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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447년(세종 29년))
세종이 정인지·권제·안지를 시켜 짓게 했으며1445년에 완성되었다. 용비어천가는 해동 육룡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으로서, 주역의 건괘설명에 나타난 상징을 바탕으로 뜻을 마음껏 펼쳐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전하는 것은 목판본이다. 총 125장이며서사·본사·결사로 구성되어 있다.서사(1~16장)에서는 조선 왕조 창업의 당위성을제시했고, 본사(17~109장)에서는 조선 왕조 창업의당위성을 구체적 이야기로 실증했으며, 결사(110~125장)에서는 왕업의 영원한 지속을기리기 위해 후대왕에게 규계 사항을 열거했다.
내용은 우리말 노래, 같은 내용의 한시, 자세한 주해로이루어져 있다. 한글로 된 최초의 작품이고 전체 짜임이 서사적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어 문학사적 가치가 크다.
◆ 두시언해(杜詩諺解)
초간본은 1481년(성종12), 중간본은 1632년(인조10)에 간행되었고 중국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한시를 언해한 책이다.
◆ 증보만보
조선시대 한글 필사본 가정 보감
◆ 계몽편언해(啓蒙篇諺解)
조선시대의 초학아동교과서로 편자·연대 미상의 '계몽편'언해서이다.
초학자의 한문교육을 위하여 유교의 기초적인 교양에 관한 간단한 한문 장구(章句)를 모아 한글로 토를 달고 언해한 책이다. 제작연대는 미상이나 책의 서지적 특징이나 한글의 표기법으로 보아 19세기 말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언해의 한글 정서법은 된소리를 모두 된시옷을 첨가시켜 표기하였으나 ㅅ의 경우에만 ㅂ을 합용하여 된소리를 표기하였다. 조사나 어미에 나타나는 모음조화현상은 상당한 혼란을 보이고 있으며, 받침으로 ㄷ은 전혀 사용되지 않고 ㅅ으로 대체되었다.
어간과 어미를 구별, 표기하여 중세국어에서 보이던 음절단위 표기의 원칙을 거의 지키지 않고 있으며, 형태단위의 표기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이 책이 19세기 말엽의 정서법을 충실하게 반영하였음을 보여주며, 특히 고종연간에 간행된 언해본에서 보이는 표기법과 유사하다.
이 책은 19세기 말의 국어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일사문고(一簑文庫)와 가람문고(伽藍文庫)에 있다.
◆ 천자문(千字文)
중국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가 무제(武帝)의명으로 지은 책으로 하룻밤 사이에 이 글을 만들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
이 책이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285년 백제의 왕인 (王仁)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연대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천자문은 위에서 말한 책과는 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천자문이 한자(漢字)를 배우는 입문서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 책에 ‘天 하늘 텬’과 같이 새김(뜻)과 음을 달아 읽게 되었고 이 석음(釋音)을 단 책이 간행되었다.
지금까지 석음이 있는 천자문으로 알려진 가장 오랜 책은 1575년(선조 8) 광주(光州)에서 간행된 것이다. 맨 끝에 ‘만력삼년월일 광주간상(萬曆三年月日光州刊上)’이라는 간기가 있는 책으로, 현재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중앙도서관 소장본이 알려져 있는데 '광주판 천자문'이라 한다.
이와 비슷한 책이 일본의 오히가시하야루기념문고(大東急紀念文庫)에 소장되어 있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이 책에는 간기가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위에 말한 광주판천자문보다 조금 뒤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천자문은 명필 한호(韓濩, 호는 石峯)의 글씨로 1583년 서울에서 간행된 '석봉천자문'이다. 현재 전하는 책들 중에서 경상북도 영주의 박찬성(朴贊成) 소장본과 일본 나이카쿠문고(內閣文庫) 소장본이 원간본 또는 이에 가까운 책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봉천자문은 임진왜란 뒤에도 여러 차례 중간되어 우리나라에서 천자문이라면 이 책을 연상하리만큼 일반화되었다.
◆ 태상감응편도설(太上感應篇圖說)
중국 도교의 경전으로 1655년 명나라 사람 허남증(許纜曾)이 편찬했다. 우리나라에서 한문본과 언해본이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한문본은 1848년(헌종 14) 최성환(崔瑆煥)이 내용을 다시 편집하여 목판본으로 간행했는데, 1852년 개정되고, 1880년(고종 17) 왕명으로 다시 간행했다.
최성환의 서문과 발문이 있는데, 왕과 왕비, 세자의 장수와 복을 비는 축원이 있다. 내용은 각종 관리·부인·술사 들의 선행·지효·호의 등에 대한 선보, 악행에 대한 보응 사례를 그림을 곁들여 기술한 것이다. 수록된 인물은 200여 명인데 모두 중국인이다. 부록으로 '감응편독법찬요(感應篇讀法纂要)'와 이 책을 읽고, 간행에 노력한 사람들에게 내린 영험을 기록한 '감응편영험기'가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본이 있다.
언해본도 한문과 한글을 섞은 것과 순한글로 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문본과는 체제와 내용이 많이 다르다. 한글본들은 19세기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 허균(1569~1618)의 홍길동전(洪吉童傳)
조선 중기에 허균(許筠)이 지었다고 전하는고전소설로 16세기 이후 빈번해지던 농민봉기와 그것을 주도했던 인간상에 대한 구비전승을 근간으로 하고, 그 현실적 패배와 좌절을 승리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민중의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후반부가 허구적으로 첨가되었다고 추정된다.
홍길동전은 문제의식이 아주 강한 작품이다.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지배 이념과 지배 질서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방향에서 다루었으므로 문제의식이 뚜렷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지배 이념에 맹종하고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면서 무수히 쏟아져 나온 흥미본위의 상업적 소설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당대 현실에 실재했던 사회적인 문제점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지닌다. 또한 적서차별 등의 신분적 불평등을 내포한 중세사회는 마땅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지닌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홍길동전은 작품 경향,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있어서 금오신화에서 마련된 현실주의적 경향, 강렬한 사회 비판적 성격, 진보적인 역사의식을 이어받아, 후대의 연암소설(燕巖小說)과 판소리계 소설 등의 작품으로 넘겨주는 구실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소설사적 의의를 가진다.
◆ 한양가(漢陽歌)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漢山居士)가 한글로만 지은 풍물 가사. 조선 왕도인 한양성의 연혁, 풍속, 문물, 제도, 도국 및 왕실의 능행경 등을 노래하였다.
중요한 내용을 문단별로 추려보면,
제1문단은 한양의 지세와 도국을 노래하였고, 제2문단은 궁전 보탑(寶榻 : 옥좌), 제3문단은 궁방(宮房)·내시(內侍)·나인(內人), 제4문단은 승정원(承政院)·의정부(議政府), 제5문단은 육조관아(六曹官衙), 제6문단은 조마거둥(調馬擧動 : 거둥의 절차대로 말을 연습시키던 일)과 여러 관서(官署), 제7문단은 선혜청(宣惠廳)과 여러 관서, 제8문단은 성첩(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백각육의전(白各六矣廛), 제9문단은 마루저자·광통교와 구리게 전방(廛方), 제10문단은 유희와 유희처, 제11문단은 승전노름과 복식(服飾) 및 기생점고(妓生點考)와 가무(歌舞), 제12문단은 능행(陵行)하는 광경, 제13문단은 과거 시험장의 풍경(風景)과 장원 급제자의 유가(遊街)하는 광경을 입심 좋게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조선시대 서울의 면모와 풍속까지를 자세히 알려 주고, 마지막 문단에서는 한양을 찬탄하며 나라와 왕과 한양성이 무한히 태평하기를 축원하였다.
특히, 끝부분에서 “원생고려 한단말은/중원사람 말이로세/추차언이 관지하면/제일강산 가지로다/산악수기 받아나니/충효인물 총총하다/범절이 이러하니/천하제국 제일일다.”라고 노래하여 구구절절 애국·애족의식을 드높이고 있다.
◆ 언간독(諺簡牘)
조선 후기 한글 편지의 서식(書式)을 모은 책으로 간행연대는 미상이나 '증보언간독'의 간기에 “丙戌十一月冶洞刊(병술십일월야동간)”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1886년을 하한선으로 볼 수 있다.
상편에서는 일반 가족과 이웃 사이, 하편에서는 신부가 올리는 문안지(問安紙) 계통을 주로 다루었다. 편지마다 봉투의 서식을 앞에 싣고, 다음에 사연의 본문과 맺음말을 격식에 따라 예문을 제시하였다.
하편은 문안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문안지는 근래에까지 전통 가정에서는 사돈지와 더불어 사용하고 있으며, 옛 문서의 존대(尊待) 서식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맨 끝에 고목(告目) 편지의 예문이 하나가 붙어 있다. 고목은 지체가 낮은 하인 또는 관속이 상전 양반에게 올리는 편지로서, 신부의 문안편지 형식에 준하면서도 존비(尊卑)의 표현을 극대화한 것이다.
언간독이 상업수단의 요청에 따라 방각본(坊刻本)으로 간행된 것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이지만, 필사본으로 유포된 것은 17세기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훈민정음이 민중 속에 실용화된 것은 편지가 가장 으뜸이다. 이 편지가 우리 산문문학의 바탕이 되었으므로 '언간독'은 중요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신문학 이후에 신식 편지투가 많이 출현되었는데, 이것은 전대부터 한문편지의 간독과 한글편지의 언간독이 성행한 전통에서 연장, 발전된 현상이다.
◆ 1603년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
◆ 효종이 쓴 한글편지
◆ 어린 정조가 쓴 한글편지
◆ 조선 말기의 실학자, 서화가였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의 한글 편지
추사체를 창안한 조선 후기 북학파의 실학자이며 본관은 경주, 호는 추사, 완당이며 조선의 실학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한 문인으로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다.
그림에서는 문기를 중시하는 문인화풍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의 제자가 되면서 고증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영조·정조 시기 실학의 학풍을 바탕에 두고 청대 학풍의 정수를 혼융시켜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했다
◆ 김정희 선생의 한글 편지
◆ 1883년 초등학교 근대 교과서
◆ 독립신문(獨立新聞)
1896년 창간되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로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으며, 격일간지로 출발해 일간지로 발전하였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에 들른 박영효(朴泳孝)로부터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가 1895년 3월 1일자로 사면되었다는 사실과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 동지들이 자신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내정하고 입각을 교섭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정부의 외곽에서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계몽하는 사업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입각을 거절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 원인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된 때문으로 보고 갑오개혁의 성패 여부도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단행하면서도 일본측의 방해로 그들의 신문은 가지지 못하였다.
그들의 개혁정책을 국민에게 알려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대중매체로서의 계몽적 신문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특히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은 1883년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창간 준비작업을 한 경험이 있었다.
또 그 자신이 서양 여러 나라를 여행한 견문을 통해 신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서재필과 유길준은 1896년 1월 하순에 새로운 신문사의 설립과 새 신문의 국문판 및 영문판을 동시에 3월 1일 창간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김홍집 내각도 이 신문 창간사업을 적극 지지하고 신문사 창설 자금과 서재필의 생계비를 정부 예산에서 지출하기로 결정해, 승인서를 서재필에게 교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갑오경장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신문 창간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월봉 300원의 거액을 지불하면서 그를 10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정부 예산에서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과 서재필의 개인 생계비와 가옥 임대를 위해 1,400원을 지출하였다. 서재필은 정부가 지출한 자금으로 일본 대판(大阪)에서 인쇄기와 국문활자, 한문활자, 영문활자 등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하고 1896년 4월 7일에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김홍집 내각과 서재필의 합작으로 출발해 박정양 내각과 서재필의 합작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자[제4권 제278호]로 종간호를 내었다. 정부는 독립신문사를 매수할 당시에는 아일랜드 사람을 주필로 고용해 국문판과 영문판을 일간으로 속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작 신문사를 매수한 다음에는 독립신문을 영구히 폐간시켜버렸다
◆ 매일신문(每日新聞)
1898년에 당시 발간되고 있던 '협셩회회보'를 개제하여 창간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이 신문은 창간사를 통해, 조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문명진보의 큰 기초적 구실을 수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구독료는 1부에 엽전 4푼, 1개월에 엽(葉) 7돈이었으며 발행부수는 대체로 1,000여 부 내외였다. 편집체재는 주간지일 때와 마찬가지로 4면제로, 1면 2단형식을 취하였고, 1면에 논설, 2면에 내보·관보·잡보, 3면에 외국통신과 전보, 4면에 협성회의 회중잡보(會中雜報)와 광고 등을 실었다.
순한글체의 언문일치문장을 사용함으로써 한글신문시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신문은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선구적인 구실을 하였다.
자주·개화의 선봉에 서서 커다란 구실을 수행하였으며, 특히 한국신문의 외세에 대한 저항적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1899년 4월 3일자(제278호)까지 소장되어 있다.
◆ 제국신문(帝國新聞)
1898년 8월 10일 창간되어 1910년 8월까지 12년동안 약 3,240호를 펴냈다. 초대 사장은 이종일,주필은 이승만이었다.
이 신문에 관계했던지식인들은 대부분 전직 또는 현직 관리였고대한자강회나 대한협회 등에서 활동하던사람들이었다. 신문의 크기는 타블로이드판의 절반크기로 초기에는 2단 조판이었다가 차츰 4·6단조판으로 바뀌었다.
서민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국민계몽을 내세우고 한글 전용을 고수했다.민족지로서의 논조를 펼침에 따라 사전검열로 기사가빈번히 삭제되었으며, 여러 차례 필화를 겪었다.
무리한 확장으로 1907년 9월 20일 휴간되었는데,유지들과 독자들이 돈을 내서 10월 3일 속간했다.1910년 6월 10일 다시 휴간, 재정난과 일제의압력으로 그해 8월 2일 폐간되었다.
◆ 1896년 단행본
첫댓글 어링적 아버지 읽어주는거 배웠는데 이젠 못읽겠어요.
하늘천 땅지 검을현 누를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