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의 提巖里虐殺事件 全貌
▲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 : 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났던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 사적 제299호, 경기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제암리학살사건(提巖里虐殺事件) : 일제강점기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으로 3·1운동 당시 일본군이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제암리는 발안에서 서쪽으로 2km쯤 가면 나오는 작은 농촌 마을로, 그 무렵에는 安氏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1919년 3월 말부터 마을 주변에서 만세 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지자 4월 15일 일본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중위 등 군인들은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한 뒤 창문을 통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 일본군은 이어 석유를 끼얹고 교회에 불을 지른 뒤 인근 마을에까지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건 직후 스코필드 등 선교사들이 미국 교회에 진상을 보고했고 일본의 야만적 통치가 국제사회에 알려지게 됐다.
1905년 8월 5일 건립된 제암리교회는 배재학당 설립자인 H. G. 아펜젤러 목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 그후 교도들의 증가로 1911년에는 8간 짜리 초가 예배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제암리에서도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밤마다 봉화불을 올렸고, 4월 5일 무렵에는 발안 장터에까지 진출했다. 그 며칠 후 제암리교회 앞마당에서 시작된 시위에서 안종후가 일본인 주재소장의 총에 맞아 쓰러지자 격분한 군중들은 일본인 경찰 1명을 타살하였다. 그러자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에 출동한 일본군 1개 중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성인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도록 한 후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교인들을 학살하였다.
그 후 제암리는 폐허의 마을로 변했고,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모두 살해된 데다 예수를 믿어 이런 재앙이 내렸다면서 주민들이 교회를 기피하여 해방되기까지 제암리교회는 좀처럼 부흥되지 못하였다.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4월 5일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발안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했다. 만세시위가 있은지 10일 후인 4월 15일 일본의 육군 중위 아리타 다케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은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라 하고 4·5만세시위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하더니 총격과 함께 교회당 문을 걸어잠그고 불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남편을 살려달라 애원하는 아낙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안종후를 비롯하여 남자 21명, 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팔탄면 고주리에서 김성렬 등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사건 후에도 일본헌병의 심한 감시로 희생자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4월 17일 의료선교사 스코필드가 유골들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했다. 언더우드는 참사현장을 돌아보고 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으며, 스코필드는 일본헌병 몰래 현장사진을 찍어 미국으로 보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여론화시켜 비판하기도 했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으며,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
*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 일기 발견… 조직적 은폐 드러나
▲ 우쓰노미야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
“제암리 학살 인정땐 帝國 불이익 주민이 저항해 살육한 걸로 했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나선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 주민 약 30명을 집단 학살한 사건을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공식 명칭은 ‘조선군’) 사령부가 조직적으로 은폐했음을 보여주는 당시 사령관의 일기가 발견됐다.
일기의 주인은 3·1운동 당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던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1861~1922) 대장. 이번에 발견된 15년분의 일기 등 사료 중에는 독립운동의 진압 실태와 민족운동가에 대한 회유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28일 보도했다. 우쓰노미야는 1918년 7월부터 1920년 8월까지 약 2년간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제암리 사건에 대해 그의 일기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가둬 놓고 아기까지 죽이고 방화했지만 일본군이 거짓 발표를 통해 이를 부인했음을 증명한다.
우쓰노미야는 그해 4월18일자 일기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하고 처분을 하면 가장 간단하겠지만 학살·방화를 자인하는 것이 돼 제국의 입장에 심대한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간부들과 협의한 끝에 ‘저항을 했기 때문에’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밤 12시 회의를 끝냈다”고 적었다.
이어 4월 19일자 일기에서는 학살에 관여한 일본군 아리타(有田) 중위에 대해 “진압 방법과 수단에 적당하지 않은 점이 있어 30일간 중(重)근신 처분을 내리기로 거의 결심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아리타 중위에겐 30일간의 근신 처분이 내려졌다.
또 앞서 2월27일자 일기에는 3.1 독립선언에 서명한 ‘어느 종교인’이 우쓰노미야 사령관을 찾아와 “이번 국장(國葬·고종 장례식) 때 뭔가 사건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조심하라” 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아사히는 보도했다. 이에 대해 일기 검토 작업에 참가한 한 관계자는 “아사히 신문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느 종교인’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우쓰노미야는 또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학생 등이 시위를 주도했으며, 외국인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봉기한 것으로 소요의 뿌리가 깊다고 분석했다. 3월 11일자 일기에선 “소요가 날로 확산돼 더 이상 고식적인 방어 진압수단이 도저히 먹혀 들지 않는다고 판단해, 조선군(일본군)의 출동을 조선총독에게 납득시켰다”고 썼다.
그의 일기에는 그가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 도입에 앞서 민족운동가 및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매수 등 다양한 회유공작을 펼쳤으며, 상해 임시정부를 내부 분열시키기 위한 공작도 펼쳤던 것으로 나와 있다.
시가(滋賀)현립대 강덕상(姜德相·조선 근현대사 전공) 명예교수는 이번 사료에 대해 “3·1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유혈진압 사건인 제암리 사건의 은폐 과정과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일본의 회유공작 기록이 밝혀지기는 처음이며, 기존 연구에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메워주는 1급 사료”라고 평가했다. 우쓰노미야는 주로 정보수집 분야에서 근무했으며, 러일전쟁 전후에는 영국에서 여론 공작을 펼쳤다. 그의 아들인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1906 ~2000)는 1970년대 자민당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대표적인 친북(親北)·반한(反韓) 인물로 활동했었다.
* 제암리학살사건의 전모(언더우드의 정부문서)
여기서 영사가 제출한 '학살과 부락을 태워 버린 사건들의 첫 이야기'란 제목의 언더우드 선교사의 첨부문서를 살펴보면 더욱 그 현장이 생생해진다.
4월 16일 경기도 수원군 팔탄(발안) 시장 부근을 여행한 언더우드(H. H. Enderwood)의 진술 :
일행은 아침 9시 30분 경 필자의 차편으로 수원과 오산을 거쳐 74킬로 떨어진 팔탄(발안)으로 갔다. 팔탄에 이르기 전 3, 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장 넘어 얕은 산뒤로 큰 연기구름이 보였다.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웠는데, 필자는 인근의 한 동네로 걸어 들어가 한 농부를 만나, 몇 마디 인사를 한 후,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더우드: 저 연기는 무엇인가?
농부: 불탄 마을에서 오르는 연기다.
언더우드: 언제 탔는가?
농부: 어저께
언더우드: 누가 태운 것인가?
농부: (두려워 주위를 살피며)군인들
언더우드: 이유는? 사람들이 난동을 부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만세를 불렀는가?
농부: 아무것도 안 했다. 다만 거기는 기독교인 마을이다.
언더우드: 여기서는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없는가?
농부: 얼마 전 장날, 장터에서 있었다.
언더우드: 저 마을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가?
농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을 모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만세를 부르겠는가?
언더우드: 군인들이 여기, 이 동네에도 왔었는가? 당신은 기독교인인가?
농부: 아니다.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없다.
언더우드: 저 마을 이름은 무엇인가?
농부: 제암리다.
나는 이어 같은 마을에서 다큰 한 사람을 만나, 같은 질문을 했는데, 위와 같은 내용의 답변을 얻었으며 또 최근 제암리로 가 본 사람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주민들은 지난 장날, 장에 모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도 들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은 후, 그 읍으로 차를 몰았으며, 읍 입구에 있는 개울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이 읍으로 들어가는 두 큰 길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주재소를 지나갔다. 주재소 밖에는 제78연대 소속의 군인들이 서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 한 일본 경찰이 나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서 주재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우리가 드어서자, 2명의 일본군인이 일어나 나갔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견장에 별 3개가 달려 붉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제1군조의 배지라는 것이다. 우리들을 주재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경찰관은 소총을 메고, 밖에 나간 군인들을 따라 나갔다.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방금 나간 경찰관이 선두에 서서 그들이 남양으로 가는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일본말을 하지는 못한나, 약간은 알기 때문에 대강은 알아 들었다. 커티스 씨는 그곳 도로, 교량, 그리고 서울에 있는 서로 아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아무렇지도 않게 화재에 대해 물었다. 그는 소규모 화제가 있었으나 꺼졌으며,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고 말했다. 그는 소요사건에 대해 질문받자, 그 부락이 약간 소란스러웠으나 이제는 다 끝났다고 대답했다.
커티스 씨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좀더 하다가, 불구경도 할겸 소풍이나 조금하고 싶다고 하면서 마을에서 인력거를 구해달라고 했다. 주임은 '무슨 화재냐'고 물었다. 커티스 씨는 그 근처의 불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우리는 아마 인력거를 타고 5, 6킬로 더 시골길을 달려보고 싶다고 했다. 주임은 약간 놀란 듯했으나 '예' 하고는 인력거 승차장이 있는 곳까지 경찰관 한명을 딸려보냈다. 거기서 우리는 인력거 3대를 세내어 출발했다. 연기가 일고있는 마을은 읍에서 1.6킬로 쯤 떨어져 있었으며, 약간 타고 가다가 인력거에서 내려, 낮은 언덕 아래를 걸었는데 산허리에 얼마전 본 마을이 있었다.
우리의 추산과 앞서 한국인들의 진술은 그 마을에 약 40채의 집이 있었으나 이 가운데 4, 5채만을 남기고 모두 타 버렸다는데 일치했다. 서 있는 4, 5채의 집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연기나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으며 여기 저기 아직 불꽃이 보였다. 우리는 여인들과 어린이 및 노인들이 마을 윗쪽 산중턱에 앉아서 말 없는 절망 속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마을 끝에서 끝까지 걸었는데, 윗쪽으로 걸으면서 중간 쯤에 처참히 타버린 한 젊은이의 시체가 한 건물 밖에 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후에 이 건물이 교회였음을 알았다. 우리는 이 시체를 그대로 사진 찍었다. 마을을 돌아 보고난 후, 우리는 산중턱을 따라 올라가, 위에 언급한 사람들 가운데 한 남자를 불렀다. 그가 왔기에 내가 질문을 했으나 공포와 충격때문에 얼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자기의 모든 것과 몇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언제 불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저께 이맘때(오후 9시)라고 했다.
언더우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한국인: 군인들 짓이다.
언더우드: 불에 탔거나 부상 입은 사람은 많은가?
한국인: 군인들은 교회 안에 있던 모든 기독교인들을 죽였다.
언더우드: 화요일 오후에, 왜 교회에 모였는가?
한국인: 글쎄, 군인들이 와서 기독교인 남자들을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했다.
언더우드: 여자들도 교회에 모였는가?
한국인: 없었다. 여자는 오지 말랬다.
언더우드: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국인: 군인들이 그들에게 총을 쏘고, 또 칼질(군도와 총검)을 한 후, 교회에 불을 질렀다.
언더우드: 다른 집들은 어떻게 불이 붙었는가?
한국인: 어떤 집들은 교회의 불이 번졌고 바람 방향이 달라 불이 번지지 않은 집들은 군인들이 따로이 불을 질렀다.
언더우드: 당신은 어떻게 살아났는가?
한국인: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인들만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언더우드: 당신의 집도 불타버렸는가?
한국인: 그렇다. (손으로 가리키면서) 폐허가 되었다.
언더우드: 그런데 몇 집은 남아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한국인: 외딴 집들 몇 채만 남은 것이다.
언더우드: 교회에서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한국인: 약 30명
나는 이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갔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젊은 여자 몇 명과 할머니들과 19~20세 쯤 된 청년이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었으며, 복감리교회 선교부의 노블 박사를 알고 있었다. 타버린 교회는 박사의 관할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위와 거의 같거나,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시간, 방법, 사망자 수, 방화 등에 대해 같은 대답을 들었다.
나는 청년에게 어떻게 살아 있는가고 물었더니 나무하러 멀리 산에 갔다가 밤에 돌아와 본 즉, 모든 친구들과 남자 친척들이 죽거나, 교회의 불더미 속에 파묻혔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교회가 있던 곳을 가르쳐 주며 내려가 보고 또 한 구의 다른 시체를 발견, 사진 찍어 두었다. 다른 시체들은 여전히 교회의 폐허속에 묻혀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아주 궁핍했다. 여기 저기 불 속에서 집어낸 가재도구가 보였으나 이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했다. 그들 대부분은 식량과 농사 지을 씨앗, 종자를 잃었고 그들이 크게 의존하던 가축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들은 그들의 사진을 찍은 후 작별을 고하고 마을을 지나, 아직 남아 있는 집들 중 한 집에 가 보았다. 그 집 주인은 노인이었는데, 자기 집이 홀로 남은 것은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데다가,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방화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설명한 사건 전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 그도 역시 몇 명이 피살되었는지 몰랐으나, 약 30명 정도로 보았다.
사진을 서너 장 더 찍고, 인력거 있는 곳으로 돌아와, 읍내로 떠났다. 인력거꾼들은 5킬로 쯤 떨어진 서흥이란 곳으로도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서흥에서도 제암리 사건과 같은 일이 2, 3일 앞서 일어났었다. 이들은 약 15군데가 방화되었으며, 대부분이 기독교인 근거지라고, 묻지도 않는데 말해 주었다. 이 말은 다른 이야기들과도 부합되며, 해당 지역 담당 선교사들이 서울에 보낸 보고와도 부합했다.
군인들은 약 2주 혹은 10일 전 자동차에 실려 투입되었으며, 최초로 마을들이 방화된 것은 그 때였다. 주임은 얼마전 혼란이 끝났다고 보고했었으며, 우리가 방금 방문한 이 마을의 주민들이 폭력을 썼다는 비난은 듣지 못했다. 경찰은 다른 곳에서는 폭력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경찰에 작별을 고하고, 올 때처럼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하오 5시 30분 경.
필자는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인들과의 회화에는 절대 자신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또한 내가 목격한 것에 대해서도 물론 그러하다.
눈에 그려지듯이 빈틈없이, 상세하게 기록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록정신, 역사의식'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그의 기록이 있었기에 이로부터 63년이 지난 다음에도 사실은 밝혀질 수 있었다. 1982년 9월 25일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에서 전동례 장로의 증언에 따라 23구의 시체를 발굴하여, 제암리 산 16~2 번지에 23위합동묘를 조성하고 전시관을 건축하였다. 옛 교회터에는 새로 3.1 운동 순국기념탑을 건립하고 사적 299호로 지정하였다
* 근세사에서 한국을 도운 외국인들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 파란 눈의 외교관 호머 헐버트 박사….’
일제의 조선 지배 야욕과 만행을 막기 위한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었다. 유럽과 미주지역에서 온 파란 눈의 외국인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독립운동에 동참했지만 이들의 발자취와 유적도 다른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고 전 세계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한 영국 출신의 항일 언론인 베델(한국이름 배설)은 현재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고이 잠들어 있다. 베델이 살던 집은 서대문구 홍파동 2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현 연합뉴스 빌딩 자리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사옥 터라는 것 정도만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을 맡은 미국 출신의 헐버트 박사는 헤이그 밀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 밀사를 파견할 것을 고종황제에게 건의하고 지원하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다.
생전 ‘미국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 그는 최초 한글 교과서인 ‘삼인필지’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가 근무한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과 살던 집 등은 현재 위치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영국의 의학자ㆍ선교사, ‘영원한 한국인’ 스코필드 [Schofield, Frank W., 1888~1970.4.12]
한국명 석호필(石好必).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세균학 교수로 내한한 후, 3 ·1 운동이 일어나자(1919) 교직을 포기하고 이 운동에 적극 협력하면서 일제의 포악상을 외국에 알렸다.
1920년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강제출국을 당할 때도 총독에게 청하여 옥고(獄苦)를 겪고 있는 이상재(李商在) ·이갑성(李甲成) ·오세창(吳世昌 : 1919년 배재고보 3회졸업) 등 독립지사를 일일이 면회하고 격려하였다. 귀국 후에는 캐나다에서 대학교수로 있다가 195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10주년 경축식전에 초빙되었으며, 1969년 한국에 영주하여 여생을 마쳤다.
마을 주민 23명이 무참히 희생당한 ‘제암리 학살사건’ 등 우리 민족의 3·1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3·1운동 34인’으로 불리는 캐나다 출신 독립운동가로 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출국 당한 스코필드는 한국이 해방되자 꿈에도 그리던 ‘제2의 조국’을 다시 찾아 서울대 의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지금의 서울대병원 내 사택에서 살았으나 안타깝게도 정확한 위치는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다만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 추모비가 세워져 일제 만행을 고발한 그의 뜻을 기리고 있을 뿐이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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