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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악몽
연기가 피어올랐다. 거짓말처럼 불이 솟아올랐다. 초등학교 과학실에서 난 불이었다. [저 안에 여자 아이가 있어요! 선생님 저 안에 승아가 있어요! 승아는 한 쪽 눈이 잘 안 보여서 나오다가 책상에 걸려 넘어져서 저희 손을 놓았어요!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해요, 선생님!] 민은 부모님을 따라 절을 떠나는 길이었다. 승아를 마지막으로 보던 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날, 승아와 운동장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승아.”
“내 이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한 번도 부르지 않았어?”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유? 무슨 이유?”
민은 승아의 얼굴을 바라보다 승아의 시선을 피해 하늘을 보고 누웠다. 승아는 하늘을 바라보는 민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민의 얼굴은 따뜻했다. 민의 콧등에 승아의 손이 닿았다. 민은 놀라 승아 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민은 눈을 감았다. 승아도 눈을 감았다. 콧등에 승아의 손길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승아의 손이 콧등을 간지럽혔다. 서 너 번 그런 뒤 멈췄다. 승아의 손이 멈추자 이번엔 민이 승아의 손을 잡았다.
“약속 하나 해”
“뭐?”
“너 혹시라도 불 근처에는 절대 가지마.”
“불?”
“그래,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불 가까이 가서는 안 돼! 명심해, 알았지?”
“응, 그래, 알았어.”
* * *
[과학실에 있던 여자아이는 사망했습니다.]
민은 눈을 번쩍 떴다. 침대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밖에서 민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잠그는 습관. 꿈같은 8살 그 무렵 절에서 지내던 습관 때문이었다. 문을 직접 잠근 적은 없었다. 그저 언제나 밤이면 자신과 윤이 자는 방문이 잠겨 있었고, 아침이면 애쓰지 않아도 문이 열려있었다. 이제는 문을 잠그고 자는 것이 편했다. 잠자는 동안은 편안하고 싶었다. 늘 누군가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늘 자신을 불안하게 했다.
“내려갈게요”
민은 대답 후 세안을 마쳤다. 가끔 오는 본가지만 편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민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는 많은 것이 무뎌졌지만 어머니에게만은 신경이 많이 쓰였다. 자신의 등 뒤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의 잔상을 본 적이 있다. 어쩌겠는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수없이 탓하고 수없이 원망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견뎌낼 수 있는 혼자만의 몫일뿐이었다. 30대가 되고 보니 그런 것은 괜찮았다. 답답한 것은 가끔씩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악몽이었다.
“오늘 경력사원 면접이 있다. 회사에 나올 시간이 되면 잠깐 들르거라.”
“네, 어제 김 비서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민의 드라마틱한 인생에 단 하나 드라마틱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부모님이었다. 사실, 이런 대화가 오갈 때 드라마라면 “오늘은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 번 나올법하고, 아버지는 “오라면 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차키와 카드를 다 내놓고 나가거라.” 하실 법 한데 너무나 평온하다. 부모님은 늘 민이 먼저였다. 민이 싫다는 것은 절대 하라는 법이 없었고,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민은 외롭게 살았던 8년이라는 시간을 보상받듯 20년 이상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다. 다만,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참으며 살았다. 그렇게만 하면 모든 생활이 일반인과 다름없는 25년이었다.
“아침에 잠깐 병원 들렀다가 바로 회사로 가겠습니다.”
“그래, 회사에서 보자.”
아버지는 현관을 나가면서 민을 보고 웃어주고 어깨를 한 번 쓸어주었다. 지난 25년간 늘 그랬다. 아버지 눈동자에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눈매에도 미소에도 진심이 묻어있다. 사업하는 사람의 눈과 입이 아니다. 아버지 얼굴에는 학자의 얼굴이 보인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아들에게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아버지는 한 번도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없다. 다만, 아버지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 민에게 눈으로 말했다. 미안하다고.
세상의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어디까지 일까. 모든 부모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면서도 부모님은 자신의 무능력함을 미안해한다. 미안할 것 없다. 자식들은 밑바탕 위에 자신의 씨앗을 뿌리고, 건강한 줄기를 만들고 무럭무럭 자라면 그 뿐이다. 민은 부모님의 미안한 눈빛을 보면서 느낀다. 부모님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신이 아니라고. 아버지가 25년 전의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민을 볼 때 가장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잘 안다. 아버지가 그걸로 힘들어 하는 자신을 제일 싫어하신다는 것도.
* * *
아침에 환자 몇 명을 보고 고개를 젖혔다. 맑은 하늘이 햇살 사이로 비춰진다. 그 아이는 정말 죽었을까. 어딘가에 살아있지 않을까. 모두 죽었다고 말했지만 민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꿈이 마치 어딘가에 그 아이가 살아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그 아이로 인해 배운 것이 있다. 누군가의 눈에 보이는 잔상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 그때부턴 읽은 잔상만으로 누군가의 인생에 끼어들지 않았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쉽게 지나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 사건 이후부터인지 모른다. 평생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 * *
면접 장소는 22층. 아버지는 회사를 위해 인생을 바쳤다. 아버지는 원하지 않던 유학생활, 원하지 않은 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바로 입사했다. 아버지가 신입사원, 대리, 과장, 부장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회장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장에서 사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하고 나서야 아버지가 회장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민이 면접장에 들어서자 간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민의 아버지는 어린 민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회사 사람들에게 소개부터했다. 그렇게 빠를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서두르셨다. 어렸을 때부터 만나온 전무, 상무, 이사 아저씨가 보였다.
면접관 자리 중앙에 민의 자리가 배치됐지만 민은 사양하고 좌측 끝으로 옮겨 앉았다. 굳이 정면에 앉지 않아도 면접자가 이 회사에 적합한 지, 하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있었다. 한 번에 네 사람씩 들어왔다.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에는 다양하고 화려한 스펙을 갖춘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회사에 적합한 인재를 고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은 면접관으로서 사람을 볼 때 꼭 3가지를 봤다. 첫째, 회사에 보탬이 되는 사람인지 둘째, 회사와 궁합이 잘 맞는지. 셋째, 기존에 있는 사람들과 잘 섞일 수 있는지.
어떨 때는 면접 보러 오는 사람이 우리 회사가 아닌 경우 더 성공하는 잔상을 본 적이 있다. 그럴 때는 과감히 채용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운명은 여기가 아닌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저 사람이 회사와 적합하지 않지만, 눈에서 진심을 읽을 때가 있다. 회사가 저 사람으로 인해 손해를 볼 경우가 생기지만 저 사람은 손해 그 이상 회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과감히 채용했다. 세상이 그렇다. 주어진 운명으로만 살기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다.
세 개의 팀이 지나갔지만 회사와 아주 적합한 사람은 만나기 힘들었다. 다음 그룹이 들어오는 동안 민은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햇살이 참 좋다. 절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때가 가끔 그립다. 오로지 바람 소리, 파도 소리만 들리던 그 세상이 어쩌면 이곳보다 더 나은 세상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그룹, 준비 됐습니다.”
옆 자리에 앉은 장 이사가 민을 불렀다. 민은 돌아앉았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남자 둘, 여자 둘. 우측 끝자리에 앉은 남자부터 자기소개를 시작한다. 한국대학교 학사 졸업, 한국대학교 석사 졸업. 미국 UCLA에서 MBA과정. 다양한 봉사활동. 많은 노력으로 착실하게 정석대로 살아온 사람이다. 새로운 사업을 확장하는데 반드시 이러한 정석인생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공부는 좀 못해도 좋다. 특이한 이력과 재밌는 삶을 산 사람들이 미국시장에서 좀 더 빛을 발휘하게 된다. 아웃.
두 번째 여성 지원자는 영국에서 학사, 석사과정을 밟았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맑은 눈을 가지고 있다. 회사와 적합하다. 장미희. 미국 시장에서 한국 영화를 소개하고 회사 브랜드를 높이는 일에는 필요한 인재다. 합격.
세 번째 남자 지원자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한국 중상위권 대학을 나왔지만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부모님을 잃게 된 후 혼자 아프리카를 다니며 봉사활동을 2년간 했다. 이 남자는 앞으로 좋은 가정을 꾸릴 것이고 회사와도 잘 맞는다. 이민준. 합격. 마지막 여자 차례지만, 한 조에서 두 명 이상 합격되는 일은 없었다. 민은 이미 마음에 드는 두 사람을 이미 골랐기에 마지막 지원자에게는 관심이 없어 다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강원도 강릉에서 아주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강릉에서 자라 자연과 늘 함께였습니다. 짧은 강릉 생활을 뒤로하고.”
민은 강원도 강릉이라는 말을 듣자, 창 쪽으로 돌렸던 의자를 다시 면접장 안 쪽으로 돌렸다. 그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설명하고 있어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다. 눈이 보고 싶다.
“감사합니다.”
포트폴리오 설명이 끝나자, 돌아서는 그 여자의 눈동자를 보았다. 화재현장, 불에 타는 아이의 모습. 민의 손이 떨렸다. 주먹을 꽉 쥐고 다시 한 번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시선이 좌측 끝에 앉은 민에게 닿았다. 불에 타고 있는 승아의 모습, 아침에 꾸었던 악몽과 똑같은 잔상. 얼굴 생김새가 승아와 너무 다른 그녀에게서 그 아이와 똑같은 잔상을 읽혔다. 그 아이...?
첫댓글 승아는 죽지 않은거죠???
아직 이야기가 많이 남았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긴장하시면서 보셔야 할 듯요~~ 끝까지 열심히 달려갈게요~~! ^^
불이 나다니
불이 나다니.... 끝까지 함꼐 해주세요.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
정말로 죽지 않았나 보네요. 다행이군요. ㅎㅎ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0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