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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결(修心訣)
보조국사 지눌
譯 김원각<시인·역경위원>
수심결은 수행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세인들에게도 널리 읽혀져야 할
마음 닦는 길의 지름길이다. 인간이 누려야할 행복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이 해방의 길은 외부가 아닌 자신의 마음에 있음을 극명하게 가르쳐주는 지침서이다. 마음은 바로 자신의 처소이다.
여기에 절을 짓고 등불을 내걸지 않는다면
고통의 그림자는 사라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윤회고통 마치 불난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러 있는가
三界熱惱 猶如火宅
其忍淹留 甘受長苦
欲免輪廻 莫若求佛
若欲求佛 佛卽是心 心何遠覓
삼계(三界:욕계·색계·무색계)를 윤회하는 고통은 마치 불난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오랜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그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不離身中 色身是假 有生有滅
眞心如空 不斷不變
故云百骸潰散 歸火歸風
一物長靈 蓋天蓋地
바로 이 몸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여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이 진심(眞心)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육체는 죽으면 흩어져 불이나 바람의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마음)은 영원히 신령하여 하늘과 땅을 덮는다.’하였다.
嗟夫今之人 迷來久矣
不識自心是眞佛
不識自性是眞法 欲求法而遠推諸聖
欲求佛而不觀己心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미혹된 지가 오래되어
자기 마음이 참부처인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품이 참 진리인줄 알지 못해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면 멀리 성인들만 추앙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는다.
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
堅執此情 欲求佛道者
縱經塵劫 燒身燃臂
敲骨出髓 刺血寫經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뜻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長坐不臥 一食卯齋 乃至轉讀一大藏敎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只益自勞爾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눕지 않고 오래 앉아 참선만 하며, 아침 한 끼만 먹으며 나아가 모든 대장경을 다 읽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해도 이는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알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찾지 않아도 절로 얻게 될 것이다.
망령된 생각 여의면 그대로 부처
그대 몸에 있는데도 보지 못할 뿐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 智慧德相
叉云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그러므로 세존께서‘널리 모든 중생을 관찰하니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하시고
또 이르시되 ‘(모든 중생의) 가지가지의 허망된 생각들이
다 원만히 깨달은 여래의 묘심(妙心)에서 나온다’하셨다.
是知離 此心外 無佛可成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모든 여래도
오직 이 마음을 밝히신 분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역시 마음을 닦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응당 이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밖에서 찾지말라.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問若佛性 現在此身
旣在身中 不離凡夫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본래 스스로 원만한 것이라
단지 망령된 생각들만 여의면 곧 그대로가 부처일 것이다.
묻기를 “만약 불성이 지금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이 몸 안에 있으므로 범부를 떠난 것이 아닌데
因何我今 不見佛性
更爲消釋 悉令開悟
答在汝身中 汝自不見 汝於十二時中
知飢知渴 知寒知熱 或嗔或喜
어째서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석하여 속속들이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답하길 “그대 몸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 가운데서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는 것을 알고, 춥다, 덥다 하는 것을 알고 혹 성내거나 기뻐할줄 아는데
竟是何物 且色身 是地水火風
四緣所集
其質頑而無情 豈能見聞覺知
能見聞覺知者 必是汝佛性
이것이 결국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서
그 바탕이 둔하여 감정이 없으니 어찌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이다.
故臨濟云 四大不解說法聽法
虛空不解說法聽法
只汝目前 歷歷孤明
勿形段者 始解說法聽法
그러므로 임제 스님은‘이 몸뚱이는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 못하고
단지 그대 눈 앞에 밝음이 역역하지만
형상이 없는 그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하였다.
所爲勿形段者 是諸佛之法印 亦是汝本來心也
則佛性 現在汝身 何假外求
汝若不信 略擧古聖 入道因緣
令汝除疑 汝須諦信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 없는 그것’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째서 헛되이 밖에서 구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믿을 수 없다면 간략하게 옛 성인들이 도를 깨친 인연을 들어
그대의 의심을 풀어줄테니 그대는 잘 듣고 믿기 바란다.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견성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昔異見王 問婆羅提尊者曰 何者是佛
尊者曰 見性是佛
王曰 師見性否 尊者曰 我見佛性
王曰性 在何處 尊者曰 性在作用
옛날에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견성(見性)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스님은 견성했습니까” “나는 불성(佛性)을 보았습니다.”
“그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불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王曰是何作用 我今不見
尊者曰 今現作用 王自不見
王曰於我有否 尊者曰 王若作用
無有不是 王若不用 體亦難見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지금도 나타나서 작용하고 있습니다만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할뿐입니다.”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만약 왕께서 작용하고 있다면
불성 아닌 것이 없지만 왕께서 만약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몸도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王曰若當用時 幾處出現
尊者曰 若出現時 當有其八
王曰其八出現 當爲我說 尊者曰 在胎曰身
處世曰人 在眼曰見 在耳曰聞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나타날 때는 여덟군데로 나타납니다.”
“그 나타나는 여덟군데를 나를 위해 설명해주십시오.”“태(胎)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는 놈이라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 놈이라 하고,
在鼻辨香 在舌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現俱該沙界 收攝在一微塵
識者知是佛性 不識者喚作精魂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을 땐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으며, 발에 있으면 부지런히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계를 다 감싸지만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곧 불성인줄을 알지만 모르는 자들은 정혼(情魂)이라 부릅니다.”
王聞心卽開悟
又僧 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誡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바로 열리었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이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려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화상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입으로만 진리 말하고 사견에 빠지면
자신도 그르치고 남도 잘못되게 한다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 在眼 空花亂墜
其僧 言下有省 上來所擧古聖
入道因緣 明白簡易 不妨省力
‘어떻게 보림해야 합니까.’
‘하나의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허공의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
그 스님은 이 말에 곧 깨달음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옛 성현이
도에 들어간 이야기가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로움을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因此公案 若有信解處
卽與古聖 把手共行
問汝言見性 若眞見性 卽是聖人
應現神通變化 與人有殊
이러한 공안(公案:즉 공부의 규범이 되는 것)을 의지해서
믿음과 이해가 있게 되면 바로 옛 성현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물었다. ‘스님은 성품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만일 참으로 성품을 보았다면 바로 성인이시라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를 것입니다.
何故今時修心之輩 無有一人
發現神通 變化耶
答汝不得輕發狂言
不分邪正 是爲迷倒之人
그런데 어째서 요즈음 마음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대는 함부로 미친소리를 하지 말라.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지 못하면,
이는 미혹에 빠진 사람이다.
今是學道之人 口談眞理 心生退屈
返墮無分之失者 皆汝所疑
學道而不知先後 說理而不分本末者
是名邪見 不名修學
요즘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은 포기상태여서
도리어 분수에 없다는 잘못에 떨어진 자들은 다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되 선후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되 본말(本末)을 분간하지 못하면
이를 일컬어 사견(邪見)이라 하지 수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 無分之失 : 중생으로서는 성인의 경지에 들 수 없다는 착각
非唯自誤 兼亦誤他
其可不愼歟
夫入道多門 以要言之
不出頓悟漸修兩門耳
이런 이는 자신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겸하여 남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대개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문에 지나지 않는다.
雖曰頓悟頓修 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 已是 多生 依悟而修 漸熏而來
至於今生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是亦先悟後修之機也 則而此
비록 돈오와 점수는 최상의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미 여러 생애에 걸쳐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진리를 들으면 즉시 깨닫게 되어 일시에 모든 것을 끝낸다.
하지만 사실 이것 역시 먼저 깨달고 뒤에 닦은 근기이다.
망상 사라지면 광명의 작용 생기니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야
敦漸兩門 是千聖軌轍也
則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因修乃證
所言神通變化 依悟而修 漸熏所現
非謂悟時 卽發現也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다.
과거의 모든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 나아갔고, 그 닦음에 의해 증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대가 말한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如經云 理卽頓悟 乘悟倂消
事非頓除 因次第盡
故主峰 深明先悟後修之義曰
識氷池而全水 借陽氣以鎔消
경에 이르기를 “이치로는 돈오하여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사라지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례차례로 없어진다”하였다.
그러므로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는 뜻을 분명히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어 있는 연못이 순전히 물인줄 알지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悟凡夫而卽佛 資法力以薰修
氷消卽水流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心靈通
應現通光之用
범부가 곧 부처인줄을 알지마는 법의 힘을 빌려서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 바야흐로 그 물에 씻는 보람이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과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하였다.
是知事上神通變化
非一日之能成 乃漸熏而發現也
況事上神通 於達人分上 猶爲妖怪之事
亦是聖末邊事 雖或現之 不可要用
그러므로 사실상 신통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익히고 닦아야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사실상의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요사하고 괴이한 일이고
또한 성인에게도 말단의 일이라서 혹 그것이 나타나더라도 사용하지 않는다.
今時迷癡輩 妄謂一念悟時
卽隨現無量妙用 神通變化
若作是解 所謂不知先後 亦不分本末也
旣不知先後本末 欲求佛道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으면
즉시 한량 없는 묘한 작용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견해를 가진다면 이른바 선후를 알지 못하고 본말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미 선후와 본말을 알지 못하고 불도를 구하려 한다면
如將方木 逗圓孔也 豈非大錯
旣不知方便故 作懸崖之想
自生退屈 斷佛種性者 不爲不多矣
旣自未明 亦未信他人 有解悟處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끼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미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절벽을 바라보는 듯한 생각을 내어
스스로 포기하여 부처의 종성(種性)을 끊는 이가 적지 않다.
이미 스스로가 밝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깨달음까지도 믿지 않고,
見無神通者 乃生輕慢
欺賢誑聖 良可悲哉
신통이 없는 이를 보고는 곧 업신여긴다.
이것은 성현을 속이는 일이니 참으로 슬프다.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점점 익혀서
성인의 자질을 길러가는 것이 점수
問汝言頓悟漸修兩門 千聖軌轍也
悟旣頓悟 何假漸修
修若漸修 何言頓悟
頓漸二義 更爲宣說 令絶餘疑
“스님께서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라 하였습니다.
깨달았다면 이미 돈오한 것인데 어째서 점점 닦아야 하며,
그 닦음이 만약 점점 닦아야 할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돈오와 점수의 두 가지 뜻을 다시 설명하여 남은 의심을 끊게 해주십시오.”
答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 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 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으로 삼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신령한 지혜가 참 부처인줄을 알지 못해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치듯이 흘러다니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바른 길로 들어가
한 생각에 심광(心光)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 성품에는 본래 번뇌가 없고,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하는 것이다.
점수라는 것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랜 세월의 습기(習氣)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그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云漸修也 比如孩子 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점 익혀서 공을 이루고, 또 오랜동안 성인의 자질을 잘 길러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실하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성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問作何方便 一念廻機 便悟自性
答只汝自心 更作什 方便
若作方便 更求解會 比如有人
不見自眼 以謂無眼 更欲求見
“어떤 방편을 써야 한 생각의 기틀을 돌려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쓴다는 말인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旣是自眼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更無求見之心 豈有不見之想
自己靈知 亦復如是 旣是自心 何更求會
이미 자신의 눈인데 어째서 다시 보려고 하는가.
만약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보지 못한다는 마음이 있겠는가.
자신의 신령스런 앎도 역시 그와 같아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째서 알려고 하는가.”
지혜의 마음이 그대의 본래면목
이 마음 깨친다면 삼계를 초월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問上上之人 聞卽易會 中下之人 不無疑惑
更說方便 令迷者趣入
만약 알려고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며
다만 알 수 없다는 것임을 알면 바로 견성(見性:성품을 봄)이니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들은 즉시 쉽게 알겠지만 중하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설하여 모르는 사람들을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答道不屬知不知 汝除却將迷待悟之心
廳我言說 諸法如夢 亦如幻化
故妄念本寂 塵境本空
諸法 皆空之處 靈知不昧
‘도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리석게도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버리고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수아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녕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진경(塵境)은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는 신령스런 지혜가 어둡지 않으니,
* 진경(塵境) : 감각의 대상인 객관세계. 즉 眼,耳,鼻,舌,身,意에 비춰지는 대상인 色,聲,香,味,觸,法을 말 함.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亦是三世諸佛 歷代祖師 天下善知識 密密 相傳底法印也
若悟此心 眞所謂不踐階梯 徑登佛地
步步超三界 歸家頓絶疑
이 공하고 고요한 신령스런 지혜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이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과 천하의 선지식이 은밀하게 서로 전한 진리(法印)이다.
만약 이 이런 마음을 깨친다면 참으로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이 삼계를 초월하고 집에 돌아가(歸家) 단박에 의심을 끊을 것이다.
* 본래 면목(本來面目) : 모든 사람이 갖추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성품을 말함.
* 歸家 : 본래 부처인 마음자리를 뜻함
便與人天爲師 悲智相資 具足二利
堪受人天供養 日消萬兩黃金
汝若如是 眞大丈夫 一生能事 己畢矣
問據吾分上 何者是空寂靈知之心耶
그래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고, 대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므로
하루에 만량의 황금을 소비하듯이 한량없이 귀한 공양을 인간과 천상으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이와 같으면 참다운 대장부로서 일생의 할 일을 다 마쳤다 하겠다.’
‘저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것이 공적(空寂)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의 마음입니까.’
答汝今問我者 是汝空寂靈知之心
何不返照 猶爲外覓
我今據汝分上 直指本心
令汝便悟 汝須淨心 聽我言說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하고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이다.
어째서 돌이켜 비추지 않고 밖에서 찾는가.
내가 지금 그대의 입장에 의거해서 바로 본래의 마음을 가리켜
그대를 깨닫게 할 것이니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말을 잘 들어라.
보고 듣고 말하고 동작하는 것은
그대의 본심이지 육신이 아니다
從朝至暮 十二時中 或見或聞 或笑或語
或瞋或喜 或是或非 種種施爲運轉
且道畢 竟是誰 能伊麽運轉施爲耶
若言色身運轉 何故有人 一念命終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보고, 듣고, 웃고, 말하며,
혹은 성내거나 기뻐하거나 또는 옳다, 그르다 하는 갖가지의 행위와 동작은
필경 누가 그렇게 하게 하는가를 말해보라.
만약 육신이 동작하게 한다면, 어째서 금방 명이 끊어진 사람의
都未壞爛 卽眼不自見 耳不能聞
鼻不辨香 舌不談論 身不動搖
手不執捉 足不運奔耶 是知能見聞動作
必是汝本心 不是汝色身也
몸은 아직 썩지 않았는데도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하고,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손은 잡지 못하고, 발은 걷지 못하는가? 이러므로 보고, 듣고, 동작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본심이지 그대의 육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況此色身 四大性空 如鏡中像
亦如水月 豈能了了常知
明明不昧 感而遂通恒沙妙用也
故云神通 幷妙用 運水及搬柴
더구나 이 육신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의 성품은 비어서 거울 속의 형상과 같고
물 속의 달과 같은데, 어떻게 항상 뚜렷이 알고,
분명하고 어둡지 않아 갠지스강의 모래 수 같이 한량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신통과 묘한 작용은 물을 긷고, 나무를 운반하는데(일상생활에) 있다’하였다.
且入理多端 指汝一門 令汝還源
汝還聞鴉鳴鵲噪之聲麼 曰聞
曰汝返聞汝聞性 還有許多聲麽
曰 到這裏 一切聲一切分別 俱不可得
그리고 진리에 들어가는 길은 많지만 그대에게 한 길을 가리켜서 그대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그대는 저 까마귀 우는 소리와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예 듣습니다.”
“그대는 돌이켜서 그대가 듣고 있다는 성품을 들어 보아라. 거기에도 많은 소리가 있는가?”
“거기에는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없습니다.”
曰奇哉奇哉 此是觀音入理之門
我更問爾 爾道到這裏 一切聲 一切分別 總不可得
旣不可得 當伊麽時 莫是虛空麽
曰元來不空 明明不昧
“기특하고 기특하구나. 이것이 바로 관음보살이 진리에 들어간 문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거기에 일체의 소리와 일체의 분별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미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면 그러한 때는 허공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원래 공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가 않습니다.”
曰作麽生 是不空之體 曰亦無相貌 言之不可及
曰此是諸佛諸祖壽命 更莫疑也
“그러면 어떤 것이 공하지 않은 것의 본체인가?”“형상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의 생명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어째서 깨친 뒤에도 점차로 닦습니까”
“무명의 습 갑자기 없앨 수 없기 때문”
故云在聖智而不輝
隱凡心而不昧
旣不增於聖 不少於凡
佛祖奚以異於人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라고 해서 빛나는 것도 아니고
범부의 마음에 숨어 있다고 해서 어둡지 않다’하였다.
이미 성인이라 해서 불어나는 것도 아니오, 범부라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면
부처나 조사들이 어찌 보통 사람과 다르겠는가.
而所以異於人者 能自護心念耳
汝若信得及 疑情頓息
出丈夫之志 發眞正見解
親嘗其味 自到自肯之地
그러나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은 자기 마음을 잘 보호하는 것뿐이다.
그대가 만약 이 말을 믿어서 의심이 담박 없어지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참되고 바른 견해를 일으켜서
직접 그 맛을 보고 스스로 긍정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則是爲修心人 解悟處也
更無階級次第 故云頓也
如云於信因中 契諸佛果德
分毫不殊 方成信也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닦는 사람의 깨달은 자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계급이나 차례가 없으므로 돈(頓:문득, 담박)이라 한다.
이것은 ‘믿음의 요인이 모든 부처의 과덕(果德:최상의 결실로 얻어지는 덕)과 일치하여
조금의 차이도 없어야 비로소 믿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 말과 같다.
問旣悟此理 更無階級
何假後修 漸熏漸成耶
答悟後漸修之義 前已具說
而復疑情未釋 不妨重說
물었다. “이미 이런 이치를 깨달아서 다시는 계급이 없다면
어째서 깨친 뒤에도 닦아서 점차로 익히고 점차로 이루려고 합니까.”
답했다. “깨달은 뒤에 점차로 닦아야 하는 뜻은 앞에서 이미 말했다.
그러나 의심을 풀지 못했으니 거듭 설명하겠다.
汝須淨心 諦聽諦聽 凡夫 無始曠大劫來
至於今日 流轉五道 生來死去
堅執我相 妄想顚倒
無明種習 久與成性
그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자세히 들으라. 범부는 시작이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다섯 갈래의 세계(五道)에 흘러다니며 태어나고 죽고 하되,
‘나’라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뒤바뀐 망상(妄想顚到:현재의 번뇌)과
무명의 습기(無明種習:근본 번뇌)가 오랫동안 지금의 성품을 이루었다.
雖到今生 頓悟自性 本來空寂
與佛無殊 而此舊習
卒難除斷 故 逢逆順境
瞋喜是非 熾然起減
비록 금생에 이르러 자신의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금방 깨달았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온 습성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기 때문에 역경이나 순경을 만나면
성내거나 기뻐하며,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이 불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客塵煩惱 與前無異 若不以般若
加功着力 焉能對治無明 得到大休大歇之地
객관 세계에 대한 번뇌가 그전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지혜로써
공들이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무명을 다스려 크게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
如云頓悟雖同佛 多生習氣深
風停波尙湧 理現念猶侵
又杲禪師云 往往利根之輩 不費多力
投發此事 便生容易之心 更不修治
이것은 ‘단박 깨치면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의 습기가 깊구나.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엄습한다’하는 말과 같다.
또 대혜 종고(宗杲)선사도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이런 이치를 알고는 아주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는 닦지 않는다.
日久月深 依前流浪 未免輪廻
則豈可以一期所悟 便撥置後修耶
故悟後 長須照察 妄念忽起 都不隨之
損之又損 以至無爲 方始究境
그대로 세월이 가면 그전처럼 유랑하게 되어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된다’하였다.
그러니 어찌 한번 깨쳤다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릴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따르지 말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究境)이니,
天下善知識 悟後牧牛行是也
雖有後修 己先頓悟妄念本空
心性本淨 於惡斷 斷而無斷
於善修 修而無修 此乃眞修眞斷矣
천하의 선지식이 깨달은 뒤에 소먹이는 행이 바로 이 때문이다.
비록 뒤에 닦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임을 먼저 깨쳤기 때문에 악을 끊되,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되, 닦아도 닦음이 없어야 이것이 참다운 닦음이고 참다운 끊음이 되는 것이다.
故云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
圭峰總判先悟後修之義云 頓悟此性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與佛無殊
依此而修者 是名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也
그러므로 ‘온갖 행을 다 닦으나 오직 무념으로 근본을 삼는다.’하였다.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총괄하여 말하기를‘이 성품은 원래 번뇌가 없고
완전한 지혜와 성품이 본래 갖추어져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담박 깨닫고,
이 깨침에 의해 수행하면 이것을 일러 최상승선(最上乘禪), 또는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若能念念修習 自然漸得百千三昧
達磨門下 展轉相傳者 是此禪也
則頓悟漸修之義 如車二輪 闕一不可
或者 不知善惡性空 堅坐不動
만약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면 저절로 차츰 차츰 백천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이 바로 이런 선(禪)이다.’하였다.
그러므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이치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으면 안된다.
혹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빈 것임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면서
捺伏身心 如石壓草
以爲修心 是大惑矣
故云聲聞 心心斷惑 能斷之心是賊
몸과 마음을 조복받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 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으려 하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적이다.’하였다.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
但諦觀殺盜婬妄 從性而起
起卽無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所以云 不怕念起 唯恐覺遲
又云念起卽覺 覺之卽無
다만 살생하고 도적질하고 음행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성품으로부터 일어난 것임을 자세히 관조한다면
일어남이 곧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본 바탕이 고요한데 무엇을 다시 끊을 것인가.
그러므로‘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말고 다만 깨달음이 늦을까를 두려워하라.’하였고
또‘생각이 일어나거던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진다.’하였다.
故悟人分上 雖有客塵煩惱
俱成醍醐 但照惑無本
空華三界 如風卷煙
幻化六塵 如湯消氷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객관 세계에 대한 번뇌가 있다 해도
그것은 다 제호(醍醐)를 이룬다. 다만 미혹이란 근본이 없는 것임을 관조하여 알면
허공의 꽃처럼 실체가 없는 삼계(三界)는 바람에 사라지는 연기와 같고,
허수아비와 같은 객관 세계는 마치 끓는 물에 녹는 얼음과 같을 것이다.
* 제호(醍醐)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맛있는 음식. 여기서는 부처의 성품에 비유했음
若能如是念念修習 不忘照顧
定慧等持 則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辜業 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煩惱盡時 生死卽絶
만일 이처럼 생각생각에 닦고 익히며, 마음을 관조하기를 잊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면 곧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자연히 없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밝게 드러날 것이다. 죄업이 자연히 없어지고,
공덕이 절로 늘어나서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도 끊어질 것이다.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 백억 화신을 나타내되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응용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고,
* 霄 : 하늘 소, 닮을 초(소)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問後修門中 定慧等持之義 實未明了
更爲宣說 委示開迷 引入解脫之門
答若說法義 入理千門 莫非定慧
즐거움만 있고 근심이 없으리니, 이를 일러 크게 깨친 세존이라 한다.”
“깨친 뒤에 닦아나가는 문중에서는 선정과 지혜를 동등히 가진다는 뜻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자세히 말씀하시어 미혹을 없애고 해탈의 문에 들게 해 주십시오.”
“만약 법과 그 뜻을 말한다면,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은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取其綱要則但自性上 體用二義
前所謂空寂靈知是也 定是體慧是用也
그 요강을 든다면, 단지 자기 성품의 본체와 작용의 두 가지 뜻이니,
앞에서 말한 비고 고요함과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그것이다. 선정은 곧 본체요 지혜는 작용이다.
마음에 산란함 없는 것이 선정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지혜
卽體之用故 慧不離定
卽用之體故 定不離慧
定則慧故 寂而常知
慧則定故 知而常寂如
그래서 본체를 떠나지 않는 작용이므로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았고,
작용을 떠나지 않은 본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떠나지 않았다.
따라서 선정은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도 항상 아는 것이고,
지혜는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도 항상 고요한 것이다.
曹溪云 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癡自性慧
若悟如是 任運寂知 遮照無二
則是爲頓門箇者 雙修定慧也
그래서 조계스님이‘마음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 자기 성품의 선정이요,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기 성품의 지혜이다.’한 말과 같다.
만약 이처럼 깨달아서 고요함과 아는 것에 자유로워서 선정(遮)과 지혜(照)가 둘이 아니게 된다면
이것이 곧 돈문에 들어간 뛰어난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닦는 것이 된다.
若言先以寂寂 治於緣慮
後以惺惺 治於昏住
先後對治 均調昏亂
以入於靜者 是爲漸門劣機所行也
그러나 만일 고요함으로써 반연하는 생각들을 다스리고
그 다음에 깨어있는 정신으로 혼미함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면서,
선후를 따라 다스려 혼미함과 산란함을 가라앉혀
고요함에 들어가는 사람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
雖云惺寂等持 未免取靜爲行則
豈爲了事人 不離本寂本知
任運雙修者也 故曹溪云
自悟修行 不在於諍
그는 비록 깨어있음과 고요함을 평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고요함만을 취하는 수행을 면하지 못하니,
어찌 깨달은 사람이 본래의 고요함과 본래의 앎을 떠나지 않고
자유롭게 두 가지를 함께 닦는 것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계스님은
‘스스로가 깨쳐서 수행하는 것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若諍先後 卽是迷人
則達人分上 定慧等持之義
不落功用 元自無爲 更無特地時節
見色聞聲時 但伊麽 着衣喫飯時
만약 선후를 따지면 그는 미혹된 사람이다.’하였다.
그러므로 깨친 사람의 경지에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뜻은
애써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원래 무위라서 어떤 특별한 때도 없다.
즉 빛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그러하고, 옷 입고 밥 먹을 때에도 그러하고,
但伊麽 屙屎送尿時 但伊麽 對人接話時
但伊麽 乃至行住坐臥 或語或默 或喜或怒
一切時中一 一如是 似虛舟駕浪 隨高隨下
如流水轉山 遇曲遇直
똥 누고 오줌 눌 때에도 그러하고, 남과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고,
내지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언제든지 항상 그러하다. 마치 빈배가 물결을 따라 올랐다 내렸다 하고,
흐르는 물이 산을 돌아나갈 때 굽이 돌아 가기도 하고 바로 흘러가기도 하듯이
而心心無知 今日騰騰任運
明日任運騰騰 隨順衆緣 無障無碍
於善於惡 不斷不受
마음마음이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무심하여 자유롭고,
내일도 무심하여 자유로워서 온갖 반연을 따라도 아무런 장애가 없고,
악을 끊거나 선을 닦는다는 생각도 없다.
선악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이는
반연을 잊고 없애는 공부하라
質直無僞 視聽尋常 則絶一塵而作對
何勞遣蕩之功無
一念而生情 不假忘緣之力
然障濃習重 觀劣心浮
또한 순박 솔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보고 들음에 무심하여 한 티끌도 상대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감정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업의 장애는 두텁고 습기는 무거우며,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서,
無明之力大 般若之力小 於善惡境界 未免被動靜互換
心不恬淡者 不無忘 緣遣蕩功夫矣
如云六根攝境 心不隨緣 謂之定
心境俱空 照鑑無惑 謂之慧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으며, 선악의 경계에서는 마음이 동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하여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을 잊고 없애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육근이 경계를 대해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해서 미혹됨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 한다.
此雖隨相門定慧 漸門劣機所行也
對治門中 不可無也
若掉擧熾盛 則先以定門 稱理攝散
心不隨緣 契乎本寂
이것은 비록 수상문(隨相門)의 선정과 지혜이고, 점문(漸門)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라지만
경계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망상이 들끓거든 먼저 선정의 이치대로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서,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계합하게 하며,
* 수상문(隨相門) :경계에 따라 순차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공부
若昏 沈尤多 則次以慧門 擇法觀空 照鑑無惑
契乎本知 以定治乎亂想
以慧治乎無記 動靜相亡
對治功終 則對境而念念歸宗
만약 혼침이 더욱 많으면 이젠 지혜로써 법에 따라 공(空)함을 관조하여 미혹됨이 없음을 비추어서
본래의 앎에 계합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선정으로써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써 멍청함(無記)을 다스려서 동요함도 고요함도 서로 없어지고,
경계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노력도 없으지면, 경계에 대하여 생각생각이 근본으로 돌아가고
遇緣而心心契道 任運雙修
方爲無事人 若如是則眞可謂定慧等持
明見 佛性者也
반연을 만나도 마음마음이 도에 계합하는 등 마음대로 안팍을 닦아나가야
비로소 걸림없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져
불성을 밝게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한 말과 같다.”
問據汝所判 悟後修門中
定慧等持之義 有二種
一自性定慧 二隨相定慧
물었다. “스님의 말씀대로, 깨친 뒤에 닦는 방법을 보면,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돈문과 점문의 선정과 지혜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나요”
自性門則曰 任運寂知 元自無爲
絶一塵而作對 何勞遣蕩之功
無一念而生情 不假忘緣之力
判云此是頓門箇者 不離自性
자기 성품이란‘걸림없는 고요함과 아는 것이 원래 무위여서
하나의 티끌도 상대함이 없으니 어찌 번뇌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으며,
한 생각의 망령된 정(情)도 일어남이 없으니 반연을 잊으려 힘쓸 필요도 없다.’하고는
결론짓기를‘이것이 담박에 깨닫는 문(頓門)에 들어간 사람이 자기 성품을 떠나지 않고
定慧等持也 隨相門則曰
稱理攝散 擇法觀空
均調昏亂 以入無爲
判云此是漸門劣機所行也
선정과 지혜를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문(隨相門)은
‘이치에 따라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법에 따라 공을 관조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서 무위에 들어간다’하고
결론 짓기를‘이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다’하셨습니다.
就此兩門定慧 不無疑焉
若言一人所行也 爲復先依自性門 定慧雙修然後
更用隨相門對治之功耶
爲復先依隨相門 均調昏亂然後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수행함에 있어서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고루 닦은 뒤에
다시 수상문, 즉 상(相)을 따르는 방법으로 경계를 다스려나가야 합니까.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공부로써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뒤에
以入自性門也 若先依自性定慧
則任運寂知 更無對治之功
何須更取隨相門定慧耶
如將皓玉 彫文喪德
자기 성품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만약 먼저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고요함과 아는 것이 자재하여 다시 대상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공력이 없을 텐데
어째서 수상문, 즉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마치 흰 옥에 무늬를 새김으로써 본바탕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若先以隨 相門定慧
對治功成然後 趣於自性門
則宛是漸門中劣機 悟前漸熏也
豈云頓門箇者 先悟後修 用無功之功也
그리고 만약 먼저 상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얻어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완성한 뒤에 자기 성품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점차로 수행하는 열등한 근기가 깨닫기 이전의 점차로 닦아나가는 공부이니,
어째서 돈문(頓門)의 사람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되 노력 없는 노력을 쓰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若一時無前後則二門定慧
頓漸有異 如何一時竝行也
만약 전후가 없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면,
돈문과 점문의 두 가지 문의 선정과 지혜가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말을 따라 알려하면 의혹 생기고
뜻 얻고 말 잊으면 힐문 필요없다
則頓門箇者 依自性門 任運亡功
漸門劣機 趣隨相門 對治勞功
二門之機 頓漸不同 優劣皎然
云何先悟後修門中 竝釋二種耶
즉 돈문의 사람은 자기 성품에 따라 걸림이 없으니 노력할 것이 없고,
점문의 열등한 근기는 상을 따라서 대상에 따라 다스려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돈문과 점문의 두 문은 서로 근기가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방법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아울러 말씀하십니까.
請爲通會 令絶疑情
答所釋皎然 汝自生疑 隨言生解
轉生疑惑 得意忘言 不勞致詰
若就兩門 各判所行 則修自性定慧者
다시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어주십시오.”
답하다.“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다시 의혹이 생기고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힐문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 두 문에서 각기 수행할 바를 판단한다면,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자는
此是頓門 用無功之 功竝運雙寂
自修自性 自成佛道者也
修隨相門定慧者 此是未悟前漸門劣機
用對治之功 心心斷惑 取靜爲行者
이 돈문의 노력없는 노력으로 돈문의 고요함과 수상문의 고요함을 아울러 운용(運用)하여
자기 성품을 스스로 닦아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방법으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자는 깨치기 전의 점문의 열등한 근기로서
대상을 따라 다스리는 공력으로 인해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해서 수행하는 사람이다.
而此二門所行 頓漸各異 不可參亂也
然悟後修門中 兼論隨相門中對治者
非全取漸機所行也
取其方便 假道托宿而已
그러므로 이 두 문의 수행은 돈(頓)과 점(漸)이 다르니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 닦는 문에서 겸해서 상(相)을 따라 다스리는 법을 말한 것은
점문(漸門)의 근기가 닦는 것(수행법)을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해서 길을 빌리고 숙소를 의탁한 것뿐이다.
何故於此頓門 亦有機勝者 亦有機劣者
不可一例 判其行李也 若煩惱淡薄 身心輕安
於善離善 於惡離惡 不動八風 寂然三受者
依自性定慧 任運雙修 天眞無作
왜냐하면 이 돈문에도 역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로, 가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대해서도 무심하고, 여덟 가지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고,세 가지 느낌에도 고요한 이는
자기 성품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하여 자유롭게 겸해서 닦아나가되 천진하여 조작됨이 없다.
動靜常禪 成就自然之理
何假隨相門對治之義也 無病不求藥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에 있으므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한 것인데
왜 상을 따라 다스리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생사의 세계에 자재로울 수 없다
雖先頓悟 煩惱濃厚 習氣堅重
對境而念念生情 遇緣而心心作對
被他昏亂 使殺昧却寂知常然者
卽借隨相門定慧 不忘對治
그러나 비록 먼저 깨달았다 하더라도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면 생각생각에 감정이 일어나고, 반연을 만날적마다 마음은 대상을 만들어
혼침과 산란에 빠져서 고요함과 아는 마음이 흐려지는 사람은
곧 상을 따라 수행하는 선정과 지혜를 빌려서 다스려야 함을 잊지 말고,
均調昏亂 以入無爲 卽其宜也
雖借對治功夫 暫調習氣
以先頓悟心性本淨 煩惱本空故
卽不落漸門劣機 汚染修也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감이 마땅하다.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를 빌려서 잠시 습기를 조절하지만
이미 마음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에 물들은 수행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何者修在悟前 則雖用功不忘 念念熏修
着着生疑 未能無礙 如有一物
礙在胸中 不安之相 常現在前
日久月深 對治功熟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이란 비록 공부를 잊지 않고 생각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을 일으켜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공부가 익으면
則身心客塵 恰似輕安 雖復輕安
疑根未斷 如石壓草 猶於生死界
不得自在 故云 修在悟前 非眞修也
悟人分上 雖有對治方便 念念無疑
몸과 마음과 객관의 대상이 편안해진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한 것 같으나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돌로 풀을 눌러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
자재로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 닦는 것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비록 대상에 따라 다스리는 방편이 있지만 생각생각에 의심이 없어
不落汚染 日久月深 自然契合天眞妙性
任運寂知 念念攀緣一切境
心心永斷諸煩惱 不離自性
定慧等持 成就無上菩提 與前機勝者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가면 자연히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계합되어
고요하고 아는 것이 자유롭고, 생각생각이 일체의 경계에 반연하면서도
마음마음은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되 자기의 성품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평등히 가져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이루어 앞에 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更無差別 則隨相門定慧
雖是漸機所行 於悟人分上
可謂點鐵成金
若知如是 則豈以二門定慧
有先後次第二見之疑乎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상을 따르는 수상문의 선정과 지혜는
비록 점차로 수행해야 하는 근기를 가진 자가 행하는 것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쇠로 금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안다면
어찌 자성문(自性門) 수상문(隨相門)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
앞뒤의 차례가 있다는 두 가지 견해의 의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글에 집착말고 참뜻을 바로 깨닫고
자기에게 돌아가 근본에 계합해야
願諸修道之人 硏味此語
更莫狐疑 自生退屈
若求丈夫之志 求無上菩提者 捨此奚以哉
切莫執文 直須了義 一一歸就自己 契合本宗
바라건대, 모든 도 닦는 사람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해서
다시는 의심으로 인해 스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약 장부의 뜻을 가지고 최상의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버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결단코 글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참뜻을 깨달아서 일일이 자기에게 돌아가 근본에 계합한다면
則無師之智 自然現前 天眞之理 了然不昧
成就慧身 不由他悟
而此妙旨 雖是諸人分上
若非夙植般若種智 大承根器者
스승없는 지혜가 저절로 앞에 나타나고 천진한 이치가 분명하여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말미암아 깨닫지 않으리라.
이러한 묘한 뜻은 비록 모든 사람에 해당되긴 하나
일찍이 지혜의 종자를 심은 대승의 근기가 아니면,
不能一念而生正信 豈徒不信
亦乃謗讟 返招無間者 比比有之
雖不信受 一經於耳 暫時結緣 其功闕德
不可稱量 如唯心訣云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능히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지 못할 것이다. 한갓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여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자가 허다히 많다.
그러나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한 번 귀를 스쳐 잠시라도 인연을 맺은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심결>에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부처가 될 인연을 맺고,
學而不成 猶蓋人天之福
不失成佛之正因 況聞而信 學而成
守護不忘者 其功德 豈能度量
追念過去輪廻之業 不知其幾千劫 墮黑暗入無間
배우고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이렇게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서 이루고,
이를 잊지 않고 수호하는 사람의 그 공덕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과거에 윤회하던 업을 돌이켜 보면 몇 천 겁을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受種種苦 又不知其幾何 而欲求佛道 不逢善友
長劫沈淪 冥冥無覺 造諸惡業
時或一思 不覺長우 其可放緩
再受前殃 又不知誰復使我 今値人生
온갖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또 불도를 구하고자 해도 착한 벗을 만나지 못하여
그 얼마나 오랜 겁을 나고 죽는 바다에 빠져든 채 깨닫지 못하여 많은 악업을 지었던가.
때때로 한 번씩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긴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또 게으름을 피워
지난 날의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로 하여금 지금 인생으로 태어나
爲萬物之靈 不昧修眞之路
實謂盲龜遇木 纖芥投鍼
其爲慶幸 曷勝道哉
만물의 영장이 되어 진리의 길을 닦도록 하였는가.
실로 눈먼 거북이 나무를 만나고, 작은 겨자씨가 바늘에 꽂힘과 같으니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살펴라
我今若自生退屈 或生懈怠
而恒常望後 須臾失命 退墮惡趣
受諸苦痛之時 雖欲願聞一句佛法 信解受持
欲免辛酸 豈可復得乎
내가 지금 만일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악도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한 구절 불법을 들어서 믿고, 알고, 받들어서
고통을 면하고자 해도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及到臨危 悔無所益
願諸修道之人 莫生放逸 莫着貪淫
如救頭然 不忘照顧
無常迅速 身如朝露 命若西光
위태로운데 이르러서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다.
원컨대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방일하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이 살피고 돌아보는 것을 잊지 말라.
덧없는 세월은 신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석양과 같으니,
今日雖存 明亦難保 切須在意 切須在意
且憑世間有爲之善 亦可免三途苦輪
於天上人間 得殊勝果報 受諸快樂
況此最上乘甚深法門
비록 오늘 살았다 해도 내일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기고 간절히 마음에 새겨라.
또 세상의 유위(有爲)의 선을 따라도 삼악도의 고통을 면하고,
천상과 인간에서 뛰어난 과보를 얻어 온갖 즐거움을 누리는데,
하물며 이 최상승의 깊은 법문이겠는가.
暫時生信 所成功德 不可以比喩 說其少分
如經云 若人以三千大千世界七寶
布施供養爾所世界衆生 皆得充滿
又敎化爾所世界一切衆生 令得四果 其功德 無量無邊
잠시만 믿더라도 그 공덕은 어떤 비유로도 말할 수 없다.
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세상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여 다 만족하게 하고,
또 그 세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사과(四果)를 얻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없고 끝없을 것이다.
不如一食頃 正思此法 所獲功德
是知我此法門 最尊最貴 於諸功德 比況不及
故云經 一念淨心是道場
勝造恒沙七寶塔
그러나 밥 한 그릇 먹는 잠깐동안만이라도 이 법을 바로 생각하여 얻는 공덕만은 못하다.’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이 가장 높고 귀하여 모든 공덕에 견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이 바로 도량이니,
갠지스강의 모래 수와 같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寶塔畢竟碎爲塵一念淨心成正覺
願諸修道之人 硏味此語 切須在意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칠보탑은 마침내 부서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하였다.
원컨대 수도하는 모든 사람은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간절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
보배 있는곳 알고도 구하지 않겠는가
今若不修 萬劫差違 今若强修
難修之行 漸得不難 功行自進
嗟夫 今時人 飢逢王饍 不知下口
病遇醫王 不知服藥
지금 만약 닦지 않으면 만겁에 어긋나고, 지금 만약 억지로라도 닦으면
닦기 어려운 수행도 점점 어렵지 않게 되어 공행(功行)이 저절로 나아갈 것이다.
슬프다, 지금 사람은 배가 고프면서도 맛난 음식을 보고 먹을 줄을 알지 못하고,
병이 들어 의사를 만났어도 약을 먹을 줄 모르는구나.
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 如之何也已矣
且世間有爲之事 其狀可見 其功可驗
人得一事 歎其希有
我此心宗 無形可觀 無狀可見 言語道斷
참으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하며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
또 세상 유위(有爲)의 일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있고 그 공덕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지 일만 얻어도 희귀하다고 감탄한다.
그러나 나의 이 마음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心行處滅 故天魔外道 毁謗無門
釋梵諸天 稱讚不及
況凡夫淺識之流 其能髣髴
悲夫井蛙 焉知滄海之闊 野干何能師子之吼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마와 외도들이 훼방하려 해도 길이 없고
제석천과 범천의 모든 하늘이 칭찬하려 해도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얄팍한 범부의 무리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우물안 개구리가 어찌 바다의 넓음을 알며, 여우가 어찌 사자의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故知末法世中 聞此法門 生希有想 信解受持者
已於 無量劫中 承事諸聖 植諸善根
深結般若正因 最上根性也
故金鋼經云 於此章句 能生信心者 當知是人
그러므로 말법 세상에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한 생각을 내어 믿고, 이해하여 받아 지니는 사람은
이미 한량없는 겁동안 모든 성인을 받들어 섬겨서 모든 선근을 심고
지혜의 바른 인연을 깊이 맺은 최상의 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 ‘이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는 사람은
已於無量佛所 種諸善根
又云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願諸求道之人 莫生怯弱
須發勇猛之心 宿劫善因 未可知也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은 것이다.’하였고,
또 ‘이 법은 대승의 마음을 낸 사람과 최상승의 마음을 낸 사람을 위하여 설한다.’하였다.
원컨대 도를 구하는 사람은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부디 용맹스런 마음을 내어야 한다. 숙세에 맺은 거룩한 인연 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若不信殊勝 甘爲下劣 生艱阻之想
今不修之 則縱有宿世善根 今斷之故
彌在其難 展轉遠矣 今旣到寶所
不可空手而還 一失人身 萬劫難復
만약 이처럼 수승한 근기를 믿지 않고 스스로 못났다고 하여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금생에 닦지 않으면 비록 숙세에 선근이 있다 해도 지금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되므로
더욱 어려워지고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미 보배 있는 곳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회복하기 어려우니
請須愼之 豈有智者 知其寶所
反不求之 長怨孤貧
若欲獲寶 放下皮囊
청컨대 부디 삼가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찌 보배가 있는 곳을 알고도
그것을 구하지 않다가 오래 외롭고 가난함을 원망하겠는가.
만약 보배를 얻으려거든 그 가죽주머니를 놓아버려라.”
- 終 -
첫댓글 지혜의 마음이 그대의 본래면목
이 마음 깨친다면 삼계를 초월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問上上之人 聞卽易會 中下之人 不無疑惑
更說方便 令迷者趣入
만약 알려고 한다면 곧 알지 못할 것이며
다만 알 수 없다는 것임을 알면 바로 견성(見性:성품을 봄)이니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은 들은 즉시 쉽게 알겠지만 중하의 사람은 의혹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방편을 설하여 모르는 사람들을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答道不屬知不知 汝除却將迷待悟之心
廳我言說 諸法如夢 亦如幻化
故妄念本寂 塵境本空
諸法 皆空之處 靈知不昧
‘도는 알고 모르는데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어리석게도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버리고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허수아비와 같다.
그러므로 망녕된 생각은 본래 고요하고, 진경(塵境)은 본래 공한 것이다.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는 신령스런 지혜가 어둡지 않으니,
* 진경(塵境) : 감각의 대상인 객관세계. 즉 眼,耳,鼻,舌,身,意에 비춰지는 대상인 色,聲,香,味,觸,法을 말 함.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亦是三世諸佛 歷代祖師 天下善知識 密密 相傳底法印也
若悟此心 眞所謂不踐階梯 徑登佛地
步步超三界 歸家頓絶疑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