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66
2월14일[재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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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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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GaTFdB7ipw
[청주교구 나광남 미카엘 신부님 집전(복대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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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심 없는 자선의 실천과 깊이 있는 골방 기도와 보다 진정성 있는 단식!>
전례력이 돌고 돌아 또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사제는 축복한 재를 교우들의 머리에 얹으며 이렇게 외칩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은 생각하여라.”
재를 머리에 얹은 교우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님, 저의 죄악을 없애소서. 주님 당신께 죄를 지었사오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머리에 재를 얹는 이유는 사제의 외침 안에 잘 들어 있습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우리 인간 존재는 참으로 특별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상반되고 모순된 존재입니다. 극단의 양면성을 지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이 세상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지닌 품위나 능력, 지혜와 지식, 이를 바탕으로 쌓아 올린 찬란한 문화나 예술, 최첨단 과학, 창출한 제반 결과물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얼마나 인간 존재는 얼마나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인지 또 한번 놀랍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난다 긴다 하던 대단한 인물들도 숨 한번 끊어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의 초라한 육신은 불더미 속으로 직행하며,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합니다.
오늘 다시 머리에 재를 얹으며 대체 무엇을 참회해야 할 것인지를 깊이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은 세 가지 측면에서의 참회로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나큰 자비와 사랑, 끝도 없는 용서에 우리는 응답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심 없는 자선의 실천입니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님과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분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서먹서먹해집니다.
다시 한번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진실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위선자들의 길거리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 둘 사이에 사랑의 밀어를 주고받는 골방 기도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혹독한 고통을 겪고 있고 사무친 슬픔에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옆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아니면 태연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게 어찌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순 시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파스카 신비 안으로 깊이 몰입하는 순간입니다. 이 시기 우리는 수난 복음을 자주 읽으면서,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양으로써 그분께서 겪으셨던 고통과 희생, 수모와 치욕을 깊이 묵상하면서, 작게나마 동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단식입니다.
또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사심 없는 자선의 실천과 깊이 있는 골방 기도와 진정성 있는 단식으로 더욱 의미 있게 이 기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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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X1I9lutZ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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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가톨릭에서 말하는 고행의 차이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자선-기도-단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이것을 실천할 때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매번 강조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자선-단식은 일종의 도구요 무기입니다. 도구로 사용되려면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망치라면 못을 찾아야 합니다. 또 무기라면 적이 확실해야 합니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군인에게 총을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단 총을 줬다면, 누구에게 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에게도 이웃에게도 해가 됩니다.
일단 기도-자선-단식이 도구라면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일까요? 기도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자선을 하면 청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단식하면 절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정결해집니다. 곧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얻게 됩니다. 이 덕을 꽃피우면 무엇일 좋을까요? 사랑이라는 하느님께서 그 정원에 살게 됩니다.
기도-자선-단식은 복음삼덕을 자라나게 하는데, 기도-자선-단식이 없다면 복음삼덕과 그로 인한 사랑이 실천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반대는 이기주의입니다. 자기 행복만 바라는 이들은 내가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기주의자는 자기만 가지려 합니다. 또한 절제가 없습니다. 자기 먼저 먹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기도-자선-단식이 삼구(三仇), 곧 세속(소유욕)-육신(성욕)-마귀(교만)을 쏴서 죽이기 위한 총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교의 교리와 차이를 보입니다. 불교도 인간의 욕구가 고통의 원인이라 보았습니다. 그 욕망을 이기기 위해 고행을 하고 자신과 싸웁니다. 그러나 욕망이 사라지면 행복이 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고행의 방향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불교도 발전하게 됩니다.
영화 ‘삼사라’는 “어떻게 하면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타쉬라는 수도승은 3년 동안 동굴에서 나오지 않고 고행합니다. 그렇게 육체를 이기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믿었지만, 한 방울의 물은 다시 육체가 힘을 얻고 아기에게 젖을 물린 여자를 보았을 때 사라지게 됩니다.
타쉬는 욕망을 이기기 전에 욕망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겠다며 환속합니다. 여자와 결혼도 하고 아기도 얻게 됩니다. 농사도 짓고 돈도 어느 정도 법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점점 탐욕에 물들어갑니다. 심지어 처제와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처제가 언니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세상에 환멸을 느낍니다. 역시 모든 고통은 욕망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때 스승이 죽으며 타쉬에게 보낸 편지를 받습니다.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되기를!” 타쉬는 한 가지 욕망을 정복하기 위해 다시 삭발하고 집을 떠납니다. 아내가 뒤쫓아오며 말합니다.
“한밤중에 자식을 버리는 어머니는 없어요. 남자만이 그럴 수 있죠. 싯다르타는 병자들을 가엾다고 여겼어요. 그가 깨우침을 얻기 훨씬 이전부터요.”
아내는 알고 있었습니다. 참다운 고행의 의미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타쉬는 윤회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원만 빙빙 돌기 때문입니다. 그때 물 한 방울이 마르지 않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타쉬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고행의 방향이 사랑이라는 방향성을 잃으면 아무리 고행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삼구는 사랑에 반대되는 욕망입니다.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물을 빼내야 합니다. 그 작업이 우리가 말하는 고행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사랑이 증가하지 않는 사순절은 더는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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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고통, 십자가와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시기를 지내게 됩니다. 오늘 사제는 성지(聖枝)를 태운 재를 축성하고 이마에 바르는 예식을 하게 됩니다. 재가 지닌 상징적인 의미는 다양합니다. 우선 재는 불로 태워진 것, 즉 단련의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열정으로 자신을 태우고 새로 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또 재는 남김없이 모두 타 버림으로써 순수한 인간 존재의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아울러 새로운 성장과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서의 재를 받음으로써 사순시기 동안의 노력을 통해 부활의 새 생명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를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시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신앙생활의 핵심은 잘못된 삶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기쁨을 믿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풀잎 끝에 달린 이슬과 같으니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겸손’과 같다고 합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좀 더 겸손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겸손함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강한 무기입니다. 겸손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정의 밑에 서있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흙과 같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겸손은 "기름진 땅"이라는 라틴말(Humus)에서 나왔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서 사순시기를 지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40일 동안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은 바로 죄를 지은 나를 위한 수난과 고통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은 나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행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 40이라는 숫자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정화와 단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기도와 침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였을 때에 비를 내려서 벌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큰 배를 만들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배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비는 40일 동안 내렸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정화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서의 이와 같은 40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받아들여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40일을 마련하였습니다.
교회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4가지를 실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희생의 방식은 다양 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희생입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도 희생입니다. 양보하는 것도 희생입니다. 신앙은 희생이라는 밭에서 피는 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할 것을 권고합니다. 본당에서도 사순시기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마련한 사순특강에 참여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셋째는 단식입니다. 단식을 하는 의미는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자선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저금통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교구는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앙은 나눔으로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2024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정화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희생, 기도, 단식, 자선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함께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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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40주야 동안 폭우가 내리게 하여 심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400년을 종살이하였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40년이나 걸렸다. 예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주야를 광야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준비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시작되는 사순절도 오늘부터 시작하여 부활 때까지 주일을 제하고 세어보면 40일이 된다. 교회가 이렇게 사순절을 제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시기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 “재의 예절”을 거행한다. 이 재의 의미는 회개와 보속, 죽음과 겸손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머리에 재를 받는 것은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보속 하겠다는 약속의 표시이다.
이 재의 예절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미리 묵상하게 한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것은 우리의 현세적인 삶의 종착점인 죽음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이기적인 생활과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삶에서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알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이 재는 한 줌의 흙이다.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의 흙이 된다. 그 자리에는 아무런 형체도, 권세도 명예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재를 교만과 명예의 자리인 머리에 얹음으로써 인생무상과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하라고, 자신의 본 모습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겸손하지 못하면 회개와 보속의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을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자선과 기도, 단식에 관한 세 가지 본보기를 알려주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넘치게 기도하면서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2절) 내가 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의 찬사를 얻으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신앙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친절한 행동은 자체가 나팔이다. 숨겨야 할 것은 그런 행동이나 장소보다도 베풀려는 뜻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3절). 이 말씀 역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인데,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선을 베풀 때, 베푸는 손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른손은 의인과 의로운 행위를 뜻하고 왼손은 죄인과 죄가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지려면,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한다.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6절) 우리의 기도는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들으시고 마음의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께 기도하면 우리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6절) 사람들에게서 상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또 다른 상을 받을 수는 없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16절) 교회도 또한 이 시기에 극기와 절제를 통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 그리스도를 닮고, 어느 때보다 기도를 많이 하여 은총을 받고자 마음을 모으는 때이며,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우리도 누리기 위해 속죄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하여 우리가 더 하느님의 자녀로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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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정화하며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가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소원하던 관계를 되돌아보고 주님과 화해하는 은혜로운 때입니다. 교회는 사순 시기를 지내며 유다인들이 늘 실천하였던 “의로운 일”, 곧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진지하고 경건하게 실천하도록 권고합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로운 일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도로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자선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단식으로 악습을 잘라 내고, 쾌락을 절제하며, 자신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 가지 신앙적 행위의 핵심이 이를 행할 때의 마음가짐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 세 가지는 내적 생활로 나아가게 하는 정신이지 겉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실천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의로운 일을 숨어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의로운 일이 알려지고 드러났을 때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이 알려지는 것과, 그 일을 한 자신을 드러내고자 스스로 세상에 알리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드러나지 않을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참다운 애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선행을 자신을 뽐내는 도구로 쓰지 않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을 받는 이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유명 인사가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려고 내놓는 거액의 자선보다, 이름 모를 식당 주인이 배고픈 형제를 위하여 남몰래 베푼 사랑이 훨씬 크고 따뜻한 감동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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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여기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자선을 베푼다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지금 실행하고 있는 그 일이 선행과 사랑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또는 선행과 사랑인 줄도 모르는 채로 그냥 실행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선행과 사랑을 실행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자기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또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시고, 그 일에 대해서 보상을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이 실천한 선행과 사랑에 대해서도 갚아 주실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 중에도 착한 사람들이 많고, 선행과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경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이 말씀은,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실천한 선행이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일이라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모두 갚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선행을 누구에게 어떻게 베풀었든지 간에.) 신앙인은,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인들끼리만’, 또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 선행과 사랑 실천을 하면 안 되고, 모든 사람에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6ㄱ) <자기들끼리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선행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당연히 실행해야 할 ‘신앙인의 본분’인데, 그 일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이 구제 활동을 높이 사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는 여러분의 순종을 보고 또 자기들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과도 함께 나누는 여러분의 후한 인심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2코린 9,13)
“위선자들처럼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위선자들이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는 경우에, 그들의 속셈과는 상관없이, 그 성금 덕분에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선행과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위선자들이 한 일도 선행이고 사랑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위선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나서 자기에게 감사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강요와 압박은 죄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선행과 사랑을 실행할 때, “혹시 나는 위선자가 아닐까?”라는 생각 때문에 주눅 들어서 실행 자체를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선행과 사랑 실천은 더욱 과감하게, 더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演技)’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삶’ 그 자체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고, 날마다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신앙인은 숨을 쉬듯이, 밥을 먹듯이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실까,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할까, 라고 의식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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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죄를 용서받는 중요한 치료제 - 자선과 기도와 단식>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인 오늘을 교회는 특별히 '재의 수요일'이라고 호칭합니다. '재의 수요일'이란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하는 데에서 비롯된 명칭입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오늘 미사의 시작 예식에는 참회 예식이 없었는데 이제 행하게 될 이마에 재를 얹는 예식 자체가 참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순시기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로 되돌리기 위한 준비의 기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본래 우리에게 주신 것을 되찾는데 필요한 정화의 시기인 것이지요.
사순절(四旬節)이라는 말 자체는 40일 동안을 준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성인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준비를 하셨는데 대체로 그 기간이 40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을 준비하거나 특히 하느님의 뜻을 받들 때 40일간의 준비 기간을 거쳤던 것이지요.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후렴처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탄복을 여러 번 반복하고 계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좋으셨던 세상이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로 죄가 넘쳐나고 썩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부패하여 곳곳에서 말할 수 없는 부패의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세상을 정화하기 위하여 40주야를 비가 쏟아져 내렸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정화의 기간이 필요했었던 것이지요.
또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이 새겨진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40일간을 준비하였으며, 예언자 엘리야도 천사가 주는 음식을 먹으며 40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40일 동안 홀로 기도하시며 단식하셨습니다.
이렇게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앞두고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하는 한편, 모든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떨쳐버리고 다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준비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사순시기를 우리는 회개의 시기이며 은총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단지 부담스러운 회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위한 준비의 기간인 것이지요.
이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는 자신을 정화하여 머리에 재를 얹게 됩니다. 지난해 주님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운 재를 머리나 이마에 얹는 것이지요. 이때 사제는 재를 얹어주며 동시에 이렇게 말합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시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의 어딘가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세상에만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첫 날 우리는 머리에 재를 얹으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을 다시 한번 성찰합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여 나와 세상만을 생각하고 살았다면 다시 하느님께로, 그리고 다시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머리에 재를 얹는 것이지요.
또한 재의 수요일인 오늘 우리는 단식을 합니다. 단식은 속죄의 한 표현이지요. 단식이란 말 자체가 우리에게는 낯선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단식'이라는 단어보다는 '다이어트'라는 말에 더 익숙해진 우리입니다. 생각해 보면 다이어트라는 말처럼 가장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표현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최선의 가치를 두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몸 가꾸기에만 몰두하는 아주 비복음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가 담겨 있는 단어이지요.
이에 비해 단식은 가장 복음적이며 하느님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식은 나를 정화시키고 이기적인 나에서 이웃을 생각하는 나로, 그리고 창조주 하느님을 생각하며 정신과 영혼을 맑게 하는 힘을 길러줍니다. 다이어트가 아니라 단식을 하면서 나를 정화하고 나의 욕심을 절제하며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것, 이것이 이 사순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머리에 재를 얹고 단식을 한 우리에게 복음은 계속 기도할 것을, 그리고 단식하며 자선할 것을 제시합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것은 자선이라고 지혜서와 집회서는 수 차례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식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정신과 영혼을 맑게 하여 가난한 이웃과 나의 것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단식하는 것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웃과 나눌 때 그때 비로소 단식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대로 살면서 나의 욕구를 자제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단식하고 정화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식하는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해야지 단식할 수 있고, 기도함으로써 자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단식하고 또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실천할 힘을 얻고 또한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 수가 있지요.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실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회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끗이 하고 부활을 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은총의 시기인 이 사순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는 성실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재의 수요일인 오늘 우리가 모두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참된 회개와 보속으로써 은총의 사순시기를 잘 보내고 마침내 다가올 부활 대축일을 우리 모두 기쁨 중에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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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재를 머리에 얹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의 사전적 정의는,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뜻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뜻이 더해집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방향이 추가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과 마음을 고쳐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 되돌아감을 뜻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죄며 잘못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우리와 하느님의 거리를 생각하고, 다시 하느님과 가까워지려는 모든 영적인 활동을 뜻합니다. 단식, 기도, 자선은 회개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회개가 아니겠지요. 하느님께서 눈에 명확하게 보이시면 참 좋겠는데, 아쉽게도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거듭 들려주십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신 것이지,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쉽지 않은 여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가만히 숨어 계시지만 않으시고, 숨은 일도 보십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여겨지는 오늘날에 회개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숨어 계신 하느님을 향하는 오늘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구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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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6,1. 4.15.18)
우리는 세상 살아오면서 ‘~하는 척, ~하는 체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 동안 철저한 마음 준비를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잘 맞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 죄를 아파하며 뉘우치게 하시네.”(성가 124장) 재의 수요일 예식의 특징은 이마에 재를 얹는 것이기에, 사제는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오직 회개를 바라시니,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며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 머리에 얹으려는 이 재에 +강복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이마에 재를 얹어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권고합니다.
사순절 동안 줄곧 들려 오는 소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5,20)라는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 초대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으며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고 돌아오너라.”(요엘2,12~13)라고 호출하시는 하느님께 돌아설 때, 요엘은 우리의 자세가 단지 외적인 회개보다는 철저한 내적 회심의 표시로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마음을 찢고 하느님께 돌아섰다는 표시는 복음의 선행 곧 ‘자선, 기도와 단식 실천’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행해야 합니다. 지금껏 행해 왔던 관습적이고 형식적인 남에게 보이기 위하고 칭찬받기 위한 겉치레적인 자선과 선행, 남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한 위선적인 기도, 위선자들처럼 난 단식합네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하는 형식적인 단식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겉치레들…… 이런 가식과 위선을 벗어 던져 버리고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참된 의로움이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큰 상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런 회개의 표시는 자선-기도-단식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은 하느님으로 받지 않았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남과 나누거나 남에게 베풀 수 없습니다. 베풂으로 받는 것이 바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존재의 기쁨과 보람 그리고 행복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원천이신 사랑의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식을 통해서 단지 음식을 먹지 않고 육식을 금하거나 다른 좋아하는 것을 금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재물과 세속적인 것으로 채워진 그리고 채우기 위한 탐욕으로 가득 찬 자신의 영혼에 탐욕과 이기심을 비우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기 위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기에 금년 사순절을 통해 우리는 성전에서 기도하던 세리의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하느님 앞에 서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세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았기에,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18,13) 하고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성서는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루18,13) 기도하였다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며 겸손한 모습입니까? 그에 반해서 하느님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살아 온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자 말로 기도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되먹지 못한 거만한 태도로 하느님 앞에서 마저 머리를 쳐들고 그것도 하느님께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시와 자화자찬, 아니 그보다 타인을 비교하고 무시하는 이 기도문이 정말 구역질 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 또한 하느님 앞에 기도할 때, 세리처럼 거리야 멀지 않더라도 마음으로나마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멀찍이 주님 앞에 서는 것이 진정한 참회와 자비를 청하는 마음의 표현이지 않을까요? 이런 태도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부터 함께 따라온 여자들도 ‘멀찍이 서서’(루23,49)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던 태도와 비슷합니다. 루카는 왜 이토록 자세하게 묘사할까요? 그 해답은 사도 베드로의 권고안에 담겨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2, 38~39) 우리 모두 이제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자비의 음성을 듣고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순절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따뜻한 음성으로 부르시고 우리의 통회痛悔 하는 마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주님, 숨은 일도 보시는 당신 앞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서게 하여 주시고, 이 사순시기 동안 우리의 모든 가식과 위선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 당신 앞에 참된 우리 본래면목을 되찾아 가는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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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약속은 맺을 약, 묶을 속, 즉 단단히 묶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 관계가 헐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할 사람 몇몇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안 오는 것이냐?”라고 물으니, “조금 늦는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약속 자체가 아주 헐거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연락이 되지 않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약속 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너무 쉽게, “미안, 급한 일이 있어서…. 조금 늦어.”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그만입니다.
약속이 헐거워 짐은 관계 역시 헐거워지게 됩니다. 실제로 몇 차례 약속 시각에 늦는 친구를 보면서 아예 약속을 잡지 않게 되지 않습니까?
주님과 우리는 많은 약속을 합니다. 죄짓지 않겠다. 열심히 살겠다. 가정에 충실하겠다. 사랑하며 살겠다 등등…. 그런데 그 약속이 헐거워진 것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약속을 깨고 “다음에는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뒤에 또 다른 약속을 만듭니다. 이렇게 약속을 지키지 않아 주님과 헐거워지는 관계가 되면, 결국 전혀 상관없는 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여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큰지를 다시금 묵상할 수 있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많은 약속을 주님께 하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많이 지으며, 주님 뜻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서 다시 주님께로 향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그냥 입에서만 맴도는 공염불이 될 때가 많습니다. 약속이 계속 헐거워지면서 주님과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재를 얹으면서 사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칭찬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칭찬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참회를 겉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모두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약속이 헐거워지도록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약속을 통해 더욱 주님과 단단한 결속을 맺을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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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길들>
마태오 6,1-6.16-18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오롯한 길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4)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7-18)
내 앞에
벗 있으니
나와 벗 사이에
다른 이 없도록
오로지 벗에게
마음길 열고
오로지 벗에게
눈길 건네고
오로지 벗에게
손길 내밀고
오로지 벗에게
발길 내딛고
내 앞에
하느님 계시니
나와 하느님 사이에
다른 이 없도록
오로지 하느님께
마음길 열고
오로지 하느님께
눈길 건네고
오로지 하느님께
손길 내밀고
오로지 하느님께
발길 내딛고
내 앞에
나 있으니
나와 나 사이에
다른 이 없도록
오로지 나에게
마음길 열고
오로지 나에게
눈길 건네고
오로지 나에게
손길 내밀고
오로지 나에게
발길 내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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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께 더 가까이>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선할 때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하라.” 단식할 때“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모르게 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의 삶이건 신앙의 삶이건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좋은 평판을 받기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면의 힘을 길러 그런 것에 민감해하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적인 힘이 있으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 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기도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 세 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그렇게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 사순시기에 행동한다는 것은 또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기도 안에서 멈추고, 사마리아인처럼 다친 형제나 자매가 있는 곳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이웃의 육신 곁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관계없는 세 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 버리는,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이 회복될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그런 뒤에 멈추어봅시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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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
-“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
오늘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을 새롭게 확립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오늘 본기도 또한 사순시기의 영적전투의 시작에 앞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 그리스도를 믿는 저희가, 거룩한 재계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려 하오니, 극기의 보루를 쌓게 하소서.”
어떻게 극기의 보루를 쌓으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베네딕도 규칙서 “제49장;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항목도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유익한 가르침을 줍니다.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런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심기일전,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대로 온전한 삶, 참된 삶을 다시 새롭게 살기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사순시기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위한 세 지침입니다.
첫째, “회개하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는 삶입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삶, 회개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사순시기입니다. 기후위기는 물론 날로 복잡하고 혼란해지는 사회 현실을 대할 때 신자들은 물론 전 국민의 생태적 회개와 더불어 전방위적 회개가 급박한 위기의 시대처럼 생각됩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서 제49장에서 사순시기, 회개에 우선적 강조를 둡니다.
“우리가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요엘서 서두에서도 강조하는 바 회개의 촉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주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잃었던 나를 찾아 참으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야 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오늘 요엘서가 말하는 회개는 개인의 회개는 물론 전공동체적 회개의 실현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전공동체적 회개에 응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참된 신자 삶에 우선적 조건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깊이에서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겸손한 삶, 참된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 역시 바오로 사도를 통해 사순시기는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시기이자 화해의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사순시기 지금은 바로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이니 바로 회개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의 현실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회개의 진정성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에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요 오늘 복음은 사순시기 사랑의 세가지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적 세가지 사랑의 수행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절합니다.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요, 모두가 사랑의 표현인 수행입니다. 이웃 사랑의 개방이 자선이요, 하느님 사랑의 개방이 기도요, 자기사랑과 개방이 단식입니다. 사랑의 기도는 단식으로 단식은 자선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하느님 중심의 숨겨진 삶! 참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사랑으로 활짝 열린 이들이 참으로 부요하고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관상가, 신비가. 영성가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참된 회개, 참된 사랑, 겸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셋째, “진실하라!”
예수님이 참으로 혐오한 것은 안과 밖이 다른 표리부동의 진실치 못한 위선자 허영과 교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말씀 역시 자기 중심의 허영과 교만의 사람에게 주시는 질책이자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이런 자기 중심의 위선적 삶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하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한결같이 역으로 진실하라, 정직하라, 솔직하라는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좋은 삶, 참된 행복, 참된 사랑도 선택입니다. 부단한 회개로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할 때 참된 사랑, 참된 행복, 안과 밖이 같은 진실한 삶입니다.
그러나 명심할 사항이 있습니다. 사순시기 과도한 절제나 극기, 고행으로 어둡게 우울하게 침통하게 심각하게 지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순시기를 보내라 하십니다.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참 놀라운 것이 즐거움이란 말마디가 규칙서중 여기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라는 장에서만 2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사순시기,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게 수행생활에 충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하느님 중심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새롭게 선택하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재의 예식중 다음 사제의 말씀을 상기하며 하느님 중심의 회개와 겸손의 삶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부단한 회개와 겸손의 삶에서 샘솟는 참기쁨, 참행복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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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태세의 전환 >
저만 그런지 모르지만, 사순시기가 다가오면 왠지 부담감이나 긴장감도 같이 다가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여서 며칠 전서부터 이 사순시기를 어떻게 보낼까, 부담감과 긴장감을 가지고 생각에, 생각을 더 하다가 어제 문득 은총의 사순시기라고 하는데 이런 자세여서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며 태세의 전환, 이것이 사순시기를 옳게 맞는 것이요, 회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악에서 돌아서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하면 부담이 되지만 하느님 자비에로 돌아서는 거라고 생각하면 기꺼울 것이고, 단식하고 좋아하는 술을 끊는 것을 생각하면 우울하지만, 단식한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마음을 바꾸면 뜨거워지겠지요.
그러다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니 다음 구절,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란 말씀이 눈에 뜨였는데,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긴 받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요즘 말로 은총을 개무시하여 아예 받지도 않았다는 뜻인가?
저의 경우, 은총을 개무시하지는 않고 받을 때는 감사히 잘 받으나 오래 간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은총을 흘려버리거나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 선물을 귀히 여기지 않아 처박아 놓거나 남 줘 버리는 것과 같지요. 귀히 여긴다면 선물을 열어보고 또 열어보는 은총의 Revival이 이뤄질 텐데.
그렇습니다. 귀히 여겨 은총의 Revival이 이뤄진다면, 말 그대로 은총이 매일 새록새록 되살아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기도할 때 사람들이 보라고 기도하지 않고, 골방에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사랑에 오래 잠길 것이고, 사랑의 선물을 몰래 꺼내 보고 또 꺼내 보고 할 것이며, 그때마다 사랑이 되살아나고 사랑이 되살아남으로써 나도 되살아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받지 않는 사람은 이웃도 되살아나도록 이웃사랑 곧 자선에 그 은총을 쓸 것입니다.
이 경우, 물론 자선을 Showcase 용으로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진정 사랑해서 하겠지요.
사실 진정한 자선이야말로 은총을 가장 귀하게 받는 것입니다. 약 한 알로 여러 사람의 병이 낫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나눠 먹는 것이고 자선은 그런 거잖아요?
우리가 하는 단식과 재계도 하느님 은총을 헛되이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겁니다. 근자에 제가 방심과 조심을 자주 얘기하는데 방심할 때 지갑을 도둑맞기 쉽듯 조심하지 않고 방심하면 하느님 은총도 헛되이 사라집니다.
단식이나 재계는 우리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방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붙잡게 하는 것(조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때’란 ‘기회’의 다른 말입니다. ‘기회’란 또 ‘위기’의 다른 말입니다.
우리가 현명하다면 이 사순시기를 구원을 위한 기회의 때가 되도록 태세 전환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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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회개의 때>
오늘은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미사에 꼭 참석합시다!
'사순시기'는 '오늘부터 주님 만찬 미사 전까지'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집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주님의 부활 대축제를 준비'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사순시기 때 해야 하는 본질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요엘 2,12-13)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5,20-6,1.2)
오늘 복음(마태 6,1-6.16-18)은 '올바른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 하라고... '단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나의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서 받을 상이 없다.'고 하십니다.
'자선의 본질'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너를 통해 다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대화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이 사랑 안에 머무는 행위'입니다. '단식의 본질'은 '구원의 장애가 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행위'입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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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MVG9Mg8E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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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말 잘 알고
있는지를 묻는
재의 수요일이며
사순시기의
시작입니다.
십자가로
우리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십자가가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바로
사랑의
무게입니다.
십자가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순시기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흙으로
빚어내시고
흙으로
열어주시는
하느님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길은
저마다의 십자가로
하느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재와 먼지로
돌아갈
우리의 삶을
기억한다면
잊혀진
하느님을
간절히 다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흙과 십자가가
삶의 방향을
잡아주십니다.
흙과 십자가로
새로워지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리 자아만 있지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없는 우리의
삶을 반성합니다.
참된 반성이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삶과
십자가의 길을
받아들여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십자가와 흙으로
단식과 금육으로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복된 시간입니다.
먼지로
돌아갈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사랑하려 애쓰는
애끊는 우리들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힘을
믿는 용서와
생명의
새로운
시간입니다.
단식과 금육으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순의
첫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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