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12월이다. 고집불통 ‘꼰대’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빠진 늙은이가 되지 말고, 인격과 학문이 조화를 이루어 존경받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존경받는 어른으로 익어가는 과정이 무엇이지 생각해본다. 아마도 우리 조상님들이 이해한 것처럼 사십의 나이는 불혹(不惑), 오십은 지천명(知天命), 육십은 이순(耳順), 칠십은 종심(從心), 팔십은 산수(傘壽) 등의 순으로 인격과 학문이 성숙해가는 노련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 사십이 되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자신만의 관점과 행동의 준칙이 확립되어 흔들리지 않게 되지만, 객관성과 보편성이 결핍되면 아집과 독선이 될 수 있다. 계속 학문과 인격 수양에 정진하게 되면 “주관적 의지의 준칙(準則)을 넘어 보편타당한 입법(立法)의 원리”에 부합하는 관점과 판단의 경지에 이르고, 나아가 나와 다른 견해와 입장에도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이며, 계속 정진하다 보면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해도 세상의 법도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렇게 되면 젊은이들이 존경하며 닮고 싶은 본보기의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계속 주관적인 불혹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자신과 다른 견해나 입장에 대하여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증세로 반응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꼰대 화법’을 구사한다.
몇 년 전 모 방송의 예능프로그램에서 들은 말이다. “WHO(내가 누군지 알아), WHAT(뭘 안다고), WHERE(어딜 감히), WHEN(내가 왕년에), HOW(어떻게 나한테), WHY(내가 그걸 왜).” 이른바 꼰대 화법의 육하원칙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고집불통의 늙은이를 ‘꼰대’라는 은어로 젊은이들이 조롱한다. 이러한 꼰대의 화법은 가정과 직장, 교단과 강단의 갑(甲)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독선의 일방적 소통방식이다.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격과 학문이 성숙하지 않으면 이러한 병폐에 빠지기 쉽다.
그러면 존경받는 어른들은 어떻게 자신과 다른 견해와 입장에 반응해야 하나? 필자의 ‘경청(傾聽)의 리더십’(성숙의 불씨 770호, 2022.1.18.)의 원칙에 따라 소통의 화법을 구사해본다.
“WHO(내가 누군지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아라!’를 철학적 탐구의 주제로 삼는다), WHAT(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단지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그래서 배우고 싶다), WHERE(알고자 하는 나의 지적 욕구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12월의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에서도 나는 배우고 또 배운다), WHEN(내가 왕년에 배운 지식은 형식논리에 담은 분별지에 불과하다. 메타버스 시대의 살아 숨 쉬는 다양한 지식을 배우고 싶다), HOW(‘不恥下問’이란 말이 있다. 나와 다른 견해를 말해주어 고맙다. ‘燈火可親’이란 말이 새롭다), WHY(‘알아야 면장이라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평생학습에 매진하겠다).”
인격과 학문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인격자들이 사회의 어른 역할을 해야 한다. 꼰대 피해의식에 갇혀 있는 기성세대의 무관심과 침묵이 못내 아쉽다. 조언과 간섭의 경계가 모호해진 데다 ‘어른’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른이 있건 없건 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만 하면 되지만, 우리의 현실은 반목과 가치의 혼돈으로 점철된 사회가 된 지 오래다. 지금도 여전히 어른이 필요하다. 할 말은 하는 성숙한 어른 말이다.
- 한국철학문화연구소 <성숙의 불씨> 816호 원고(2022.12.13)
첫댓글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의 증세에 빠지면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unpleasant truth) 보다는 위안이 되는 거짓말(comforting lies)을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