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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묵상글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 달고 단 포도나무는 못되어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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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26 04:04
- 달고 단 포도나무는 못되어도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걸까요?
아니면 ‘너희는 저들처럼 거짓 예언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겉모양은 양 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실은 이리들이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속지 말라고 하시는 거지만
오늘 저는 거짓 예언자가 되지 말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가?
거짓 예언자는 아닌가?
열매를 보면 안다고 하시는데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 그전에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를 가르는 기준은 뭣인가?
우선 행실을 뜻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
이웃 사랑의 행실과 욕심 채우기 행실.
이것을 기준으로 보면 제게는 두 가지가 다 있고
그러니 이 기준에서 저는 참과 거짓 둘 다입니다.
그러니 저는 거짓 예언자이거나 위선자이고
적어도 참 예언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음으로 열매란 주변 사람을 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 주변 사람을 보면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기준으로 보면 제 주변에는 참 좋은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러니 이 기준에서 저는 잘 산 것이요 참 예언자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제가 나쁜 짓,
제 욕심 채우는 짓만 했다면,
그래서 덕을 보게 하지는 않고 피해만 보게 했다면
제 주변에 좋은 분들이 없을 것이고 있다면 성인들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 주변엔 나쁜 분들이 하나도 없고
저를 속여먹거나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든지 저를 도우려는 분들만 계시며
그래서 오히려 제가 여러분을 이용해 먹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참 예언자는 못 됩니다.
그리고 제가 참 예언자가 못 된다는 것은,
참 예언자가 되려고는 하나 못 되었다는 뜻이며,
의도와 의지는 참 되려고 하나 불순물이 있고 불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시나무는 아니고 포도나무입니다.
그러나 달고 단 열매를 내는 포도나무는 못되고
신 포도 열매를 내는 포도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저는 찔러서 아프게 하는 가시나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적 단맛을 오로지 느끼게는 못하는 신 포도나무이고,
반대로 저에게 여러분은 신 포도를 드시면서도
영적인 단맛을 가려서 취하시는 분들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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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세기에 수십 명의 아기가 오늘날 영아 돌연사 증후군이라는 증상으로 죽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죽은 아기들을 부검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슴샘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정상이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이제까지 봤던 아기의 가슴샘은 가난한 가정의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 부검할 수 있는 아기 시신은 모두 가난한 가정에서만 가능했고, 대부분 설사나 영양결핍으로 가슴샘이 이미 위축된 상태였습니다. 이제까지 위축된 가슴샘을 정상으로 생각했으니, 영아 돌연사 증후군으로 죽은 아이의 가슴샘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즉, 가슴샘 비대로 아이의 기관이 눌러져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부유한 집에서는 아기 때 가슴샘을 키우려고 조치했습니다. 가슴샘에 방사선을 쬐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아기가 화상을 입거나 가슴샘이 위축되었고, 그 결과로 암까지 생겨 결국 1만 명이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과학 연구가 오히려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 이 세상에 큰 상처와 아픔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맞는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도 역시 모두 맞다고 하더라도 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주님만이 진리 그 자체임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다가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라고 하시지요. 이를 제대로 알기 위해 그들이 맺은 열매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의 상태와 가치를 알 수 있듯이, 그들이 맺는 열매가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이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 속에 숨어있는 거짓 예언자의 모습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할 때가 바로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을 알려고 노력하기보다, 주님을 알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이 세상에서 예언자의 모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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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바꿔라(노먼 빈센트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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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예수님께서는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면서,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십니다. 곧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 당신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첫째는 ‘뿌리’가 튼튼한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뿌리를 어디에 박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만약에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세상이 원하는 열매를 맺고자 할 것입니다. 곧 세상의 평가와 명예를 얻고자 할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이루고 자신을 실현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성취와 자기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좋은 나무의 두 번째 특성은 잘 받아먹는 나무입니다. 곧 양분을 잘 받아먹는 일,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먹는 일입니다. 그래야 은총을 건네주는 타인을 위한 자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받아먹은 줄을 알아야 잘 베풀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란 무엇일까요? 세상의 명예나 자신의 성취일까요? 우리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열매일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처럼, 자신을 훼손시킬 수 있는 곧 자신을 손해 볼 줄 아는 행동이요, 옳으면서도 질 줄 아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늘 아버지 앞에 겸손한 행동일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곧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늘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당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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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시골 사제관 앞 텃밭에 토마토, 오이, 고추, 상치, 가지, 파를 심었고, 좁은 공간이지만 농사짓는 형제님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알뜰하게 가꾸어 제법 식단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작은 정성이 있으면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제때에 거름을 주고 잡풀을 뽑으며 가꾸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사제관 뜰에는 무화과나무가 있었는데 많이 열렸고, 그래서 늘 기대되었습니다. 여러 새 들과 너구리, 스컹크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그들에게 맛있는 음식입니다. 그들은 단맛을 용하게 알고 무화과를 찾아왔습니다. 매서운 눈을 가지고 다가오던 그들이 구경거리였습니다. 잘 익은 좋은 열매는 사람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과일, 채소에 이르기까지 잘 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햇빛과 비, 그리고 밑거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보면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서 그 사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는지는 입술로 하는 말에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도 그 끝을 보면 놀라워할 사람도 있습니다. 또 그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기다리며 햇빛과 비, 거름을 주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고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멋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없어지면 힘이 듭니다. 따라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어야겠지만 기왕이면 갈수록 깊어지는 멋을 담아야 합니다. 겉은 화려하고 속 빈 강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갈수록 경륜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를 무서워합니다. 눈이 무섭다고 합니다. 제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의 속을 볼 줄 모릅니다. 다만 알고 보면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저를 무섭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지 않은지...... 따뜻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으로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겉만 보아서는 그 사람이 사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선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속이 훤히 드러나게 됩니다. 더군다나“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못 속입니다.” 그러므로 눈속임으로 하지 않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육의 열매를 지향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갈망합니다.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할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집니다.’ 결국, 신앙과 사랑으로 무르익은 삶만이 심판의 불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익은 좋은 열매가 되십시오! 혹 시들한 열매가 보이거든 햇빛을 보게 하고 비를 맞을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거름을 주십시오. “열매를 보면 나무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 자녀를 보면 부모를 짐작하여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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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복’을 주로 입고 다닙니다. 아침에 산보할 때도, 마트에 갈 때도, 식당에 갈 때도 사제복을 입고 다닙니다. 산보할 때는 마주치는 사람들이 ‘Father'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본인도 가톨릭 신자인 경우에는 더욱 반갑게 자신도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식당에서도 주인이 신자인 경우는 반갑게 인사하고, 덤으로 반찬을 주기도 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마트에서 ’떡‘을 사는데 주인이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얼마 전에 새로 온 본당신부냐고 물었습니다. 본인은 최근에 교통사고가 나서 한동안 성당에 못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의 본명을 물으니 ’헬레나‘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침에 저는 떡을 주로 먹는다고 말하니 이것저것 덤으로 싸주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사제복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제복이 저를 지켜주는 것 같았습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사제복을 입으니 가지 말아야 할 곳은 알아서 안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아닐지라도 나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서울에 있는 동창 신부님이 ‘Facebook'에 본당 가두선교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렸습니다. 개신교회는 가두선교를 적극적으로 하지만, 성당은 가두선교를 자주하지 않는 편입니다. 저도 2번 정도 교우들과 가두선교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3번에 걸쳐서 가두선교에 대한 교육을 마친 후에, 가두선교를 나섰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준비해간 선물도 나누어주고, 예비자 교리 신청서도 받았다고 합니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신청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쉬는 교우들도 인사하면서 다음부터 성당에 나가겠다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가두선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공동체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새 신자를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교를 통해서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내가 했던 일의 결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 마귀들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화려한 성전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국과 맺은 동맹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좋았던 나무도 거름을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빴던 나무도 정성을 다하고, 거름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밀은 계속 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늘 가라지가 아닙니다. 밀처럼 자란 사람이 가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이 자란 사람이 밀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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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조심해야 할 것을 들려주십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나타나지만 속은 이리들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은 이미 많이 만나봤을지 모릅니다. 양의 얼굴을 하고 다가와서는 그들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을 하고 와서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도 이런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양의 얼굴로 교회를 드나들지만, 그 안에는 이리들이 가득합니다. 그런 이리의 모습은 평상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사업이나, 자기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건드릴 때 이리의 얼굴은 드러납니다.
이러한 이리들은 교회를 공격하고 그 안에서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교회는 이미 이런 양의 틀을 쓴 이리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 늘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2000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내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우리의 영혼은 양과 이리 사이에 서 있습니다.
선한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양은 우리를 격려하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이리는 그 선함을 반대합니다. 선한 것을 꼭 모자란 것으로 표현하고 바보 같은 희생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양과 이리 가운데 섰을 때 늘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서 있을 때 우리는 양과 이리를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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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뷰티풀은 어디?
찰나로 지나갔던 화장품 광고였습니다.
광고의 마지막은 이런 말로 끝맺습니다.
너의 뷰티풀은 어디?
얼마 전 주교님과 함께 어디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차 안에서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어두운 부분이 있고 밝은 부분이 있어. 잘 못 하는 것도 있고 잘하는 것도 있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밝은 부분을 보는 것이고 잘하는 것을 봐주는 거야.
맞습니다. 우리는 뷰티풀한 곳을 찾아서 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을 찾고, 바라보고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대의 뷰티풀은 어디일까요?
그곳을 봐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또 격려해 주세요.
더욱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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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행복은 선택이다!
“참사람이 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시편119,33-34)
오늘 화답송 시편이 참 좋습니다. 이런 배움의 삶에 항구할 때 주님을 닮아 참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여정에 충실할 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에 이르고 참사람의 자유인이 됩니다. 공부중의 참 중요한 평생 공부가 참사람이, 참내가 되는 공부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갈길이 멀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다산>
“짐은 무겁고 길이 멀기에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논어>
그러니 하루하루날마다 좋은 선택과 훈련 및 습관화가 참사람이 되는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요! 천리길도 한걸음부터입니다. 하루하루 좋은 선택, 훈련, 습관을 통해 운명도 바뀝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의 면담에서 저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고 받은 대화의 요지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과거의 아픈 추억에 사로잡혀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들이 악의 유혹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의식적으로, 의지적으로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운명의 질곡에서, 악순환의 늪에서,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구원을, 행복을 선택했음을 뜻합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날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빛이자 희망이요 행복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다!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늘 잊지 않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즉시, 늘 붙여놓고 보라고 “행복은 선택이다”라는 말마디를 붓펜으로 A4용지에 선명하게 써드렸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바로 여기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주제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말을 바꾸어 “말과 글과 행실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아주 강렬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전혀 자기 성찰이 없는, 자기 공부가 없는 참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들이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오늘도 이와 유사한 사람들 참 많습니다. 적반하장, 내로남불, 표리부동,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거짓 예언자들로 진실과 겸손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언행을 보면 금방 거짓 예언자들임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너무 자명하여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입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가 문제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듯이 사람이 좋으면 말과 글도 행실도 좋습니다.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듯이, 사람이 나쁘면 말도 글도 행실도 나쁩니다. “사람은 고쳐쓰지 못한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란 비관적 말마디도 회자됩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참된 회개의 삶이, 참된 깨달음의 삶이, 참 좋은 선택과 훈련의 삶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나무는 바꿀 수 없어도 사람은 바꿀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 바로 이런 부단한 공부와 노력의 수행을 통해서입니다. 지성이며 감천의 은총입니다. 이런 노력이 주님을 감동시켜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변화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참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고 사랑할 때 우리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되고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 좋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선택한 수행들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계명을,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코 이런 사랑의 수행에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그 예전이 유다 임금 요시야요 그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는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그대로 걸어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았다.”(2열왕22,2)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이런 임금은 희망의 표징이요 백성들은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바로 요시야 임금의 진면목이 오늘 독서 후반부에 잘 드러납니다.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이렇게 임금과 백성이 모두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말씀,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 참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사느냐 묻는 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할 것이며 게시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맛으로, 기쁨으로, 재미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하루하루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의 선택보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선택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바로 다음 좌우명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도반들과 더불어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갈 때 가면은 저절로 벗겨지고, ‘정직(integrity)’하고 ‘투명(transparency)’한 참 나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더도 덜도 아닌 그대로의 나일뿐입니다. 속이 깨끗하면 저절로 겉도 깨끗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탐욕이 아니라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헛된 것을 보지 않게 제 눈을 돌려 주시고,
당신 길을 걷게 하시어 저를 살려 주소서.”(시편119,36-3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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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달렸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
내가 밝아야
나의 얼굴이 밝다
내가 고와야
나의 말씨가 곱다
내가 맑아야
나의 눈길이 맑다
내가 부드러워야
나의 손길이 부드럽다
내가 발라야
나의 발길이 바르다
내가 따뜻해야
나의 마음이 따뜻하다
내가 올곧아야
나의 삶이 올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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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마태 7,16)
열매를 보라
여기서 ‘거짓 예언지들’은 이단자들이 아니라, 덕의 가면을 쓰고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자를 사람들은 사기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까닭에 에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단자들 가운데에 덕성스러운 사람들이 사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한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그런 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실상 ‘이 거짓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일부가 덕 있는 척 거짓으로 꾸민들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그들은 금세 바탕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걸으라고 지시하신 이 길은 힘들고 고생스럽습니다. 위선자는 좀처럼 수고하려 하지 않으며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위선자는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14절)는 말로, 그 길을 찾아들지도 않았으면서 그 길에 들어선 척하는 자들과 실제로 그 길에 들어선 이들을 구별하십니다. 그러니 가면을 보지 말고 좁은 길을 따라 가는 이들의 행실이 맺는 열매를 보십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우리는 루카 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게 됩니다: 한 젊은이가 죽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께서 지나가시다가 들르셔서 그 젊은이를 측은히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2-14 참조).
하느님이 어진 사람들 속에 한결같이 계심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 보금자리를 치시는 영혼 안에는 무언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 안에 둥지를 틉니다. 하지만 영혼이 다른 대상들을 찾아 밖으로 나간다면, 그 영혼은 죽음을 맞을 것이고, 하느님도 그 영혼에 대하여 죽으실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자신에 대하여 죽지 않고, 자신 안에서 늘 살아 계십니다.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육체는 죽고, 영혼 자체는 살아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영혼에 대하여는 죽으시지만, 자신 안에서는 늘 살아 계십니다. 영혼 안에는 가장 넓은 하늘보다 더 광활한 능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광활하고, 우리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합니다. 그 능력은 훨씬 더 광활합니다.(192)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5절: 십자군 운동
십자군 운동의 의의:
십자군 운동의 의의는 전체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있다. 비록 피와 힘의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인 성공이 미미하였다 할지라도, 그 이념적인 이득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십자군들은 서구의 공동체 의식을 크재 강화하고, 유럽의 시야를 넓히고, 비잔탄과 동방, 특히 이슬람 문화와의 만남을 통하여 학문을 촉진하였다. 온갖 종류의 문명적이고 경제적인 재보(財寶)에 대한 활발한 교류가 시작되었다. 스콜라학에서 서구의 철학과 신학의 빛나는 진보는 동방과의 이 만남이 없이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군 운동은 또 서구의 신심생활에 더없이 깊고 매우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한없는 위험과 고생을 이겨내고, 종교적인 순례로 십자가를 진 구세주의 가난한 생활을 감수하였던 십자군 참가자들은, 청빈과 속죄 정신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상을 고향에서도 보급시켰다. 하나의 완전히 개인적인 신심이 중세 초기의 종교적인 공동체 체험을 대신하여 나타났다. 또한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얽었으며, 청빈운동이 각성되었다.(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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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7, 16. 17)
오늘 복음의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와 연관해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나무는 예수님이시고 좋은 열매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15장을 묵상하면서 나눴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지향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이고, 하느님으로부터 존재이고 하느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떨어져서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인 예수님 안에 살아갈 때, 그 나무의 가지인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항구히 머물 때 자연스레 때가 되면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가장 적당한 때 수도 생활을 시작해서 참 다행이었다, 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느끼는 것처럼 참으로 심각하면서도 신속하게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앞으로 수도 생활할 후학들이 걱정스러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는 존재이며, 또 모든 사람과 함께 있는 존재이다, 는 관점에서 볼 때 수도자의 이중적 삶의 운동의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살아가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으리라 봅니다. 예전엔 모든 것이 확실하고 분명했지만, 다원화된 세상에서는 어느 것도 확실한 게 없는 듯싶습니다. 수도자의 청빈, 정결 순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예전보다 더 많고 그럴듯한 갖가지 감언이설로, 진리와 오류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미묘한 요구들로 말미암아 수도자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는 본디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하느님께 속한 자이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상의 풍조에 맞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요구와 유혹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추려는 저 자신을 볼 때, 분명하고 확고한 성소의 동기가 없다면 자신의 신원을 유지하고 살아가야 할 후학들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7,15)하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연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주님이란 좋은 나무에 붙어 있은 지 벌써 50년이 훨씬 지났건만 아직도 제대로 익은 열매가 열리지 않은 듯싶어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열매가 지금은 익어가는 시기이지만 아직 수확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위안하면서, 수확의 시간까지 꿋꿋이 예수님의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합니다. “너희들은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7,20)라는 말처럼 혹자는 저를 보고 그토록 오랜 시간 수도 생활을 했으면서도 달린 열매마저도 볼품도 없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도 저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야 더더욱 실망이 클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십시오. 물론 지금껏 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부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다 저의 노력 부족이고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고려 때 지눌 선사가 표현하길 『소는 물을 먹어서 젖을 내고, 뱀은 물을 먹어서 독을 냅니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소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젖을 내고, 같은 물을 먹어 뱀은 사람을 해치는 독을 낸다는 뜻입니다. 존재가 바뀌지 않는 한 그 존재에게서 다른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저는 분명 제 존재를 바꿀 수 없지만,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은총에 온전히 의탁하고 봉헌하는 존재를 내치지 않고 항구하게 머무는 그 열정과 열성을 보시고 그 나무에 맞은 열매를 맺도록 바꿔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이비’라는 단어를 알고 자주 사용합니다. 그 뜻은 닮은 듯하지만, 닮은 게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이비가 무서운 이유는 진짜와 거의 흡사하기에, 누구나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사이비는 자신도 거짓 속에 살지만, 속아 따라오는 사람들도 거짓의 수렁에 빠뜨립니다. 가짜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면 아무도 속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사람은 이미 가짜가 아닙니다. 가짜(=작퉁)이면서 진짜(=명품)인 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거짓 예언자를 조심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저는 이 지면을 통해 고백합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이비 수도자는 아닙니다. 다만 익어가는 과정에 있고 미처 열매를 맺지 못했을 뿐입니다. 다만 저는 저의 실패와 실수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려고 몸부림치고, 예수님의 은총을 붙들고 살려는 제 마음만은 의심하지 말아 주시고 판단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 우리 모두 당신 안에 항구히 머물면서 언젠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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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는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6&id=2098435&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40625 22:41 ㅣNo.173660
“너희는 나무에서 맺은 그 열매를 보고 그것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둬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이처럼 좋은 나무에서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나쁜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좋은 열매를 못 맺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실제로 가시나무는 작은 포도와 비슷하게 생긴, 작고 검은 열매를 맺는단다. 그래서 엉겅퀴의 열매는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보면, 마치 무화과로 오인할 만큼 비슷하다나.
가짜와 위선이 판치고 짝퉁이 넘쳐나고, 진실이 왜곡되는 현실은 참으로 혼란스럽다. 권위가 한참 상실되고 졸부가 행세하는 곳에서 참되고 선한 것 찾기가 여간 쉽지 않다. 권위의 기준도 구분하기 힘든 시대이다. 예수님께서 ‘양의 옷차림으로 다가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라고 빗댄 거짓 예언자들을 식별하는 기준으로 그들의 행실을 눈여겨보라신다. 우리가 바라는 참된 권위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줄게다.
참된 권위는 말이 아닌, 삶 그 자체에서 드러나게 하지 않으려 해도 의당 드러나게 되리라. 마치 가시나무와 포도의 열매가 엉겅퀴와 무화과의 열매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엄연히 다른 것처럼. 진심으로 하는 것과 ‘척’만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가끔은 착한 척 거룩한 척하는 건, 겉으로 보기는 실제로 착하고 거룩한 것과 비슷해 때로는 헷갈리기도 할 게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마다 거짓 없는 ‘참된 마음과 진심’은 꼭 담아내야 하리라.
감동이 묻어나는 이야기 ‘콩쥐 팥쥐’에서, 새엄마인 팥쥐 엄마는 친딸 팥쥐만 위하고 콩쥐에게는 매몰차다. 세월이 지나면서 팥쥐는 거만한 아이가, 고생한 콩쥐는 겸손해져 복 받는 아이가 된단다. 이는 팥쥐처럼 되지 말고 콩쥐처럼, 다시 말해 팥쥐 엄마처럼 되지 말라는 거다. 그럼에도 팥쥐 엄마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웃에게는 냉정해도 자기 아이에게만은 갖은 정성이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에게도 이런 심성이 마음 한 구석에 있을 게다. 그렇지만 매사에 믿는 이다운 향내가 나야한다. 견뎌야 할 때는 참아야만 한다. 그 누구도 모르게 순명도 하자. 사람들은 몰라도 하느님은 아시리라. 콩쥐 같은 아이가 결국에는 대게 희망으로, 어차피 좋은 나무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될 터이니. 그분 은총이 함께하면, 그 어떤 처지에서도 밝은 인생이 되리라.
생명의 길은 그럴싸한 겉모습이나 화려하고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드러나는 삶을 추구한단다.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이는 우리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주님과 함께 걸으려는 그 마음일 게다. 우리는 일상에서 이웃의 겉모습과 말에 가끔은 속을 때가 참 많다. 그러니 우리를 정녕 구원의 삶으로 이끄는 게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척’만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참된 권위를 드러내는 삶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기쁨의 삶을 누릴 것이리라.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간직하고, 그분 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이들이다. 사실 우리 각자가 드러내는 행동과 생활이 가장 좋은 선교 방법일 게다. 때로 마음과는 다르거나 또는 아예 정반대 행동을 하게 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꼭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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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6.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기준을 일러 주십니다.
그 기준은 바로 그들이 맺은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식별 기준으로서 열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행실’과 ‘업적’에 따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가르치는 것들을 삶으로 옮기는지 그의 ‘행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의를 부르짖지만 정의롭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 가난의 가치를 열심히 말하지만 소유에 자유롭지 못한 모습, 겸손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 비천한 곳에 오신 예수님을 전하면서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모습들은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를 가려내는 기준입니다.
둘째, 그 ‘행실’이 맺고 있는 ‘업적’을 보아야 합니다.
참 예언자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꼭 맞는 삶은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고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물론 참예언자들도 그들의 행실이 가르침에 못 미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지향은 올바르지만, 인간적인 부족함과 나약함에서 오는지, 아니면 자신의 말과 전혀 다른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지향과 목적에서 오는지는 그가 맺는 열매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지향이 올바른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부족함을 채워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만일 지향이 올바르지 않다면, 그 지향을 아무리 숨기려고 하여도 오직 자신을 위한 열매로서 올바르지 못한 의도가 드러날 것입니다.
날마다 묵상하고 선포하는 하느님 말씀이 내 삶으로 드러나는지, 그리고 그 삶이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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