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도협을 떠나 세 시간의 운전 끝에 드디어 티벳인들의 도시 샹그리라(香格里拉) 에 도착했다. 오랜 옛날부터 차마고도를 오가며 보이차를 실어 나르던 마방들이 쉬어가던 역참(驛站)이자 해발 3300미터의 아름다운 고원도시 샹그리라, 하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1958년 중국이 점령한 이래 옛 티벳 땅(지금의 서장과 청해성 일부)에서 떨어져 나와 운남성에 귀속되었으며 중디엔(中甸)이라는 원래의 이름조차도 샹그리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땅이 바로 이곳이다.
티벳인들은 운남에서부터 운반된 보이차를 끓인 찻물에다가 야크 버터와 소금을 넣은 후 100번 이상 저어서 그들만의 독특한 차인 수유차(酥油茶)를 만들어서 마셨단다. 티벳인들이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산다는 수유차는 야크 버터가 잘 녹여져 있기 때문에 일반 보이차 보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열량도 매우 높다고 한다.
춥고 건조한 고원지대에서 야크나 양 고기와 유제품 위주의 식생활을 주로 하는 티벳인들에게 있어서 수유차는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해 주고, 소화를 도와주며, 장에 끼인 기름기를 제거해 주고, 체액의 분비를 촉진하는 필요 불가결한 음료이기에 “차는 피(血)요, 고기(肉)요, 목숨(命)”이라는 속담까지 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3일을 굶을 수는 있지만 수유차는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 수유차를 마시고 있는 라마승
원래 샹그리라라는 이름은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1933년에 쓴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이상향(유토피아)’를 뜻하는 지명이름이었다. 그 책이 발표된 이후 많은 탐험가, 여행가, 지리학자들이 티벳, 인도, 네팔 등지에서 샹그리라를 찾고자 했지만 소설에서 묘사된 풍경과 일치하는 곳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중국이 자체 조사를 바탕으로 운남성 북부에 있는 더친(德钦)의 매리설산(梅里雪山)이 소설 속의 카라콜산과 피라미드 형상이 일치하고 붉은 계곡도 매리대협곡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중디엔과 덕흠 일대가 소설 속의 '샹그리라'라고 공표하였다. 그리고 2001년에는 중디엔의 이름을 샹그리라로 바꾸었다. 그러나 힐튼이 말한 샹그리라가 실제로 어느 곳인지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정설이다.
샹그리라 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티벳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제일 큰 사원이자 ‘작은 포탈라궁’이라고도 불리는 송찬린사(松贊林寺)를 보러 갔다 티벳어로 ‘송찬린’은 하늘 삼 계의 세 신이 노는 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송찬린사는 여러 채의 크고 작은 사원과 수많은 부속시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달라이 라마 5세 때인 1679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지만 대부분 최근에 복원되어서 그런지 옛 정취를 느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진정한 샹그리라의 경치는 나파해(纳帕海)나 매리설산(梅里雪山) 부근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또 시간도 없는 관계로 송찬린사는 밖에서만 둘러 본 뒤 바로 나파해로 갔다.
샹그리라 시내를 벗어나 214번 국도를 따라가는 도로 옆으로 산양과 야크 때가 풀을 뜯는 한가로운 초원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조금 더 가자 거대한 산줄기 아래 끝없이 펼쳐진 초원 너머로 하늘색의 너른 호수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 곳이 바로 세계인들이 꿈꾸는 ‘마음의 이상향’을 희미하게나마 맛볼 수 있게 해 준다는 그 유명한 나파해(호수)다.
옛날 중디엔과 더친을 오가던 마방들이 말들에게 풀을 뜯기기 위해 쉬어가 던 곳, 건기에는 그저 드넓은 초원이었다가 우기인 여름이 되면 호수로 변하는 이 신비한 호수는 여름에도 내리는 비의 양에 따라 호수의 크기와 모양이 그때 그때 달라진다고 한다. 코발트 빛 하늘 가득 피어 오르는 뭉게구름,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광활한 초원,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눈 덮인 설산... 그 동안 내가 꿈꾸어 오던 유토피아가 내 앞에 실재로 나타나 있었다. 나는 나파해에서 시간의 미아가 되었다.
▲ 내 마음의 이상향 나파해
나파해에서 중디엔으로 이어진 푸른 국도는 이제 본격적으로 험준한 협곡으로 치닫는다. 더친까지 남은 길은 180킬로미터, 이제부터 본격적인 차마고도의 험준한 길이 시작된다고 하니 저녁식사 전까지 더친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나마 이곳은 중국의 서부임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시간과 같은 시간대를 쓰기 때문에 저녁 9시나 되어서야 해가 진다고 하니 해가 지기 전까지는 더친에 도착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식사는 가는 도중에 있는 티벳 마을에서 하기로 했다.
금사강(金沙江) 오른편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국도를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다. 금사강은 총 길이 2,300km로 청해성의 남부 지역에서 발원하여 운남성과 사천성을 지나 사천성 남부에서 장강과 합류하는 강인데 옛날부터 사금이 많이 나서 금사강이라고 불린단다. 누런 황토 빛 금사강을 따라 한 시간쯤 북쪽으로 달려가니 하룡(賀龍)이라는 곳에 금사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있었다.
하룡교를 건너 이번에는 금사강을 오른쪽에 끼고 북쪽으로 달려가자 티벳 특유의 고원지대가 펼쳐지면서 깎아지른 듯한 진사강의 깊은 협곡에 거미줄 같이 복잡하게 엮여 있는 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들이 얽기 설기 얽혀 있는 것을 보니 차마고도는 하나의 길이 아니었던 같다. 하기야 요새도 비가오면 쓸려 내려온 토사와 돌덩이들 때문에 길이 자주 끊긴다고 하니 도로를 정비하는 인력과 장비가 부실했던 옛 날에는 지금보다도 더 길을 제대로 유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비로 길이 막히면 그 옆에 길을 다시 내고, 그 길이 막히면 또 그 옆으로 길을 내고… 이런 식으로 수 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증거가 바로 저것 이리라.
거미줄 같이 산허리를 휘돌아 감고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바라보며 1시간쯤 더 달려가자 펀즈란(奔子栏)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했다. 펀즈란은 중국 운남성 디칭장족자치주(迪慶藏族自治州)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리지앙에서 더친으로 가는 길의 중간에 위치한다. 펀즈란 역시 마방들을 위한 역참이었으며, 동주린(东竹林) 사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중 도시로 규모가 적었고 길거리를 오가는 마을 사람들과 스님들은 소박하고 인정이 넘쳐 보였다. 중디엔에서 펀즈란까지 약 80여 킬로미터, 더친까지는 아직도 100킬로미터 가까이 더 달려야 한다.
펀즈란을 지나 경사진 길을 힘들게 올라가자 ‘금사강 제1만(金沙江第一湾)’이라는 표지판 너머로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도 길가에 잠시 차를 세우고 금사강 제1만을 보기 위해 전망대로 내려갔다. 전망대에 서자 저 멀리 아래로 그 유명한 금사강 제1만이 위용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 금강산 제1만
금사강 제1만을 뒤로 하고 조금 더 가자 저 멀리 백마설산(白馬雪山)이 자태를 들어낸다. 숨가쁘게 올라온 고갯마루에는 해발고도 4292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 있었고, 이정표 허리춤에는 오색의 타르쵸가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타르쵸는 긴 줄에 나란히 매어있는 노랑, 빨강, 흰색, 파랑, 녹색의 조그만 깃발들로 그 안에는 깨알 같이 라마교 경전이 적혀 있었다. 티벳사람들은 타르쵸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바람이 경전을 읽고 가는 소리라고 한단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표지판 밑에 섰다. 해발고도 4292m, 여기가 차마고도의 도로 중 가장 높은 곳이라고 했다. 차도 오르기 힘든 이 높은 고개를 마방들은 어떻게 넘었을까? 그리고 이 고개를 지나 매리설산을 거쳐 라싸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그들이 어떻게 그 인내와 고난을 감당 할 수 있었는지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 백마설산 입구에 있는 해발고도 4292m 이정표
시간은 이미 저녁 7시가 지났지만 아직도 환하다. 븍경 표준시를 사용하기 때문에 저녁 9시는 되어야 해가 진다고 한다. 우리는 더친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단 인근 산골마을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마침 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약 40여 가구 정도가 흩어져 사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이 곳의 집들은 그 구조가 한국의 시골 농가와 비슷해 보였다. 집과 헛간이 따로 분리돼 있었고, 마당에는 대부분 마구간과 돼지우리가 있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낡고 초라한 상점 하나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상점으로 들어가 물을 한 병 사면서 상점주인에게 식사가 가능한 곳을 물어보자 자기집에서도 식사가 된다고 했다.
옷은 비록 누추해 보였지만 순박한 웃음이 나그네를 편하게 해주는 상점주인은 불쑥 찾아온 이방인들을 환대해 주었다. 아마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가끔 이곳에 들려서 식사도 하고, 또 수유차도 맛보고 갔나 보다. 간단한 나물과 빠바라고 불리는 티벳 전통 빵, 그리고 수유차를 주문하자 상점주인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수유차 만드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수유차를 만드는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먼저 물을 가득 부은 큰 주전자에 떡차라고 불리는 보이차 덩어리를 잘라서 넣고 나서 팔팔 끓인 다음, 그 찻물을 설동(薛董)이라는 나무통에 부어 넣고 나서 야크 젖으로 만든 버터와 소금을 집어 넣고 한참을 젓더니 다 되었다며 주전자에 담아서 주었다.
몇 가지 나물과 티벳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빠바라는 빵, 그리고 우리나라의 막걸리 같은 색깔의 수유차가 전부였지만 내 생전 처음 대하는 티벳의 전통 식사에 마음만은 만수성찬을 대한 것보다도 더 풍요로웠다. 그러나 빠바는 먹을 만 했지만 수유차는 야크 냄새 때문에 나처럼 비위가 약한 사람이 그냥 마시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예전에 티벳을 다녀온 사람이 일러준 대로 나물과 건포도를 잔뜩 넣은 빠바를 안주 삼아 함께 마시니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 수유차와 티벳 빵 빠바
시간이 없어서 저녁 식사를 마치자 마자 서둘러 더친(德欽)으로 향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에야 도착한 더친은 산자락마다 안개를 칭칭 감은 채 낮 선 이방인을 맞아 주었다. 약 6만여 명의 인구가 사는 더친은 중디엔과 마찬가지로 운남과 티벳을 오가던 마방들이 거쳐가던 역참으로 발달한 도시였으며 1950년대까지만 해도 티벳 땅이었으나 중국이 티벳을 강제점령하면서 운남 땅으로 바뀐 곳이다.
더친에서 하루 저녁을 보낸 뒤 아침 일찍 마지막 목적지인 소금마을 옌징(鹽井)을 향해 출발했다. 더친에서 옌징으로 가는 길은 완연한 티벳의 풍경이다. 비록 행정구역으로는 운남에 속해 있지만, 그 먼 옛날부터 티벳인들이 살았고 그들의 손에 가꾸어져 왔던 지역답게 곳곳에 그들의 손때가 묻어있다. 높은 언덕이나 조금 신성해 보이는 길목에는 어김없이 쵸르텐(불탑)이 세워져 있고, 쵸르텐에 매달린 타르쵸가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길을 가던 티벳인들이 쵸르텐과 타르쵸를 향해 합장하며 외우는 '옴마니 반메훔(Om Mani Padme Hum, 唵嘛呢叭咪吽)'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 쵸르텐과 타르쵸 앞에서 기도하는 티벳인
더친에서 얼마 가지 않아서 티벳8대 신산(神山)의 하나인 매리설산(梅里雪山)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 설치된 매
리설산 전망대가 나왔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매리설산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매리설산의 주봉 카와 카보(Kawa karbo, 6,740m)는 운남성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일년 내내 녹지 않는 만년설에 덮여 있으며 워낙 험해서 등정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매리설산 아래로 차마고도의 하늘길이 열려 있었다. 보이차를 운반하던 마방들은 카와 가보의 주변을 지날 때 자신들이 준비해 온 타르쵸를 산마루에 걸고, 롱다(불경을 적은 오색의 종이조각)을 하늘에 뿌렸다고 한다. 마망들에게 있어서 이 길은 종교적 의식의 순례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 매리설산과 차마고도 하늘길
매리설산 전망대를 벗어나 조금 더 가자 란창강이 우리를 맞는다. 운남성 서북부의 협곡에는 노강(怒江), 란창강(瀾滄江), 금사강(金沙江)이 서로 60여 킬로미터의 사이를 두고 나란히 남쪽으로 수백여 킬로미터를 흐르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룬다. 중국은 이 세 갈래의 하천과 그 주변일대를 '삼강병류(三江并流)'라고 명명하였고, 삼강병류는 200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란창강은 청해고원에서 발원하여 티벳을 지나 운남을 관통한 뒤, 미얀마와 라오스의 경내에서 메콩강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미얀마,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을 거쳐 마지막으로 베트남의 남해로 흘러 드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긴 강이다. 설산과 협곡, 울창한 수림, 푸르른 초원이 황토 빛 강물과 어우러진 란창강의 풍경은 삼강병류 중에서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란창강 협곡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국도에는 곳곳에 산사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은 우기 때는 더욱 심해서 큰 비가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길이 끊긴다고 한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마고도 구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또 가장 험하다는 불산향(佛山鄕)에 도착했다.
란창강(瀾滄江) 깊은 계곡의 협곡을 따라 이어진 불산향의 차마고도는 너무 가파르고 험했으므로 새와 쥐만 다닐 수 있다고 해서 조로서도(鸟路鼠道)라고 불렸다고 한다. 마방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런 길을 오가며 길에서 먹고, 길에서 잤으며, 길에서 죽었다. 마방들이 도중에 왜 그렇게 많이 죽어야 했는지 절벽의 바위를 깎아서 낸 위태로운 길을 보고나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떠남과 다시 돌아옴’이 업(業, 카르마)인 이들 마방들에게 있어서 이 길은 영원한 로망의 아름다운 하늘길이기도 하다.
우기에 이 길을 따라 마방들이 실어 나른 보이차는 맛이 특별히 좋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마방들과 그 들이 끌고 가는 말들이 이 험한 고갯길을 넘어가며 흘린 땀과 눈물이 보이차에 스며 들어 찻잎 속 발효효소를 더 활성화 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 길에서 만난 보이차를 싣고 가는 마방들
한동안 산허리를 오르내리던 길은 차츰 고도를 낮춰 란창강을 바로 옆에 끼고 나란히 선다. 여기서부터는 란창강을 경계로 운남성과 티벳자치구가 나뉜다고 한다. 불산향(佛山鄕)을 지나 조금 더 가자 ‘옌징 48km’라는 도로표지판이 나온다. 잠시 후면 이 길고 가슴 설렜던 여정도 종착역을 맞는다.
란창강을 따라 10여 분쯤 더 올라가자 양쪽 길가에 수많은 차들이 도열해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길이 막혔는지 차들이 아주 길게 늘어서 있다. 아마 산사태로 길이 끊겼나 보다. 차를 세워 놓은 채 길 옆의 나무그늘에 모여 앉아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트럭 운전사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한 트럭운전사가 앞에 길이 끊어져서 못 간다고 했다. 언제쯤 뚫릴 것 같으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른다며 손을 홰홰 내 젖는다. 이런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중국 사람들은 정말 느긋하다. 마냥 그렇게 기다리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카드를 치거나 맥주를 마시면서 논다.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 다시 이 길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랐다. KBS의 ‘차마고도’에 소개된 이래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는 소금마을 옌징, 그곳에 꼭 가보고 싶었지만 언제까지 이곳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우리는 다음에 올 때는 이 길을 따라 옌징을 거쳐 라싸까지 가보리라 다짐하면서 아쉽지만 그곳에서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만약 다시 한번 이곳에 올 기회가 온다면 이 길을 차를 타는 대신 마방들과 함께 걸어서 가고 싶다.
▲ 214번 도로를 따라 대리-리지앙-샹그리라- 펀즈란-더친에 이르는 여정
여태까지 온 노정을 되 집어서 더친, 샹그리라, 리지앙까지 돌아오는 길은 다시 한번 지나는 길임에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리지앙부터 사천성 판지화(攀枝花)까지는 새로운 길이었는데 소문처럼 판지화 이 후의 금사강은 제대로 된 위용을 보여 주었다. 이 길을 따라 성도에 이르는 도중에도 여산대불, 야안, 아미산 등 명승고적과 아름다운 자연이 즐비했지만 그곳들을 방문하는 것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서둘러 북으로 북으로 차를 몰았다.
이제 몇 시간만 더 가면 서안에 도착한다. 섬서성 남부의 큰 도시 한중(漢中)을 가로지르는 한수(漢水)를 건너며 당나라 시성 두보(杜甫)가 별세하기 전 무한(武漢)에서 고향 장안(長安, 서안의 옛 이름)을 그리며 지었다는 시 ‘강한(江漢, 장강과 한수)’의 첫 몇 구절을 떠 올려 본다.
강한사귀객 (江漢思歸客) 장강과 한수의 물가에서 고향 그리는 나그네
건곤일부유 (乾坤一腐儒) 천지간에 헛되이 썪고 있는 이사람
편운천공원 (片雲天共遠) 조각구름처럼 하늘 멀리 떠도니
영야월동고 (永夜月同孤) 긴긴밤 혼자 떠 있는 달처럼 고독하네
여행이 우리에게 활력을 되찾아 주고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큼 가볍고 설레는 것 또한 없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여정은 정처 없는 방황에 다름없는 것, 서안에 들어서자 정겨운 도시의 내음이 오랜 여정에 지친 우리를 활짝 손 벌려 맞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