두가
찬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도
울엄마
그 이름만은
이 가을에 싹이 트네
-「가을」
꽃잎도 떨어지고 나뭇잎도 떨어지는 모두가 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다. 그러나 엄마 그 이름만은 조락의 가을에 싹이 튼다. 봄에 싹이 트고 가을에 조락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조락의 계절에 어머니 이름만이 싹이 트다니. 어머니의 사랑은 이렇게 위대하다. 꽃잎과 낙엽 그 모든 것, 힘 없음과 엄마의 모든 사랑, 힘 강함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시조의 맛은 서로가 길항하는 종장의 반전에 있는 것이다.
떨어지는 가을 이미지를 그 이미지 그대로 두지 않고 싹이 트는 이미지를 엄마의 영상에 담고 있다. 가을 이미지는 낙화와 결실이 겹치는 시절인데도 이 시인에게는 그것이 결실보다도 싹이 트 는 원래의 의미로 환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절의 감성에서도 서서히 다가와 가까워 지는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그러한 이미지의 착상이다.
-조병무의 「현대시조와 정형의 배열구조 보기-8인의 신작을 중심으로」
가을은 낙화와 결실의 계절인데 시인은 결실 대신 싹이 트는 원래의 모습으로 환원시켰다. 싹이 터야 결실을 볼 수 있다. 엄마의 이미지를 결실의 이미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싹의 이미지로 보고 있다. 창조의 힘은 역시 역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시조를 읽을 때면 초․중장은 기쁘지만 종장은 애석하다. 시조에서 종장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그만큼 대구를 얻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끝내 대구를 달지 못하고 죽었다는 시인도 있다. 종장의 크기가 초․중장 크기의 합보다 더 커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시조이다. 묘리는 종장의 두 구절에 달려 있다. 종장은 자신만이 완성해야할 고독한 공간이기도 하다.
사뿐히 버선발로
내려 뛰는 조것 좀 봐
한동안 몰아치면
깊어진 인당수에
심청이
머리를 풀자
그 애비가 눈을 뜨네
시절은 봄인데도
낙화하는 저것 좀 봐
흐르면 흐를수록
세상은 목이 타도
달려갈
구만리 길을
멈출 수는 없다네
-「폭포」
수묵화 한폭이다.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내리는 것을 보며 그에 대한 순간을 역동적 이미지로 건져올리고 있다. 대구는 심청의 죽음과 아버지의 눈뜸, 바로 ‘사라짐’과 ‘생겨남’의 이미지이다.
시인은 버선발로 사뿐히 내려뛰는 심청을 보고 있다. 깊어진 인당수에 파도가 몰아치면서 심청의 머리칼이 풀어진다. 죽음에서 생성으로 바뀌는 찰나이다. 이 때 애비가 번쩍 눈을 뜨는 것이다.
시절이 봄이다. 꽃잎이 떨어지고 있는 것 좀 보라했다. 이 때 시인은 심청 아버지로부터 또 다른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흐르면 흐를수록 세상은 목이 타고 달려갈 구만리길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목이 타는 세상이지만 구만리 달려갈 길은 멈출 수가 없다는 한국인의 의지 표명이다. 이러한 에너지는 한국인의 정신, 어쩌면 시조의 종장과 같은 신비로운 신명 같은 그런 호흡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우종 시인의 시조에 대한 생각이다.
시조의 가락만큼 멋진 가락도 없는 것 같다. 한 장 안에서의 호흡이 끊어질 듯 이어져가는 네 음보를 밟으면서 3․4조나 4․4조라고 하는 멋진 가락을 타고 잠시 흐르다가 다시 장에서 장으로 넘어가는 흥청거리는 율조, 그러다가 3․5조로 급변하는 종장에 이르러서는 마치 천 길 낭떠러지 에서 물이 굴러 떨어지는 듯한 긴박과 흥분을 자아내게 하다가 마침내 4․3조로 낚아 채는 듯한 여운을 남기면서 끝을 맺게 되는 이 놀랍고도 신비로운 가락이야말로 시조 아니고서는 다시 대할 수 없는 가락이다.
-이우종 시인의 시조집 『모국의 노래』자서에서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내 지은 시구가 사람을 놀래키지 못한다면 죽어서도 그만 두지 않겠다고 두보는 노래했다. 사람을 놀래키는 ‘경인구(驚人句)’는 책만 읽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천지만물이 다 책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말없는 세계를 읽을 수 있어야 비로소 경구를 얻을 수 있다. 책에서만 묘한 진리를 어찌 터득할 수 있겠는가.
산수가 있으면 시가 있어야하고 시가 있으면 산수가 있어야한다. 꽃이 있으면 짝이 있어야하고 짝이 있으면 꽃이 있어야한다. 책으로만 얻어질 수 없는 이유이고 산수, 꽃으로만 얻어질 수 없는 이유이다.
강물 소리가 깊어가는 가을이다.
그대는 들었는가
임진강이 우는 소릴
바람에 밀리다가
꿈에서 밀리다가
여울목
벼랑을 딛고
울부짖는 저 소리를
들머리 빈 자락에
고향 뜰이 얼비치면
손 흔들며 흐르다가
온몸으로 흐르다가
세월의
난간을 잡고
피가 뚝뚝 지는 소릴
- 「임진강」
현실의 안타까움과 미래의 꿈을 노래한 시조이다.
임진강이 우는 소리를 그대는 들었는가 묻고 있다. 그 울음은 바람에도 밀리고 꿈에도 밀린다. 여울목 벼랑 위에서 울부짓는 소리이다. 바람은 현실이요 꿈은 이상이다. 그 사이에서 임진강이 울부짓는 것이다.
들머리 빈자락에 고향의 뜰이 얼비친다. 손을 흔들며 흐르다가 온몸으로 흐르다가 한다. 시인은 세월의 난간을 잡고 피가 뚝뚝 지는 소리를 들머리에서 듣고 있다.
들머리 빈 자락은 현실이다. 고향의 뜰은 환치된 이상이다. 현실에 이상이 비치는 것이다.둘째수는 이상에 잠겨 잠시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는 피가 뚝뚝 지는 소리를 세월의 난간에서 듣고 있다. 피는 물론 민족의 비극을 상징한다. 민족 비극의 안타까움을 통곡하듯 노래하고 있다. 오갈 수 없는 임진강이니 바로 쓰여진 듯 지금 읽어도 현장감 있게 읽혀진다.
아쉬움에 한 수 더 얹는다.
바람이 없는 날도
꽃들은 흔들린다
때 없이 흔들려도
꽃들이 피어나듯
사랑이
흔들릴 때도
그것 또한 사랑이다
이 세상 어떤 꽃도
젖으면서 핀다지만
사랑도 밤낮 없이
젖으면서 피었다가
어느날
소문도 없이
젖으면서 가는 거다
-「꽃과 사랑 사이」
꽃과 사랑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사랑도 흔들리고 꽃 또한 흔들린다. 꽃도 젖으면서 피고 사랑 또한 젖으면서 핀다. 그러나 어느날 꽃도 사랑도 소문도 없이 가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꽃과 사랑의 운명이고 보법이 아니던가.
물은 산에서 빛깔을 빌려온다. 시도 자연에서 영감을 빌려와야한다. 시가 자연을 꾸며서는 안된다. 그것은 재(才)이지 정(情)이 아니다. 자연을 오랫동안 유지시켜주는 것은 재가 아니라 정이다. 시는 거짓이나 진실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자연이 한마디 던지면 시인은 대꾸를 해줄 수 있어야한다. 시의 어려움이 얼마나 할까만 새삼 선생님의 시를 읽으며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가을 하늘이 맑다. 누굴까, 저 흰구름 한 점 보내준 이는. 오늘은 선생의 시조를 흰구름에 실어보낸다. 우리들의 삶이 삿대 없이 흘러가는 허허로운 저 흰구름이었으면 좋겠다.
- 서예문인화,2017.10,71-75쪽.
[출처] 유동(流東) 이우종 편- 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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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조 가락이 운율을 타고 흐르는군요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