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12월 이즈음였다
당시 신혼때부터 살던 부천시의 작은연립주택을 팔고
서울시 고덕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부천에서 살던 집 값의 두배를 투자하고도 워낙 차이가 많아
15평의 오래되고 낡은 주공아파트로 이사를 와보니
개조되지 않은 거실바닥은 오래전 마루바닥으로 되어있었다.
영호 나이 7살, 4살짜리 영주 그리고 3살 영길이를 데리고
이사 온 첫날부터 아래층 할머니는 올라오셨다.
중환자가 계시니 뛰지 말라는 거였다.
이사 온 첫날부터 초비상상태로 아이들 단속을 하려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할머니 얼굴은 검고 주름살 깊이 패인 인상에
굽으신 허리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고생한 흔적이 보이는
촌스러우신 모습에 여유가 없어보이는 짜증스런 표정이라서
겁이 덜컥났다.
얼마후, 나는 남편과 함께 쇠고기를 사들고 아랫층으로
내려가 편찮으신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생각보다 중환자로서 몇 년째 중풍으로 말씀도 못하시는
할아버지는 손하나 자기힘으로 까닥하지 못하시고
안방 한가운데 누우신채 눈물만 흘리셨다.
낯 모르는 위층사람들이 찾아와서 얼른 쾌유하시라고 하니
얼마나 쓸쓸하시고 힘드셨으면 눈물로 답을 주셨을까?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나는 그 이후로 두말할것도 없이 아이들 단속을 하면서
거실마루바닥에 카펫이랑 두꺼운 천을 깔아놓고 살았다.
어느 날 할머니께서 올라오시고는 거실바닥에 깔린 지저분한
살림살이를 보시면서 당신 마음도 풀리셨다.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그 후 두달정도 지났을까, 할아버지는 조용히 운명을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그 당시 성당에 다니시지 않으셨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영세도 받으시고 나와 같은 반 식구가
되심으로써 남다른 정을 나누면서 살았다.
괜시리 내가 궁지에 몰린기분이다 보니 첫 인상을 무섭고
짜증스러운 모습으로 미리 평가한건 아니었을까?
가까이서 뵈니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면서 처음에 뵈었던
강한 인상 모습이 아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표정을 가지신
정이 넘치고 쓸쓸한 분이셨다.
그 당시 80 이 되신 헬레나 할머니는 결혼하여 얼마 안된 후
6.25가 터지고 남편을 따라 이남으로 오시다보니 친정식구들과
생이별을 하시면서 늘 친정엄마를 그리워하셨었다.
가끔 꿈에서 뵈던 친정엄마가 이제는 100살이 넘어서
꿈에서조차 보이지 않는거 보니 아마도 돌아가셨나보다고..
늘 가슴에 그리워하던 할머니 가슴앓이가
지금은 그 당시보다 더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은 이런 아픔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상상으로만 느껴지는 아픔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들은지 벌써 10 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할머니 연세도 90 이 되신거 같다.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을 이뻐해주시고
추운 겨울에도 안방에만 보일러를 돌리시며
예쁘게 신앙생활 하셨다.
영세를 받으시던 날, 나는 십자가 고상이랑 성모님을 선물해
드렸다.
얼마 후,
아들들이 그 집을 팔아서 큰 아들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서운한 이별을 하였다.
다행이 가까운 동네로 가셔서 늘 다니시던
아파트상가 병원으로 오실때마다 우리집에 들리셨다.
오실때마다 과자를 한아름 사오시길래 하루는 겨울 보온메리
내의를 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우리 역시 지금 이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7년동안 한 번도 뵌적이 없다.
가끔 안부전화를 해주시면 찾아뵈어야지 하면서도
당시 영선이가 어리다보니 말로만 앞세우며
한번도 찾아뵙지 못하고 살았다.
가끔 전화를 해 주시면 기억하고 돌아서면 내 생활에 바빠서
순간순간 잘 잊고 살았는데, 엊그제 헬레나 할머니께서
몇 년만에 전화를 주셨다.
" 애들 아빠는 잘 있지? 영호는 많이 컸지?..."
당연히 물으실 질문이 걱정스러워 다른 이야기로 너스레를
떨었는데, 갑자기 영호 이름을 듣는 순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영호가 없어요,...영호가 하늘나라로 갔어요."
그 후 서로 말을 못하고, 다음 주에 찾아뵙기로 약속한 후
길게 더 이상 대화를 못 나누었다.
이제 구십이 가까우신 할머니.. 아직도 할머니 가슴에는
우리가족을 사랑으로 기억해 주신다.
오래오래 건강하신 모습으로 계시길 가끔 기도드렸는데
다음 주에는 정말로 찾아뵈어야겠다.
돌아가시면 영영 못 만나실 수도 있는데, 동안 내 생각이 너무
부족했다.
올 성탄절은 무엇보다도 헬레나 할머니와의 만남으로
뜻깊은 날이 될거 같은 설레임이다.
04.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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