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8,14-21
나눔의 공동체가 신적 존재의 증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배로 가져온 빵이
한 개밖에 없어서 그런 말씀 하시는가 보다.’라고 수군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5천 명, 4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 일곱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도 당신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이 기적이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할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 본성으로 태어납니다.
생존 욕구만을 지녀 나눌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족과 자기 것을 나누어 앞으로 먹을 것을 공동으로 비축하는 바이러스나, 기생충, 모기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것들은 오로지 자기만 압니다.
그런 결과 이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가족 공동체가 이뤄지려면 그 구성원이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 내어줄 수 있는 본성으로 탈바꿈돼야 합니다.
부모는 서로서로 자기 것을 나누고 자녀들도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가족 공동체를 이룹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소임을 하고 있을 때, 곤지암에서 온 안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혼자 묵주기도만 열심히 하고 수녀님이 와서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를 찾아오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냥 할머니 옆에서 묵주기도 1단 함께 해 주고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일이 있어서 함께 할 수 없었는데 다음에 갔을 때는 “아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어딜 갈 땐 간다고 말을 하고 갔었어야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사랑을 충분히 받아보지 않아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받고 있음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시집을 가서 29세 때 자식 없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친정집도 가난해서 연락이 끊겼고 형제들도 다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비단을 이고 장사하셨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계실 땐 힘들어서 짜증도 났지만 혼자 되니 너무 적막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대세를 받았고 그때 할머니도 안나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성모상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데 외로움이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시어머니처럼 대하며 살았습니다.
밥도 한 그릇 더 차려놓고 대화하고, 비단을 팔아서 번 돈을 반반으로 나누어 반은 성모상 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서 자기 돈과 비단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상 밑의 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니, 집 잘 보라고 했더니 자기 돈만 지키고 내 돈은 가져가게 내버려 뒀어요?” 라며 성모님께 호통을 치셨습니다.
뉘어놓고 매도 때렸습니다.
며칠 뒤 한 청년이 비단과 돈을 가져와 무릎을 꿇고 “제가 아무리 이곳을 벗어나려 해도 계속 이 집 문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할머니는 청년이 딱해서 취직도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79세에 방광암이 들어 이렇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검사를 받으러 병실을 비울 때는 수녀님에게 작은 보따리를
맡겼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는 통장과 폐물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수녀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몇 번을 권해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인데 왜 남에게 주느냐며 수녀님을 “도둑년”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수녀님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줄 알고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마음을 열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할머니는 며칠 뒤 눈물을 흘리며 꿈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친정어머니인지, 큰언니인지 모르겠지만 참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가 왔다 가셨어.
갑자기 내 손을 잡고서는 ‘안나야 놀러 가자.’라고 하시는 거야.
놀러 가는 집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나에게 도움을 줬던 집들이었어.
집안에 알곡으로 가득 차 있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으로 들어왔는데 알곡은 없고 짚단 하나만 달랑 있는 거야.
내가 왜 우리 집만 이러냐고 따졌는데 그 여인이 ‘넌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한테 다 얻어먹고 살았지. 그런데 네가 남들에게 베푼 것은 짚단 하나밖에 없더구나.’
‘짚단은 뭐지?’ 내가 한참을 생각해보니 기억이 났어.
내가 어렸을 때 앞집 송아지가 하도 울기에 우리 집 짚단을 준 기억이 난 거야.
수녀야, 어쩌면 좋냐! 난 베푼 게 없어. 우짤꼬!”
수녀님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정말 줄 사람이 없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양자가 한 명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비단과 돈을 훔쳤던 그 청년이었습니다.
이후 청년을 양자로 삼았었고 6년을 함께 살다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주 찾아오지만 자기 시부모처럼 그 아이에게 짐이 될까 봐 알리지 않고 병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핸드폰도 없을 때라 양아들도 연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녀님은 그 아들에게 전화했고 온 가족이 할머니를 보러 왔습니다.
아들은 보자마자 울면서 6개월 동안 팔방으로 찾아다녔다고, 이러신 줄 몰라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 유산을 아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묵주를 수녀님에게도 주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게 이렇게 마음이 꽉 차고 기쁜지 몰랐어.”
그러며 “우리 엄마 같기도 하고 큰언니 같기도 한 그 여인이 성모님이셨던 것 같아.” 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셨고, 양아들 가족도 할머니의 유지에 따라 모두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안나 할머니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받았고 어쩌면 시부모의 사랑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으면 썩어버릴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가족 아닌 이에게 내어줄 만큼의 사랑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사랑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기 안에서 무슨 사랑이 솟아나서 서로 나누겠습니까?
분명 우리 부모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으로 우리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명이 되는 커다란 공동체가 그렇게 서로 나누며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많이 남을 정도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넘어서는 엄청난 사랑이 그 공동체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눔의 공동체 자체가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의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모가 있다는 증거인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작은 가족 공동체의 창조자이고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의 창조자이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수많은 부모도 포함됩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서 주임 신부를 할 때 첫 주일 헌금은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들은 다른 어떤 주일보다 더 많은 돈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줄 돈이 흘러넘쳤습니다.
각자 사는 것이 빠듯하지만 이웃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힘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있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가족이 부모가 존재하고 그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나눔의 공동체인 교회 자체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도 또 다른 표징을 보이라면 이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가족을 사랑하게 될 수 없고, 하느님 없이 가족 아닌 사람들과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8,14-21: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절). 유다인들에게 누룩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조심하라는 누룩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인간성의 병폐, 부패의 요소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예수님께 어제 복음에서 요구한 메시아적인 징표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현세적인 태평성대를 바라는 것이다. 헤로데의 누룩이란 권력과 부귀를 통한 자신의 영달을 말한다. 지상에서의 권세와 재력과 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현세적인 승리, 현세적인 안락이었다.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생각밖에 못 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신다. 몇 번이나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신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백성도(6,14-15), 종교와 정계의 지도자들도(2,6.16.24; 3,6.22; 6,16; 7,5) 친척들도(3,21.31-35), 고향 사람들도(6,1-6), 그리고 제자들도(4,13.40; 6,52; 7,18; 8,17-21)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뜻으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다(8,22-26).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다(8,27-30).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욕을 가지고 현세적인 누룩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떠한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악표양의 누룩을 모두 버리고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 누룩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느 대학 교수가 자기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간단한 테스트를 한다면서 시험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런데 시험지에는 빨간 점 하나만 찍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교수는 종이에 뭐가 보이는 지를 적는 것이 테스트라고 말했습니다.
30분이 지난 뒤, 교수는 시험지를 걷어갔습니다. 교수는 곧바로 시험지를 보면서 학생들이 쓴 글을 읽어주셨습니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시험지 중앙에 찍힌 빨간 점에 관해 서술했습니다. 점과 종이의 비율, 가운데 찍힌 점의 위치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교수는 이 모두를 읽어준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오로지 빨간 점에만 집중했습니다. 주변의 하얀 종이에 관심을 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지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얀 종이와도 같지요. 우리의 삶은 이 안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부분인 빨간 점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무궁무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를 빨간 점이라는 아주 작은 부분에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자기 삶을 확장해야 합니다. 특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에서 계속 확장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립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악’을 말합니다. 악이란 것은 눈에 훤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빵이 없다는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앞서 교수님이 나눠 준 시험지의 경우와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하얀 여백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부분인 빨간 점에만 바라보는 학생들처럼, 제자들은 눈앞의 문제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하면서 들었던 말씀, 또 보았던 기적들을 보면서, 자기 삶을 확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빵의 기적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매여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했을 때의 기쁨과 희망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삶을 확장해야 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통해 자기 삶을 분명히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비록 태양이 사라져도, 나는 한 줄기 빛을 얻으리라(커트 코베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창세 7,1)
온 세상이 잠겨버리는
대홍수 속에서도
의로운 이들은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안식처를 찾아 들어간다네.
극심한 혼란이 닥쳐오더라도
주님께 대한 신뢰로
건강한 삶을 이어온 이들은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인간의 굳은 마음,
즉 완고함이 반영된 법은 복음서 곳곳에서 보여집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
분명히 법보다 사람이 우선인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옳다고 자처하고 거룩하다고 여기는
권력자들의 잘못된 위계적인 질서를 다시 잡아주십니다.
모든 것 위에 두려워해야 할
심판자 하느님이 계심을 모르고 날뛰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정의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간이 정한 위계질서를 만들어 권력을 행사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질서를 끊어버리실 것입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허위, 허풍, 허세, 자기기만으로
자신을 두르고 가식과 위선의 옷을 입고
기득권자들과 권력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을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늘 열려 있지만 마음이 메마른 사람은
열린 하늘을 보지 못하는 법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2.18.화."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 15)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모순의
누룩들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누룩을 알아야
지나친 욕망의
누룩에
우리가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누룩을
조심하고
누룩을
없애는 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우리가
제대로
닦는 것이
깨달음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허황하게
떠벌린
누룩은
깨달음의
은총을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누룩의 흐름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과
함께 흐르는
삶입니다.
누룩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참모습을
회복하는 길이
누룩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그 길을 삶으로
보여주십니다.
헤로데의
누룩이 아니라
복음의 자유를
만끽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우리의 생활이
누룩이 아니라
복음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6,5-8; 7,1-5.10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7,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
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