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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만남
그녀의 집은 골목길 후미진 곳에 있었다. 차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언덕 위에 있어 한참을 걸었다. 걷는 동안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 외에 많은 생각이 들진 않았다. 서울의 달동네. 달동네라는 이름이 새삼 묘하게 느껴진다. 달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어 달동네라고 부르는 것이라면 참 정감 가는 단어다. 정과 정, 사람과 사람이 맞닿은 달동네. 강릉 사찰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다가 없다는 것과 옆집 사람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적막함이었다. 사찰에서야 사람이 없어 그랬다고 하지만 이곳은 작은 사찰이 모여 만든 적막함의 도시였다.
인사부장이 알려준 ‘정민아’라는 그녀의 집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밤 10시. 이미 잠이 든 것인지. 아무도 없어 꺼진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신도 확인도 어렵다. 녹이 많이 슨 초록색 대문 앞에서 천천히 걸어보기도 하고, 가로등 밑에서 담배도 한 대 피웠다. 인기척이 없는 대문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성이다 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차 보닛에 기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서울.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한강 곁을 지나는 자동차. 자동차 안에 있을 수많은 사람. 저 수많은 사람 속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사람을 찾겠다고 25년간을 헤맸다.
“어떻게 할까요?”
운전석에 있는 김비서가 물었다. 민은 얼굴을 깊게 쓸어내렸다.
“그냥 돌아가시죠.”
진토닉 4잔을 마신 이유가 있었다. 미친 척이라도 해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술김에 만나 그녀에게 다짜고짜 이승아 아니냐고. 왜 아닌 척 하느냐고. 도대체 너의 정체가 뭐냐고. 그렇게 소리쳐 묻고 싶었다. 대답은 안 들어도 좋다. 악몽을 꾸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잠에 파묻혀 현실과 멀어지고 싶었다. 김비서가 헤드라잇을 켜고 골목길을 꺾는데 자신을 당황하게 했던 그 여자가 비틀거리며 언덕길을 올라왔다.
“잠깐만요.”
김비서는 속도를 늦췄다. 앞좌석 백미러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도 힘들까. 축 처진 어깨며, 가녀린 몸이며, 길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여자가 또 쓰러지려 하자, 민은 차 문을 열고 나가 그녀를 받쳤다. 술 냄새가 났다. 꽃 내음이 났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요!”
김비서가 차에서 내려 그녀를 부축했다.
“어떻게 할까요?”
자신에게 안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맑은 얼굴. 쌍꺼풀 없는 눈, 긴 속눈썹, 오똑한 코. 그 어디에도 화상 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가녀린 목선. 그리고 얇은 줄로 엮인 절 표식의 목걸이. 팔을 쳐다보았다. 그 정도의 불길이었다면 분명 어딘가에 화상 자국이 있어야 한다. 없다. 어디에도 화상 자국은 없었다.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 잘못된 잔상을 읽은 것인지도 모른다.
“경찰에 연락하세요.”
“그렇게 하세요.”
김비서는 경찰서에 전화하고 여자를 뒷좌석에 눕혔다. 김기사와 민은 나무 아래서 담배를 피웠다.
“근데 저분은 누구십니까.”
김비서가 민에게 물었다.
“오늘 회사에 면접 보러 온 경력사원입니다.”
“경력사원 집에는 왜…?”
“그냥… 와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제가 뭔가 착각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나 봅니다.”
김비서는 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김비서는 아버지께 갓 태어났을 때의 민이 이야기를 들었다. 민은 다른 아이들처럼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사람들 눈만 쳐다보다가 미소 짓다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강민석 회장은 전국 각지 용하다는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다녔다고. 하지만 건강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결국, 강원도 강릉에 있는 ‘등명락가사’라는 사찰을 찾았다. 강민석 회장은 그곳에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민을 맡겼다. 8년이 지나고 민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찰에 있던 8년간의 민의 이야기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신고하신 분들이십니까?”
“아! 네!”
김비서가 담뱃불을 끄고 경찰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서울 시내 빛의 향연을 감상했다. 하루 간의 해프닝이었다. 스치는 듯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했고, 바람 같았지만, 폭풍이 일었던 악몽 같은 하루였다.
* * *
토요일 아침, 민의 침실로 햇살이 쏟아졌다. 햇살을 가리려 침대 협탁에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버티컬 리모컨이 잡히지 않았다.
“일어나! 일어나 인마!! 해가 중천에 떴는데!! 어여 일어나!”
윤이 녀석이다. 민의 집에 이렇게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윤이 뿐이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잠이 덜 깬 민이 물었다.
“일어나! 영화 예매해 놨다고! 매주 하는 일인데 또 투정이야? 이러기야?”
윤이 말에 민은 피식 웃고 만다. 윤은 흥이 있는 사람이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자존감도 높았다. 그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에게 늘 유한 편이다.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하는 기술이 있다.
“간다, 가! 오늘은 무슨 영환데?”
“1,000만 돌파가 눈앞인 영화라고! 아버지께서 관 만들어 주신다고 아침 시간에 보라셨어.”
“알았다, 알았어!”
“얼른 씻고 나와.”
민은 윤에게 떠밀리듯 샤워실로 들어가 음악을 틀어놓으려고 하는데 모르는 전화번호로 계속 진동이 울렸다. 평소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았다. 핸드폰을 세면대 위에 놓아두고 면도를 했다. 진동소리가 잦아들만하면 다시 진동이 울렸다. 받아야 하는 걸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세요.”
두 번이나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는데도 대답이 없다.
“전… 정민아라고 합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 드렸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제가 술에 취해서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어제 집 앞에 쓰러진 절 경찰에 신고해 주셨다고 해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제가… 여보세요.”
“듣고 있습니다. 뭘 염려하고 전화하신 지 알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피해를 준 것도 받은 것도 없습니다. 걱정 마시고.”
“그게 아니라…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제 목걸이가 없어져서요. 혹시 어젯밤에 제 목걸이를 보셨는가 싶어서…”
“목걸이요?”
민은 샤워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김비서가 목걸이 하나를 펼쳤다. 절 표식을 나타내는 문양이 흔들거렸다. 금색의 절 표식 문양의 목걸이.
“혹시 절 표식으로 된 목걸이를 찾고 계신 거라면 제가 갖고 있습니다.”
“네, 맞아요. 절 표식 목걸이. 어디 계신지 알려주시면 제가 지금 바로 찾으러 가겠습니다.”
민은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나야 했다. 그리고 결정해야 했다. 그녀를 자신의 곁에 둘 것인지 말 것인지. 둔다면 그녀에게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곁에 두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그녀에 대한 생각도, 고민도, 오해도, 궁금증도 말끔히 씻어 내고 와야 했다.
“신사동 가로수길 근처로 와서 연락주시죠. 근처에 있겠습니다.”
“네, 바로 갈게요.”
민은 김비서에게 받은 목걸이를 샤워실 안으로 갖고 들어왔다. 가만히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 보일 듯 안 보일 듯한 작은 이니셜이 있다. ASY/AMJ 암호 같기도 하고 두 사람의 이름 이니셜 같기도 했다. 절 표식을 목에 걸고 다니는 여자. 승아와 똑같은 잔상을 가진 여자. 술을 잔뜩 먹고 자신의 품에 쓰러진 여자. 술 먹으면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여자를 승아와 같은 여자로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 승아일까. 착각일까. 그 여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만날 수 있을까. 민은 샤워하고 거울 앞에 섰다. 무표정하게 하기다. 승아냐고 묻지 않기다. 그 여자의 눈에서 승아와 같은 잔상을 또 보게 된다고 해도 환자를 만났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다. 다짐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무슨 샤워가 이렇게 오래 걸려?”
윤은 참지 못했다. 여자 샤워하는 시간이 긴 것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남자 샤워시간이 긴 것에 대해서는 절대 이해를 못 하는 상남자다. 10분이면 머리 감고 샤워하고 머리 건조까지 시키는 그 녀석의 버릇은 군대 때 길러진 것이라 한다. 군의관이었던 민과는 다른 습관이다.
“오늘 영화 시간 좀 늦추자.”
“안 돼! 벌써 잡아 놨단 말야.”
“딱 1시간만.”
“왜?”
“잠깐 누구 만나야 돼.”
“여자구나.”
민은 잠깐 윤을 쳐다보고 입을 닫았다.
“여자 누군데?”
“오늘 만나보고 얘기할게.”
“뭐야? 심각해?”
“심각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말하기 조심스러운 사람이냐고. 너 지금까지 그런 적 없었잖아. 아… 딱 한 여자 있었네. 이승아.”
민은 가끔 이렇게 승아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윤의 말에 언제나 대꾸하지 않았다. 윤에게나 민에게나 ‘승아’라는 고유명사는 힘들고 껄끄럽고 어렵고 복잡한 단어였다. 윤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무뎌지고 있는 것 같지만 민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민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대충 말리고 셔츠 단추를 다시 한 번 체크했다.
“끝나는 대로 연락할게.”
“근처에 있을 테니까 연락해.”
민과 윤은 짧은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스케줄대로 움직였다. 민은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승아의 잔상을 읽고 흥분한 자신이 아니다. 그 여자도 술에 취한 상태가 아니다. 두 사람 모두 맨정신으로, 해가 반짝이는 토요일 아침 신사동 브런치 카페에서 커피를 나누는 정상적인 만남을 갖는 날이다.
민은 먼저 도착해 해가 비치는 테라스에 앉아 조금은 한적한 거리를 보다 하늘로 고개를 젖혔다. 선글라스를 통해 본 하늘은 검지만 구름 한 점 없었다. 선글라스를 벗었다면 더없이 푸른 하늘일 것이다.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준비한 선글라스다. 오늘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승아의 잔상을 가진 여자가 아니라 오로지 그 여자, 정민아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선글라스를 쓰지 않았다면 푸른색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분홍색 꽃잎이 내려앉은 하얀색 단화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민은 하늘로 젖혔던 고개를 정민아 쪽으로 들었다.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선글라스 덕분인지 정민아의 눈동자가 정확히 잡히지 않는다. 더는 잔상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앉으시죠.”
“네, 목걸이 때문에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어제 자신의 품에 안겼던 그 여자의 목소리다. 민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목걸이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소중한 목걸인가 보네요.”
“네.”
네. 다음이 없다. 다음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민이 그렇게 물었을 때는 연인과 함께한 목걸이라서요. 혹은 친구와 나눈 우정 목걸이라서요. 친한 친구가 선물해 준 거라서요. 등등의 이유를 함께 물어본 것이 아닌가.
“이니셜이 있던데.”
민은 목걸이에서 여전히 손을 떼지 않았다. 여자도 선뜻 목걸이를 내놓으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기 싸움하듯 두 사람 다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
민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양손을 깍지를 끼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민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민이 검지로 놓지 않고 있는 목걸이에만 시선을 모았다.
“이봐요.”
그제야 민아는 민의 눈을 바라본다.
[ 커리어우먼의 모습. 외국인들이 모인 대강당에서 PT하는 정민아의 모습. 박수를 치며 웃는 아버지와 회사 사람들. 웃으며 민을 바라보는 정민아. ]
그때와는 다른 잔상이다.
“이거요.”
민은 검지로 목걸이를 밀어 그녀 앞에 갖다 놓고 손을 뗐다. 시원한 아메리카노 두 잔이 민과 민아 앞에 놓였다. 민은 목걸이를 꼭 쥐고 있는 민아를 바라보았다.
“사실, 어젯밤 길거리에서 당신을 우연히 만난 게 아니었습니다. 당신 집 앞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CV엔터테인먼트 면접 보러 오셨죠? 전 당신을 내가 아는 사람으로 오해했고.”
“아!! 그럼!!”
“생각났으니 이제 더 이상 나에 대해 숨길 필요가 없겠군요. 그래요. 나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고. 내가 정말 착각했던 건지.”
“전 아닐 텐데요.”
"그건 모르죠.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민아는 받은 목걸이를 보다 다시 한 번 민을 바라보았다. 민은 다시 한 번 그녀의 눈을 보았다. 이 여자에 대해 꼭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같이 일해보고 싶습니다. 정민아씨, CV엔터테인먼트 정식 입사를 제안합니다. 오늘 처음 만난 걸로 하고. 서로에 대해 불편한 점이 있다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알아내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앞으로 천천히 해봅시다. 오늘부터 시작인 걸로 하고. OK?”
첫댓글 연인 사이가 돼긴 하나보네요... 미래를 봐보니~~ 그런데 왜 자꾸 승아의 잔상이 남는걸가요?? 민아가 아니라고 하니.. 아닌것 같은데 말이죠.. 저도 민이랑 같이 민아에 대해 계속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ㅋㅋ
감사합니다~ 단 한 분의 독자를 위해 열심히 써내려가겠습니다. ^^
처음부터 쭈욱 읽었어요~ 넘 재미잇어서 손도장도 꾸욱 찍으면서요~ 굉장히 독특한 소설이네요~ 흥미진진해요~
민아가 목걸이를 하면 숭아의 잔상이 남는거 아닐까요??ㅎ 혹시 승아의 동생이 아닐까요?ㅎ 그냥 혼자 상상해 봅니다~ㅋ
정말 재밋어요~담편이 매우몹시 기다려 지네요~작가님~^*^
감사합니다~ 주인공들의 마음을 읽어가면서 써내려 가겠습니다~~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
민아를 스카우트하네요
네, 민아가 자꾸 눈에 밟히는가 봅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세요~
이름도 성도 다른데..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잘 읽어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잘 오고 계시네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08 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