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79]졸지에 왕릉해설사가 된 사연
어제 오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어마무시한 카페 ‘혜경궁’을 가족과 함께 갔다. 요즘은 카페도 대형이 아니면 영업이 안되는 듯, 중소기업을 뺨치게 컸다. 혜경궁은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아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의 부인 홍씨(1735-1815)가 아니던가. 사도는 아들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가 왕위에 오른 후 장헌세자로 칭해졌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황제로 추존, 묘호廟號를 장조莊祖이다. 홍씨는 홍봉한의 딸로 14세에 왕세자빈에 책봉됐고, 아들이 등극하여 혜경궁이 되었다. 남편에 대한 회고록 <한중록>을 썼다. 대한제국 선포 3년(광무)후 헌경황후獻慶皇后로 추존. 불과 27세에 과부가 되어 1800년 아들 정조가 죽은 후에도 15년을 더 살아 89세에 세상을 떴다.
<혜경궁> 카페의 안내원에 물으니, 그곳에서 융건릉隆健陵이 차로 10분 걸린다해,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기에 아내와 아들내외를 앞세웠다. 융건릉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22대 임금 정조와 첫 번째 중전 효의황후(1753-1821)가 묻힌 왕릉. 6시 저녁 약속이 있어 여유시간이 30분안팎. 왕릉 자체를 보지 못해도 최소한 융건릉 안내지도판 앞에서 짧게라도 왕릉 해설을 해주고 싶어서였다. 왕릉 해설에는 언제든 어느 정도 자신이 있고, 상식과 교양차원에서 가장 먼저 내 가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릉 안내지도판 앞에서 먼저 왕릉王陵과 원園 그리고 묘墓의 차이를 말한 후, 남한에 있는 42개의 왕릉의 현황을 짧게 설명했다. 그리고 2006년 유네스코에서 왜 우리나라 왕릉 42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는지 그 까닭을 말했다. 왕릉은 두 개의 릉으로 돼 있기에 따로따로 말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 고황제(태조 이성계) 릉을 비롯하여 아홉분의 왕과 왕후가 있는 동구릉, 서오릉, 영녕릉(세종-효종), 선정릉(중종-선조), 헌인릉(태종-인조), 태강릉(명종-문정왕후), 융건릉(장조-정조), 홍유릉(고종-순종) 등을 약술했으나, 부득히 외따로 있는 왕릉(단종의 장릉, 경종의 의릉, 정릉)도 여럿 있다.
왕릉의 포맷은 모두 똑같다. 금천을 통과해 홍살문이 있고 능참봉이 거주하는 재실이 있는데, 먼 지역은 제주(임금)이 목욕재계후 일박을 했다한다. 참도(신도와 어도)를 걸어 정자각에 닿으면 동쪽 계단을 통해 차려놓은 제상에서 참배를 한 후 서쪽으로 내려와 제문을 태우고 돌아가게 된다. 왕릉 앞에서 직접 참배를 하는 게 아니다. 릉 앞에는 비각이 있고, 심부름꾼이 거하는 수복방이 있다.
조선 27대 왕 가운데 정조만한 효자가 없다며 ‘모태효자’를 역설하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생각해보라. 젊어 과부가 된 어머니 혜경궁 환갑을 기념하여 4000여명을 이끌고 한강다리를 건너 수원 화성에서 7박8일 잔치를 베푼 정조를 생각하면, 11살 때 아버지를 잃은 한이 얼마나 컸으면 그랬을까. 왕세손으로 할바마마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기까지 14년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노론세력이 불씨를 없애버리려고 세손을 죽이는 음모가 무릇 기하였을까.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혼자서 죽어라고 말, 활, 칼 등 무술을 연마했다. 절치부심切齒腐, 와신상담臥薪嘗膽. 활쏘기는 이성계에 버금가는 명궁이었다(50발을 쏜 성적표가 남아있다. 모두 과녁에 적중할 수 있었는데도 기가 죽는 신하를 생각해 5발은 일부러 명중을 안시켰다던가). 그뿐인가. 한번도 학문을 게을러하지 않은, 다산 정약용 못지 않은 ‘학자임금’이었다. 말하자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유일한 임금으로 <홍재전서> <주자백선> 등 문집을 남겼다.
마침내 1776년 25살에 경희궁에서 22대 임금으로 등극했다. 취임사 첫 마디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니, 당시 노론세력은 ‘우린 이제 죽었다’며 속으로 벌벌 떨었을 터. 할아버지 못지 않게 24년간 개혁정치를 주도해 조선중기 ‘르네상스’를 구가한 임금. 그가 49세에 죽지 않고 최소한 10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신도시인 수원으로 수도를 옮기고 아들 순조에게 왕권을 물려준 후 상왕을 계획하고 있었다한다. 지금도 자연사인지 독살인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그 역사적 수수께끼가 명쾌히 풀어지지 않지만,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은 틀림없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애민군愛民君主 세종임금에 버금가는 애민군주였다.
그가 연건동(지금의 서울대병원)에 아버지 사당인 경모궁 敬慕宮을 지어놓고, 한 달에 한번씩 창경궁 선인문을 통해 그곳에서 아버지를 기리며 통곡을 했는데, 짐승이 우는 듯 슬펐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덤이 일반 백성들의 무덤처럼 수은묘垂恩墓였는데, 이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승격한 후 이장을 하고 다시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다. 직접 명당을 고른 ‘풍수 임금’정조는 이후 12번을 행차한 ‘효자임금’ 그 자체였다. 궁으로 돌아가면서도 발길을 주저주저했다는 지지대遲遲臺 지명의 유래도 있듯, 수원시水原市가 오늘날 수원을‘효원의 도시’라고 내세우는 까닭이다. 효자아들도 신하들의 눈치로 하지 못한 ‘왕릉’의 승격은 그후 100년이 채 못돼 고종이 풀어주게 된다. 현륭원 앞 문인석(문석인)은 다른 왕릉의 문인석과 달리 사람의 얼굴을 더 자세히 새겨놓았다는데, 정조가 죽어서도 아버지를 보호하겠다며 자신의 얼굴을 새기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정조의 어진御眞이 실제로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그 문인석이 정조의 얼굴을 닮지 않았을까. 왕릉을 보호 관리하는 원찰願刹이 용주사이다. 능 주변엔 꼭 절이 있는데, 그게 원찰이다. 여주 신륵사는 영녕릉의 원찰.
임금이 승하하면 먼저 ‘산릉도감’이라는 임시 TFT 관청이 설치되어 3-4개월 대규모 조성작업을 벌인다. 조선시대엔 소 도축이 금지됐지만(성균관 예외), 능이 완공되면 동원된 인부들을 위로하려 소를 잡아 고기를 먹였다한다. 수원갈비, 태릉갈비, 서오릉갈비 등 지금도 능 가까이에 갈비집이 많은 이유이다. 지금도 해마다 능의 주인공들의 기일이 돌아오면 제사를 지내고 있고, 일반인의 참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능마다 해설사들의 있으니 그분들의 설명을 들으면 조선 왕릉 42기의 이런저런 사연을 알게 될 것이다. 이성계의 묘호는 당연히 태조太祖이며 능호는 조선의 창업주이므로 건원릉建元陵으로 유일하게 능호가 두 자이다.
약속 시간에 쫓겨 설명도 중지하고, 왕릉 참배도 못했지만, 다음엔 왕릉 주변 산책로까지 1시간여 걸린다니, 아내와 함께 손잡고 걸어야겠다며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두 아들 내외의 박수소리가 가장 기뻤지만, 15분여 동안 나의 설명을 들어준 모르는 관람객들의 박수도 좋았다. 유튜브에 <최영록TV>를 검색하면 왕릉에 대한 50분짜리 해설이 있다고 잘난체도 했다. 흐흐. 아들내외는 서울에 엄마와 살면서 이런 해설사로 노후를 보내면 좋겠다고 닦달식 충고를 했다. 그나저나 수원에서,아니 전국에서 군만두로 유명한 노포 맛집 <수원壽園>에서 아들과 전가복全家福, 동파육 등 고급요리를 시켜놓고, 칭따오 맥주와 연대고량주를 섞어
마시는 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가을밤이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별곡 Ⅲ-57]아름다운 사람(43)-‘만두의 정석’ 언배의형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