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작품 상설전시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1998년,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千鏡子, 1924-2015) 화백은 시민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온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그 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천경자 상설전시는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라는 이름으로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는 꿈과 사랑, 환상에서 비롯된 정한(情恨)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은유한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식물로 표현되거나 상관없이, 그림은 나의 분신”이라고 말하는 천경자 화백의 작품세계는 마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전시는 이처럼 자전적(自傳的)인 성격을 가지는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자기고백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환상의 드라마’, ‘영혼의 여행자’, ‘자유로운 여자’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섹션 1.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자화상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와 해외여행지에서 본 이국여인의 모습을 그린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와 같은 작품으로 구성된 섹션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에는 작가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린 다양한 모습의 여인들이 자리한다.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짙은 한의 정서는 천경자에게 있어 슬프지만 달콤한, 인생으로서의 매력이었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그림 속 여인들의 모습에서 ‘달콤한 한’이 깃든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는 고독과 저항, 한을 응축시킨 천경자의 대표적인 자화상이다. 여인은 천경자의 상징인 뱀을 화관처럼 머리에 쓰고,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우수에 찬 눈빛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하얀 동공의 눈동자는 금빛으로 표현했고 푸른빛의 그림자 가득한 눈매는 광기에 찬 매서운 눈초리로 바뀌었다. 더욱 무표정해진 얼굴, 유난히 긴 목의 여인은 강렬하고 섬뜩한 마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인의 눈동자는 우리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머리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은 고독한 여인을 달래주는 수호신이면서 동시에 천경자 자신이다. 여인은 인생을 체념하고 속죄하는 초월적 태도를 보여주며, 고독과 슬픔, 한을 넘어선 천경자의 모습이다.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는 이국적 풍정과 극적인 상상력으로 변용시킨 여성인물화이다. 천경자는 1989년과 1993년에 카리브해 연안, 자메이카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열대나무와 앤슈리엄, 히비스커스 꽃을 배경으로 표범무늬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천경자 자화상 <알라만다의 그늘Ⅱ>(1985)가 연상된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이국 여인의 얼굴과 눈매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초월적인 여인상으로 규정짓고 정형화시켜 표현했다. 보편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니라 이목구비를 지나치게 과장한 모습이다.
섹션 2. 환상의 드라마
“작품은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고, 미래세계를 상상하며 오늘의 꿈을 담은 한 폭의 드라마들”
‘환상의 드라마’ 섹션은 작가의 꿈과 환상, 동경의 세계를 표현한 자전적 성격의 채색화 작품으로 구성된다. 젊은 시절의 지독한 가난과 사랑의 상처로 인한 뼈아픈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렸던 천경자의 대표작 〈생태〉(1951)에서부터 안정된 생활의 행복감이 깃든 화사한 파스텔 색조의 그룹 인물화 〈여인들〉(1964), 그리고 보티첼리의 작품이 중심이 된 〈이탈리아 기행〉(1973)까지. 과거의 추억과 오늘의 꿈, 미래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 작품들로 구성된 이 섹션은 시기에 따른 작가의 감정 변화가 녹아든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생태>(1951)는 처절한 삶의 현실에 대한 저항을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얽히고설킨 수십 마리의 뱀이 화면 중앙에 모여 있다. 뱀의 동세, 머리, 눈망울, 표피의 질감 등의 꼼꼼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천경자는 광주역 앞 뱀집을 찾아가 유리상자 속에 수십 마리의 뱀을 넣고 직접 관찰하여 스케치했고, 이 작품을 25일 만에 완성했다. 작품의 뱀은 원래 모두 서른세 마리였으나, 사랑했던 뱀띠 연인의 나이를 맞추기 위해 두 마리를 더 그려 넣어 서른다섯 마리가 되었다. 천경자 스스로 뱀을 그린 동기는 ‘오직 인생에 대한 저항을 위해서’라고 했다. 고통과 슬픔, 분노 등의 내면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뱀을 소재로 그림으로써 여동생의 죽음, 사랑, 이혼,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삶의 역경을 극복하려 했다.
<여인들>(1964)은 자전적 요소가 두드러지면서 자유로운 변용과 환상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시기의 작품이다. 1960년대 초중반은 천경자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작품 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면사포를 쓰고 있다. 면사포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부에 대한 환상과 동시에 욕구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평면적이고 간결한 형태 해석, 자유롭고 활발한 붓의 율동감, 힘찬 선의 흐름이 화폭을 지배하고 있다. 사람·사물의 흐트러진 윤곽선과 거친 표면질감이 특징이다. 천경자는 당시 한국 화단에서 유행했던 추상미술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필묵에 의한 선의 개념과 색채를 결합시키고 사실적인 형태를 구현했으며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함으로써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다.
<이탈리아 기행>(1973)은 피렌체의 인상을 바탕으로 3년여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197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였고,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서 깊은 감명과 충격을 받았다. 전통의 맥락에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였고, 이는 자신의 회화세계에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품에는 여정 중 천경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도상이 등장한다. 화면의 중심에는 보티첼리의 화집, 오른쪽에 프라 안젤리코의 <이집트로의 피신>(1451-52) 엽서와 왼쪽 상단에는 천경자의 기행 스케치화 <베니스 산마르코 사원>(1970)이 놓여있다. 장갑, 매니큐어를 칠한 손, 트럼프, 술병 등 주요 도상들은 이 작품에서 처음 단체로 등장하여 말년 작품까지 지속된다. 트럼프는 자신의 감정 상태, 술병은 고독했던 여정, 손은 신체의 일부를 나타낸다. 천경자는 소재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대변한다. <이탈리아 기행>은 1970년대 천경자 회화양식 형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작품이다.
섹션 3. 영혼의 여행자
‘영혼의 여행자’ 섹션은 1969년부터 남태평양에서 시작해 인도, 중남미, 미국,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그린 기행회화로 구성된다. 작가에게 여행은 타국의 사람들과 자연, 풍물을 발견하는 즐거운 시간이었으며, 원초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교감의 현장이었다. 여성의 몸으로 원시의 땅을 찾아 나섰던 작가는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마음껏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여행에 집중했다. 여행 초기의 감흥과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1969)와 같은 스케치에서부터 1970년대 후반 이후의 화려한 색채와 화면구성이 돋보이는 〈플라사 메히코〉(1979), 〈푸에블로족〉(1988)까지, 완성도 높은 채색작품들과 살아 움직이는 듯 순간의 강렬함을 간직한 작가만의 독특한 기행회화를 감상할 수 있다.
<타히티 고갱 미술관에서>(1969)는 고갱이 살던 집터에 세워진 기념비(석상)를 스케치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폴 고갱의 흔적을 찾기 위해 타히티 여행을 선택했다. 천경자의 기대와 달리 고갱의 집과 미술관에는 작품은 없고 인쇄물과 유품만 남아 있었다. 고갱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천경자의 시야에 가장 먼저 포착된 것은 야자수 잎으로 씌워 놓은 석상이었다. 빠르게 펜으로 그려나간 야자수 잎과 석상의 형태는 천경자의 필력을 드러낸다. 굵은 펜과 콩테로 기념비에 음영을 주어 형상의 볼륨감을 강조했다.
<플라사 메히코>(1979)는 멕시코에서 투우 경기 장면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천경자는 멕시코에 도착하자마자 투우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플라사 메히코를 찾아갔다. 플라사 메히코는 세계 최대의 투우 경기장으로 멕시코 문화를 상징한다. 지역의 대표적인 풍물과 문화는 놓칠 수 없는 작품의 중요한 소재였기 때문에 투우 경기 일정상 관람을 서둘러야 했다. 전경의 관람객들을 중심으로 시선을 따라가면 원형 경기장 안에 투우사와 소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원근을 강조한 꽉 채워진 관중석 인물들, 날뛰는 소들의 어정쩡한 움직임, 승리를 환호하며 던진 모자들의 표현은 투우 경기의 생동감을 강조해준다.
<푸에블로족>(1988)은 산 아래 납작하게 늘어서 있는 푸에블로 촌락을 그린 작품이다. 1987년 천경자는 막내 아들과 함께 두 번째 미국 남서부 지역 여행을 했다. 푸에블로는 뉴멕시코주와 애리조나주, 텍사스주에 부락을 이루어 사는 미국 원주민 부족들을 말한다. 원경에는 진흙과 짚을 으깨 만든 벽돌 건물로 이루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정착지를 보여준다. 화면 중앙에는 깃털과 장신구로 치장한 인디언 남녀가 서 있고, 전경에는 선인장에 노란 꽃이 가득 피어있다. 천경자는 화폭을 통해서 인디언 문화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섹션 4. 자유로운 여자
‘자유로운 여자’ 섹션은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1984)를 포함한 다수의 수필집과 천경자 작품에 대한 대중적인 인기를 불러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9), 해외 스케치 여행의 과정을 그림과 함께 담아낸 『아프리카 기행화문집』(1974) 등의 출판물을 선보인다.
글 쓰는 일은 작가에게 맺힌 한을 풀어내기 위한 일종의 ‘푸닥거리’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가 남긴 많은 책들은 당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를 만큼 그림 못지않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다. 문학과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문학예술인 천경자’가 들려주는 감각적이면서도 솔직한 언어 속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열정이 녹아난다.
다채로운 이야기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화백의 작품 기증이 지닌 참뜻이 다시 한 번 빛나길 바라며, 앞으로도 지속적 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재조명될 천경자 상설전시에 대한 관람객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기대한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1977년, 종이 위의 안료
자마이카의 여인 곡예사(1989)
생태(1951)
이탈리아 기행 (1973)
미인도(1977년)
모자를 쓴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