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목) 욥기 33:1-12 찬송 439장
1. 그런즉 욥이여 내 말을 들으며 내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하노라
2. 내가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3.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4.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5.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7.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8.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9.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10.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11.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12.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개역 개정)
32장에서 엘리후는 자신이 변론에 임하게 된 동기와 근거,
그리고 그 필요성과 자세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자기 변론의 서론적 배경을 밝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33장에서부터 37장까지는 본격적인 엘리후의 변론이 전개되는데
33장은 먼저 엘리후의 1차 변론을 소개한다.
그중 오늘 말씀은 무죄함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해 불평하는
욥을 향해 단호한 자세로 책망하는 엘리후의 변론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엘리후는 먼저 1-7절에서 자기 역시 욥과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된 인간으로서
그 자신만으로는 욥 앞에서 어떤 위엄과 권세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힘입어 진실되고 정직한 말을 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자기 변론의 정당성과 권위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론적인 말을 통해 욥의 주의를 환기시킨 엘리후는
이어 8-12절에서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서 항변한 사실이 교만함에서 비롯된 불의한 것이라고 책망한다.
이러한 엘리후의 변론은 앞에서 나타난 욥의 변론 내용을
그대로 받아 논박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먼저 자신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밝힌
엘리후의 진술은 9:32-34에 나타난 욥의 진술에 대한 논박이다.
즉 거기에서 욥은 초월자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진술하며
그 사이에서 자신의 의를 변호해 줄 중재자도 없이 고통받고 있는
자신의 암담한 지경을 토로했는데
바로 여기에서 엘리후는 자신을 하나님과 욥 사이의 중재자로 자처하며
욥에게 성실하고 의로운 자세로 자신과 변론할 것을 요구한다.(4-5절)
또한 엘리후는 앞서 욥이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부당하게 고난당함을 불평하던 말을 그대로 인용해(10:7,14; 13:27; 16:9)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심히 교만하고 불의한 것이 아닐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런데 물론 여기에서 엘리후가 지적하듯이 욥이 고난 중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며 불평한 것은 사실이며
그것이 욥의 신앙적인 한계였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욥은 결코 주권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부인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답답함과 비통함을 토로하며 한탄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엘리후는 변론의 시작에서부터 앞의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욥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기 보다는 엄정한 판결자와 같은
고압적인 자세로 고난 중에 있는 욥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욥을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자로 치부한 엘리후는
이후 그러한 교만으로 인해 욥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일러주고 있다.(13-33절)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엘리후가 비록 참 지혜의 근본을
하나님으로 보는 바른 신(神)지식과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보다 차원 높은 신앙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욥에게 있어 참된 위로자요 해결자가 되고 있지는 못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외에 모든 피조물은
비록 장점이 크다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의 한계를 지니고 있는 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인간이 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선과 악의 혼재 및 불의하고 모순된 인간 현존의 모든 문제는
결코 한계가 많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오직 절대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공의로운 역사하심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7절)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엘리후는 자기가 가진 권세나 위엄을 가지고는
욥을 두렵게 하거나 욥을 눌러 이길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도 흙으로 빚어진
한계가 뚜렷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엘리후는 욥에게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다’고 하였다.
인간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서면 동일한 존재이다.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 않으며 아무리 못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끼리 아무리 경쟁을 해도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으로 힘있는 자들은
그러한 힘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 굴복시키려 한다.
하지만 세상적인 힘과 권위로는 사람을 진정으로 굴복시킬 수 없다.
또 그러한 것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 역시 흙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교만한 사람이다.
오직 우리가 굴복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밖에 없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권위는 인간이 도전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이다.
항거할 수 없는 권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비단 하나님의 힘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자연스런 반응이기 때문이다.
물론 타락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서도
굴복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자연스럽게 굴복한다.
아울러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은 존재에게도 굴복한다.
사람들이 왜 인간 예수께 굴복하는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2:9)
하나님은 예수님께 지극히 높은 권위를 주셨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 발 아래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진심으로 굴복한 것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위를 입혀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굴복시키고자 한다면
사람의 힘이나 권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부단히 하나님과의 교제에 힘쓰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권위가 아니라 인간적인 권위만 가지고
사람들을 굴복시키려 하는데 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 안에 갈등이 생겨난다.
지도자의 권위기 안 선다.
이러한 지도자는 즉시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부단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도록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으면 베드로와 같은 범인에게도 사람들은 진심으로 굴복한다.
하루에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딛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