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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일에 제주에 도착해서 8월 12일까지 머물렀다.
날짜 수로 계산을 하면 총 165일이 된다. 그러나 중간에 병원 진료와 급한 개인 일로 10일 정도 서울에 출타한 관계로 대략 155일을 이곳에서 지냈다.
제주를 떠날 무렵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이 전화를 했다. 자기가 근무하는 매체에서 요즘 제주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다루려 하는데 거기에 의견을 좀 밝혀달라고 한다. 일단 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고사한 다음, 곰곰이 지난 시간을 생각해 봤다.
3월의 제주는 싱그러운 바다와 상큼한 바람으로 앞으로의 시간에 기대를 갖게 했다. 4월에는 노랑과 분홍의 향연이 펼쳐진다. 유채꽃과 벚꽃의 절묘한 조합은 최고의 봄 풍광으로 사람을 사로잡는다. 5월은 계절의 여왕. 활짝 핀 화려한 꽃들이 제각각 사람들을 유혹한다. 서서히 더워지는 6월은 바다를 찾는 사람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끌어당기고 7월은 다가오는 무더위를 알리듯 습기가 몸을 감싼다. 8월에는 태풍이 가뭄을 쫓으리라 기대했지만 오락가락하며 애만 태워 극심한 가뭄을 걱정하면서 제주를 떠났다. 그나마 뒤이은 비 소식에 안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시간을 좇아 흘러 보낸 일상을 주제어에 따라 되돌아본다.
바다- 수평선 너머 또 다른 바다를 넘보다
제주는 섬이다. 그러니 사방이 바다다. 눈이 가는 곳마다 바다가 있다. 한라산은 물론 자그마한 오름에 올라가도 항상 바다가 있다. 네 살 무렵 부산 송도 해수욕장에서 바다에 빠질 뻔한 뒤로 물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라보는 것은 좋다. 그냥 마음이 확 트이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바다를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물론 상당히 멀리 있지만 바다가 그 자체로 거기 있어서 좋다. 먼저 바다의 색깔을 본다. 하늘과 바다를 나누는 수평선은 날씨에 따라 꽤 달라진다. 태양의 빛이 강렬하면 바다는 그 빛에 색이 바랜다. 그래서 수평선도 흐릿해져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물빛의 선명함도 떨어져 바다는 백색에 가까운 화이트 톤이 된다. 그러다 구름이 끼어 해를 가리면 바다는 제 빛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잉크를 푼 듯한 짙은 색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한껏 드러낸다. 그럴 때 바람이라도 불어 물결이 일렁이면 순식간에 바다가 뒤집히고 물이 부서지면서 뛰노는 물고기의 비늘마냥 번쩍인다. 그래서 바다만 보고 있어도 다양한 표정으로 바뀌는 그 모습에 넋을 놓게 된다.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 또 다른 얼굴을 한 바다가 다음 차례로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비가 오면 바다는 다시 달라진다. 물 위에 더해지는 비를 한껏 받아들이는 넉넉한 모습은 거칠지만 오히려 풍요롭다. 때로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가늠이 잘 안되기도 한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이렇듯 가까이 다가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바람- 귓전을 두들기는 대자연의 교향악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역시 바람이 먼저 다가왔다. 3월에는 특히 바람이 꽤 세차게 불었다. 날씨는 뭍보다 춥지 않아서 바람을 쐬고 있어도 차가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저녁이면 기온이 내려가 실내 난방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바깥 기운은 차다기보다 기분 좋은 바람의 쓸림을 한껏 품고 있다. 바람은 그 강도에 따라 느낌도 달라진다. 우리가 음향 효과를 만들 때 보듯이 체에 모래 알갱이를 넣고 흔들며 내는 사르륵거리는 잔잔한 소리가 키 큰 나무를 싸안고 돌 때는 꽤 커진 음향으로 귀를 울린다. 그러다가 바람이 좀 더 세지면 나무의 잎을 온통 흔들어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그 힘으로 마치 나무의 뿌리까지 뽑아버릴 듯이 거세게 날뛴다. 작은 풀포기들은 바람의 세기에 따라 몸을 낮췄다가 다시 일어서는데 김수영은 시에서 절대 바람에 맞서지 않고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고 했지만 그렇게 바람을 의식하기보다는 그냥 다 맡겨버리는 것 같다. 그런 바람이 비를 만나면 묵직한 무게감이 더해진다. 7월 말 태풍 노루가 여러 날 방황하다가 결국 일본으로 방향을 털었을 때 사실 조금은 서운했다. 큰 피해가 없다면 강력한 태풍이 날뛰듯 선사하는 음향의 향연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밤에 키 큰 야자수 잎을 흔들면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듯하여 문을 열고 나가 보기도 했다. 비가 오면 바람은 빗줄기를 타고 더욱 거세게 땅 위로 내리꽂힌다. 한라산에 막혀 제주 시와 서귀포 시는 날씨도 사뭇 다르다고 한다. 그만큼 한라산의 위력이 크다. 그러나 바람은 거침없이 산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음악을 퍼뜨리고 있다.
사람- 오고 가는 만남 속에 모두가 좋았다
그동안 중복 방문을 포함해서 모두 51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대략 절반 정도의 시간은 누군가와 함께 보냈다. 3월에 도착하자마자 셋째언니가 왔다. 한 번도 혼자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다면서 숙소가 정해진 이번 기회를 자기 혼자 자유 여행하듯이 다녀보겠다며 득달같이 내려왔다. 혼자서 버스를 타고, 걷고, 시장도 구경하고 길거리 음식도 사먹으면서 즐겁게 지낸다. 여행을 떠날 때 숙소가 정해지면 한결 걸음이 가벼워지긴 한다. 내가 있어서 편안하게 다닐 수 있다면 좋다. 그리고 5월엔 처음으로 네 자매가 제주에서 만났다. 같은 부모 아래 태어나 혈연의 끈끈함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하지만 나이가 들어 각자 독립한 이후에는 제대로 만날 기회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형제자매란 어릴 때 성장기를 함께 지낸 그 시간에 봤던, 그 시기에 머물러 있는 그들이다. 아무튼 우리 네 자매는 성장한 뒤에 처음으로 같은 방에서 자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큰언니는 올해 71세, 둘째가 66세, 셋째가 65세, 내가 막내로 62세다. 둘째와 셋째는 연년생이어서 자랄 때도 많이 싸웠다. 이번 여행에서도 가끔씩 의견이 엇갈려 갈등을 빚긴 했지만 워낙 처음 함께하는 여행이다 보니 서로 조심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별 일 없이 마쳤다. 네 자매가 함께 다니니 좋은 점이 많았다. 택시에 함께 타고 식당에 가도 한 상 차림을 시킬 수 있다. 그 결과 요즘 말하는 가성비가 최대치였다. 과거를 회상할 때 서로 인식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평가는 달랐지만 상황에 대한 부가설명 없이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썩 좋은 경험이었다. 헤어질 땐 이런 기회를 자주 갖자는 말을 다함께 입 모아 하지만 그 또한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란 것도 안다. 그러나 미리 체념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살다 보면 이런 날이 또 불현듯 찾아올 수 있으니까.
또 우리 산악회 5월 모임을 제주에서 가졌다. 마침 그 날짜에 언론학회가 잡혀 있어 뜻밖의 귀한 손님들이 많이 모였다. 5월 19일 금요일 저녁 강정포구 횟집에서 가진 저녁 식사 자리에는 이남기 선배(신방과 동창회장, 2기), 임병수 선배, 최승호 선배, 동기와 여러 후배 등 15명의 동문이 모여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자세한 이야기는 이미 산행기에 있으므로 생략).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내 제주까지 내려와 준 모든 분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또 친구들도 번갈아 찾아와서 일상이 일렁거리도록 크고 작은 파문들을 일으키고 갔다. 조금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흠뻑 누렸다고 하겠다.
꽃- 다양한 색깔로 승부하는 풍광의 ‘꽃’
제주를 대표하는 꽃은 단연 유채꽃이다. 제주 풍경을 담은 모든 사진 중에서 가장 화사하고 전형적인 것을 꼽자면 바로 4월 들판을 한가득 채운 노란색의 물결을 품은 것이다. 물론 5월 무렵 한라산 윗세오름에 핀 철쭉의 붉음도 자랑할 만하다. 그래도 꼭 한 가지만 든다면 유채꽃을 따라갈 수는 없다.
가볼만한 곳은 유채꽃 축제가 열리는 가시리 지역이다. 조랑말 체험공원이 있어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이곳은 길가에 가득 핀 유채꽃 위로 벚꽃이 화사한 분홍빛을 드리우고 있어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한 색감이 더욱 선계와 같은 완벽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 주변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조랑말 체험공원 부근은 아예 자동차의 통행을 막고 걸어서만 다닐 수 있게 했다. 따라서 천천히 꽃의 향연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외국 관광객들도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게 동행에게 이래라저래라 포즈를 요구하고 있다. 노란색과 옅은 분홍빛의 향연이 끝나는 즈음 한라산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만발한다. 우리 산악회가 윗세오름까지 갔을 때는 아직 만발한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조금씩 산의 초록빛을 물들이는 정도였다. 그러나 적록의 선명한 보색 대비는 충분히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만했다. 어릴 때부터 친숙했던 꽃들이고 그 화려함을 이미 알고 있기에 어쩌면 새삼스러울 게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거친 바위와 거센 나무들 사이에서 오롯이 자기들만의 색깔을 내는 모습이 낯선 듯해서 더욱 좋았다. 그다음 눈길을 끄는 꽃은 수국이다. 내 숙소 입구에도 대략 50미터 정도의 길목에 수국이 소담스레 피었다. 수국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꽃 하나하나는 작지만 그것들이 모여 큼직한 송이를 이루어 커다란 꽃이 하나 활짝 피어 있는 것 같다. 아쉽게도 지는 모습은 누렇게 변해 버려 아름답지 않다. 활짝 피어 사람들을 기쁘게 한 시간도 비교적 짧다. 야외로 나가면 수국은 다양한 색깔로 반겨 준다. 보라색, 연하늘색에 심지어 보라색도 있다. 어떻게 다양한 색깔이 나오느냐고 물으니 어느 숲 해설사는 토양의 성분이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다고 한다. 특히 산수국은 짙은 하늘빛을 띠는 게 많은데 가운데 있는 아주 작은 꽃이 참꽃이고 그 꽃을 둘러싸고 있는 큰 꽃은 헛꽃이라고 한다. 꽃이 너무 작아 벌이나 나비의 눈길을 끌지 못해 수정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에 헛꽃을 크고 화려하게 피워 벌이나 나비를 끌어당겨 수정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번에 내가 주목한 꽃은 민들레다. 다른 어떤 꽃보다 독특하게 다가왔다. 몰론 어릴 때부터 자주 봐 왔기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천천히 길을 걸으면서 여유를 갖고 살펴보니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 우선 잎과 꽃의 부조화다. 어린 식물을 보면 꽃은 작고 노란 것이 예쁘게 피는데 그 꽃을 받치고 있는 잎은 어울리지 않게 크고 마치 도깨비 방망이같이 투박하다. 그래도 꽃을 확실히 받쳐 주는 것 같다. 자라면서 꽃과 잎은 각각 따로 간다. 그 속도가 판이하다. 게다가 방향도 달라 잎이 옆으로 땅을 차지하듯 다소 퍼져 가는 듯 자란다고 하면, 꽃은 하늘로 향해 올라가고 싶은 듯 높이 치솟기만 한다. 그러다 보니 잎과 점점 멀어진다. 혼자서 하늘을 탐해 뻗어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줄기가 매우 가늘다. 보고 있는 사람은 다소 걱정스럽다. 거의 30센티미터에 육박하도록 자라 잎을 아래로 내려다본다. 뿌리가 깊기 때문에 위태로운 듯 흔들거려도 부러지지는 않는다. 잎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제자리에서 땅을 지킨다. 그러다 꽃은 홀씨를 남겨 어디론가 날려 보낸다. 그동안 뿌리에서 떨어지고 싶어 했던 마음을 표현하듯이 말이다. 한순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녀도 다시 정착을 해야 하는데.
거문오름- 자연유산 이름에 걸맞은 신비 가득
오름은 제주도 전역에 퍼져 있는 기생화산체로 대략 368개가 있다고 한다. 하루에 하나씩 오르면 1년이 걸린다. 처음 내려왔을 때 오름에 많이 올라가 보려고 했다. 그러나 오름은 높진 않아도 기울기가 가파르다 보니 오르막보다 내리막길이 힘들었다. 발이 밑으로 쏠려 균형 잡기가 어려워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도 거문오름에는 가고 싶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기에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을 하니 이번 기회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동안 생각만 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5월에 내려온 다른 팀에서 미리 예약을 했는데 추가 인원을 받아준다고 해서 그쪽에 따라붙었다. 예약날짜에 가니 먼저 접수를 하고 출입증을 받는다. 출입증은 해설사를 따라다니는 동안 항상 목에 걸고 있어야 한다. 코스는 홈페이지에 자세히 나와 있듯이 3가지다. 각각 1시간, 2시간 30분, 3시간 30분의 시간이 걸린다. 나는 긴 코스를 걷고 싶었으나 일행이 2시간 30분짜리로 끝을 내잔다. 하긴 마지막 코스는 능선길이어서 그늘도 없고 해를 그대로 받으면서 걸어야 한다는데 날씨가 더워지고 있어 자신이 없기는 했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다음에는 친구들이 내려와서 다시 예약을 하고 찾았는데 역시 둘째 코스에서 끝을 내고 돌아섰다. 세 번째로 거문오름 트레킹 기간(7월 1~10일)에 그곳을 다시 찾았다. 일 년에 한번 미공개 구간을 개방한다. 우리 산악회원들이 내려와 함께 걸었다. 그 중 인상적인 곳은 더위에 지쳐 있을 때 찬 기운을 흠뻑 쐬게 해 준 뱅뒤굴이었다. 안내인들이 오래 있으면 감기에 걸린다며 쫓아내는 데도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오싹한 바람이 땀을 식혔다.
거문오름은 나무가 빽빽하게 덮여 모든 것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주민들이 그렇게 불러온 것이 이름으로 굳었다고 하고, 일부 학자들은 신(神)의 별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해설사에 따르면 1960년대 민둥산 가꾸기 정책에 따라 삼나무를 많이 심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는데 요즘은 계획적으로 삼나무를 베어낸다고 했다. 삼나무가 빨리 자라는 수종이어서 식목에는 좋지만 키가 크게 자라면 주위 키 작은 식물들에게 가는 햇빛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므로 다른 식생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부 삼나무를 잘라낸 구간을 보여 주는데 일 년 사이에 수백 가지의 식생이 새로 나타났다고 한다. 따라서 종 다양성을 위해 계속 계획을 세워 일정 규모를 베어 낼 것이라고.
곶자왈과 숲길-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생태계의 보고
제주에 오기 전 곶자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특정 지역을 말하는 고유명사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 보니 곶자왈이란 제주의 특별한 지형을 말하는 보통명사였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화산이 분출할 때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 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제주 고유어”라고 한다. 또한 이런 지형은 제주도의 동부, 서부, 북부에 걸쳐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지하수 함량이 풍부하고 보온, 보습 효과가 뛰어나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세계 유일의 독특한 숲이라고 한다. 따라서 곳곳에 있는 숲에는 이런 곶자왈 지형이 부분적으로나마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곶자왈이 제주 생태계의 보고(寶庫)라는 인식이 높아져 곶자왈 지키기 운동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내가 제주에서 으뜸으로 꼽는 숲길은 비자림이다. 1시간가량 걸리는 산책로는 그리 길지 않지만 이곳에 모여 있는 비자나무는 계획 조림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단일 수종으로 이처럼 대규모로 조성된 곳은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300년 이상 된 나무들은 번호표를 붙여 관리를 하는데 그 숫자가 1000그루가 넘는다. 그래서인지 비자림에 들어가면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감싼다. 숲에서만 나는 독특한 냄새를 느낄 수 있어 금방 건강해진 것 같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올 때마다 내가 적극 추천을 해서 여러 번 갔다. 해설사의 설명도 들으면서 걸으니 한결 기억나는 곳이 되었다.
사려니숲길은 총길이 10km로 2시간 30분 걷는다. 성판악을 거쳐 가는 교래 입구에서 들어가면 15분 정도 숲길을 걸어야 한다. 이쪽으로 차를 가지고 가면 주차장에 세워두고 셔틀버스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성판악 지나 516도로에서 내려 걸어가는 조붓한 그 길도 걸을 만하다. 반대쪽은 남조로로 연결되는데 붉은오름 옆쪽이다. 그쪽은 길이 넓고 길가에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어 접근이 편하다. 사려니숲길을 지키는 안내인은 이곳은 더운 여름에 와야 진가를 맛볼 수 있다고 자랑한다. 아주 더울 때 주변보다 기온이 5도 이상 낮다고 한다. 그래서 숲에만 들어가면 서늘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사려니숲길은 중심 길보다는 숲속 산책로를 걷는 것이 더 좋다. 발에 닿는 촉감도 폭신하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굵은 삼줄 같은 것으로 엮은 마대가 깔려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편안한 신발만 신으면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제주의 대표적인 숲길로 제일 유명한 곳이다.
다음으로 이번에 알게 된 머체왓 숲길이다. 5월에 알이 다녀와 소개를 했지만 제주에 있는 사람들도 몇몇이 권해 주었다. 그래서 후배와 한 번 다녀왔고, 멍게와 댕기가 왔을 때 걸어보니 편하고 아늑한 기분을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후배와 곶자왈 도립공원을 찾았다. 오설록 녹차밭에서 가까운 영어마을 부근에 있는데, 누구에게나 권할 만하다. 일부 지역에는 나무 데크도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고, 코스도 40분 정도에서 2시간까지 선택할 수 있다. 나무가 울창해서 더울 때도 충분히 해를 가려 주었으며 숲길을 걷는 동안 땀이 흐르기는 해도 폭염주의보에 신경 쓰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보존도 잘되어 있어 곶자왈의 실체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특산물- 신선한 재료들이 풍성, 영양도 듬뿍
서귀포 시내에는 매일 올레시장이 있고 동홍동에는 전통 5일장이 있다. 5일장은 4, 9일장이다. 장날이 되면 특별히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도 생긴다. 제주에 있으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감귤류다. 우리가 익히 아는 가장 흔한 귤에서 한라봉(일본에서 육성한 교잡종 감귤), 천혜향(오렌지+귤,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 레드향(한라봉+감귤, 일본에서 개발), 황금향(한라봉+천혜향)에 하귤(여름 귤), 하우스감귤까지 그야말로 종류가 다양하다. 물론 제주도에 왔으니 귤도 많이 먹어야겠지만 그보다 다른 산물에 눈길이 갔다. 처음 오일장에 갔을 때 다양한 나물 종류에 마음이 끌렸다. 제주도는 땅 자체가 붉은 황토여서 지나가다 땅만 봐도 농산물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 알다시피 당근이 유명하고 감자, 고구마가 맛있다. 물론 이곳 전통 오일장에는 뭍에서 난 특산물도 많다. 그러나 가능하면 제주도 것으로 많이 샀다. 브로콜리는 워낙 넒은 곳에서 경작하고 있어 풍부하다. 마늘, 양파, 파프리카, 가지, 연근, 표고버섯, 더덕, 미나리, 부추, 돼지감자, 참마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장에 가기만 하면 ‘지름신’(?)이 내려 충동구매를 하는 통에 자제하느라 고생을 하곤 했다. 3월에 올레시장에서 산 시래기는 떠나는 날까지 열심히 끓여 먹어 미네랄을 보충했다. 또 해녀들이 직접 따오는 미역은 꼬들꼬들해서 그냥 무쳐 먹어도 좋고 미역국을 끓여도 맛있다. 그 결과 체중 조절은 실패했으나 고른 영양으로 건강을 찾았다고 위로할 수밖에.
식당- 맛, 맛, 맛… 함께해서 더욱 맛난 집들
제주에 왔으니 어떤 유명한 맛집을 찾아야 하나. 인터넷에는 관련 정보가 넘친다. 그러나 지내다 보면 사실 별 게 없다. 먼저 제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흑돼지(나는 고기를 안 먹지만)를 한 번 먹고, 회를 먹으면 일단 큰 얼개는 갖춰진다. 다음으로 갈치조림과 구이, 고등어조림과 구이, 전복 솥밥과 구이, 오분작 등 뚝배기, 각종 국수들, 그러고는 줄을 서서 먹는 김밥과 떡볶이 등이 있다. 그러니 별달리 들 곳이 없다. 그 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곳을 몇 군데 정리한다.
(대금식당)
가장 먼저 꼽는 곳은 한림에 있는 대금식당이다. 그동안 가장 많이 찾기도 했고 함께 간 모든 사람이 만족한 곳이다. 부부가 종업원 없이 운영하는데 식탁이 6개 정도밖에 되지 않아 수용인원도 20명 정도가 최대다. 그러나 갈치조림만큼은 최고의 맛이다. 음식을 시키면 주인아저씨가 냉동 갈치라고 말한다. 생갈치는 비싸서 가격을 맞출 수가 없다고 나름의 이유를 설명하기에 생갈치는 언제 먹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7월에 오란다. 그때는 갈치가 많이 잡히는 철이어서 가격이 내려 생갈치로 조림을 해 줄 수 있단다. 그래서 지난 7월 말에 그 집을 찾았다. 역시 대만족이었다. 훨씬 부드러운 살이 적당한 양념을 머금어 그야말로 입에서 살살 녹는 듯하다. 서비스로 곁들여 주는 달걀말이도 일품인데, 올 초 달걀 대란을 겪고 난 다음에는 크기가 절반으로 줄었다. 없애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긴 하지만. 이 집의 단점은 가끔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번 허탕을 쳤다. 반드시 전화를 하고 가는 게 좋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대형 갈치조림 전문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대문집이라는 곳은 유명세를 타고 단체 관광객들의 식사 장소로 자리 잡았다. 대금식당이 문을 닫는 바람에 그곳에서 먹은 적도 있는데 맛은 그런 대로 먹을 만하지만 가격이 비싸다. 그러니 역시 선택은 대금식당이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카드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5만 원 짜리 몇 장은 들고 있어야 한다. 물론 사람 수에 따라 다르지만.
(김해횟집)
이번에 친구가 와서 알려준 횟집이다. 이 집을 알기 전까지는 중문 가는 길에 있는 ‘해송’ 횟집을 찾았다. 해송은 전망 좋고 음식도 괜찮지만 서울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는 회 코스 요리를 신선한 재료로 해 준다. 공항 부근 해안도로에 있는 횟집 중 하나인 김해횟집은 메뉴가 따로 없고 그날 들어온 생선을 손님상에 낸다. 가격도 한 사람에 얼마 식으로 두 사람은 8만 원, 두 사람 이상은 한 사람에 3만 5천 원이다. 4명이 가서 먹으면 가장 바람직하다. 밑반찬도 다양해서 해초, 젓갈, 파김치, 묵은지 등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이 맛있다. 밥도 초밥으로 양념을 해서 김과 함께 회를 올려서 먹으면 옆에서 말하는 소리도 듣지 않고 그냥 입으로 가져가기 바쁘다. 회 맛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미식가가 아니니 표현이 궁색하다. 다만 싱싱한 회를 씹을 때 느끼는 뻑뻑함이 없이 살짝 풀어진 느낌. 그래서 혀에서 부드럽게 받아들여진다. 활어를 잡아 숙성을 잘하는 게 중요한데 이 집은 그에 대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제껏 횟집에서 나오는 것 중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마지막 한 점까지 나눠 가며 먹은 것은 부산 자갈치시장 자연산 취급 횟집에 이어 두 번째다. 마지막에는 생선뼈를 진하게 우려낸 국물로 만든 미역국을 주는데 다들 구수하다며 맛있게 먹는다.
(오름나그네)
거문오름 부근에 있는 오름나그네는 친구들과 함께 거문오름을 탐방하고 난 뒤 처음 찾은 곳인데 아주 마음에 들어 알, 뜬구름, 꼬맹이와 함께 거문오름 트레킹에 나섰을 때 다시 찾았다. 역시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보말 칼국수, 검은콩들깨 국수, 파전, 도토리묵 무침 등이 메뉴다. 식당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알이 여행기에서 썼으니 그것을 참고하면 되겠다. 간략하게는 손님이 모든 것을 하는 셀프 시스템. 단, 음식이 나오는 속도는 무척 빨라서 기다리느라 지치는 일은 없다. 영업은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3시간만 한다. 나중에 후배들과 다시 갔는데 토요일이 정기휴일이라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토요일에 영업을 쉬는 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둥 연신 불평을 해대면서.
(대도식당)
서귀포 시내 천지연폭포 가는 길 좁은 길에 있다. 가게도 넓지 않다. TV에 나온 다음 유명해져 사람들이 붐빈다고 한다. 내가 갔던 날은 더운 8월 여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사람이 없다는 건 아니고 걱정을 하면서 갔는데 마침 자리가 있어 즉시 앉을 수 있었다. 김치를 넣은 복국을 끓여준다. 가격은 1만 3천 원으로 싸지는 않다. 제주도에서는 모든 음식이 비싼 편이다. 그래도 맛이 깔끔해서 술을 마신 다음 날 해장에는 제격이다.
(삼보식당)
전복과 오분작 뚝배기로 유명한 진주식당과 골목 하나 차이로 서귀포 올레 여행자센터 맞은편에 있다. 원래 현지 주민들이 많이 찾던 곳이라고 한다. 택시 기사들에게도 물어보면 이곳이 진주식당보다 낫다고 한다. 먹어 보니 된장 맛이 깊고 구수하다. 사람들도 많아 항상 붐비는 데다 오후에는 쉬는 시간(3~5시)도 있어 시간을 잘 맞춰야 허탕을 치지 않는다. 전복 뚝배기는 1만 3천 원을 받는다. 순수 오분작만 넣어서 해주는 곳은 이제 진주식당밖에 없다. 사람들은 전복의 새끼로 알고 있는 오분작이 비싼 이유에 대해 수긍하지 않는다. 뚝배기는 원래 제주 시청 앞에 있던 보건식당이 유명한데 이번에는 서귀포에 머물다 보니 그곳에 갈 기회는 없었다.
올레길- ‘놀멍 쉬멍’ 제주 한 바퀴는 꿈으로
제주도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관광자원은 올레길이다. 원래 올레란 제주도 토박이말로 집으로 연결된 작은 골목길을 말한다. 그러나 집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한번은 꺾인다고 한다. 그래서 집이 외부인에게 직접 노출되는 것을 막고 누가 오는지도 알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거기서 이름을 딴 올레는 제주도를 환상으로 연결하는 걷는 길이다. 나는 여섯 달 동안 제주도에 있으면 올레길을 다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무척 순진했던 셈이다. 떠나는 시점에서 돌아보니 절반도 걷지 못했다. 21개 코스에 부가 코스 5곳을 합하면 모두 26개 코스가 있다. 그런데 이 사업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생기고 그에 따라 수시로 변경 사항이 홈페이지에 오른다. 따라서 걷기로 마음먹었다면 일단 홈페이지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 한 가지 예로 친구들과 함께 올레 14-1 코스를 걸었다. 이 코스는 유일하게 바닷길이 없고 중간 지점인 오설록 녹차밭에서 다시 곶자왈로 들어가는 곳인데, 번잡하지 않아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다녀온 다음 오설록 이후 코스가 폐쇄되었다. 그곳은 사유지라고 했는데 결국 주인이 이용을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그 결과 전체 길이도 절반 정도 줄어들었다. 또 지역에 따라 공사를 하는 구간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럴 경우에는 임시로 경로를 변경해서 운영하기도 한다. 지금은 올레 1-1 코스인 우도 코스를 운영하지 않는다. 7, 8월 관광 성수기를 맞아 우도 주민들이 트레킹족들의 출입을 막는 것이다. 이렇듯 올레길을 둘러싼 주민의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일부 택시 기사는 올레길을 걸으러 오는 사람들은 택시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하고 가므로 제주도민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며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씨를 욕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올레가 만들어지면서 제주도에 들어오는 사람들 전체가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옛날처럼 택시를 대절해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지만 그건 올레 탓만이 아니다. 렌트카 사업이 활발해져 관광객들 대부분이 이제 차를 빌려서 다니기 때문이다.
또한 여름철에 올레길을 걷는 일은 피하길 권한다. 처음으로 일사병을 겪었다. 지난 7월 5일 올레 11코스를 걷다가 무리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으나 오전 11시에 폭염경보가 떴다. 그러나 걷다가 중간에 멈출 수도 없고, 평소 건강 상태를 생각했을 때 별 무리가 없으리라 여겨 내처 걸었다. 종점에 도달하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가 올라왔다. 마을 정자에 벌러덩 누워 한동안 숨고르기를 했다.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일어나 다시 걷다 보니 완전히 속이 뒤집힌다. 하는 수 없이 길에서 꾸역거리고 있으니 지나가는 차에서 젊은 아주머니가 괜찮으냐고 묻는다. 몸이 불편하냐며 병원에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택시만 불러달라는 부탁을 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겨우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친절한 아주머니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나니 겨우 정신이 들었지만 그다음에는 쉽사리 밖으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계속 폭염주의보가 나오고 조심하라는 안전 문자가 뜨는 실정이니 무리하게 나설 계제가 아니었다. 아무튼 나이가 들었다는 엄연한 사실에 잠시 숙연해졌다. 누구라도 이 더운 여름에는 올레길보다 숲길을 걷는 게 최선이다.
운전- 인생의 폭을 넓힌(?) 첫 사고의 경험
제주도에서 운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울에서 며칠간 도로 연수를 받고 제주에 내려와서도 며칠 연수를 받은 후 운전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손님맞이에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다 보니 쉽게 운전대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렌트카도 빌릴 수가 없게 되었다. 성수기로 들어가면서 장기 대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곳에 사는 후배의 도움으로 그 차를 빌려서 쓰기로 하고 운전자 추가 보험을 들었다. 학원 선생은 그런 대로 운전을 잘한다고 했지만 겁이 많은 나는 선뜻 운전대가 잡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후배가 일을 끝낸 6시 이후에 같이 차를 타고 서서히 연습을 했다. 후배는 손잡이를 꼭 잡고선 명줄 짧아지는 경험을 할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하루하루 거듭되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혼자서 몰고 나서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지난 7월 17일에 처음으로 혼자서 서귀포 시내를 달렸다. 제헌절에 기대 내 자신의 역사(?)를 하나 만들었다고나 할까. 막상 핸들을 잡고 운전석에 앉으니 생각한 것만큼 무섭진 않지만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자리하고 있기에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조금씩 익숙해졌다. 충분한 자신감은 없지만 조금씩 핸들을 잡는 게 편안해지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다 지난 8월 3일 성산 일출봉을 다녀올 생각으로 차를 몰고 가는 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서 오른쪽 옆 거울이 없어져 버렸다. 무언가와 부딪친 것이다.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내려 되돌아가 길가에 세워진 주위 차량을 살펴보니 별달리 흠이 생긴 차는 없다. 후배에게 황급히 연락을 하고 백미러와 왼쪽 거울로 조심조심 운전을 해서 돌아왔다. 놀란 가슴이 쉬이 안정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후배에게 차를 건넸더니 차량 사고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면 뺑소니가 될 수 있다나. 하늘이 노래지는 듯하다. 후배는 자기가 신고를 할 테니 그냥 가라고 한다. 집으로 가다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택시를 불러 현장으로 다시 갔다. 기사에게도 부탁을 해서 같이 살펴봤다. 그러나 역시 흠이 난 차량은 없다. 기사는 길에 떨어진 거울을 주워 왔다. 나는 미처 못 봤던 것이다. 한 겹 거울은 종이가 구겨진 것처럼 산산조각으로 금이 가 있다. 후배가 정비센터에 맡겨 고쳤다. 비용은 10만 6천 원. 첫 사고를 가볍게 막았다며 위로한다. 자기는 첫 접촉사고에서 100만 원가량 나왔다면서. 어쨌든 돈보다 사람이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돌아왔다. 과연 계속 운전할 수 있을지. 이것도 새로운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아닌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안이하게 넘겨 버릴 일도 아니다. 아무튼 8월 6일에는 다시 후배와 곶자왈 공원까지 운전을 했다. 무사히 다녀오면서 제주에서 펼친(?) 나의 운전 이력을 마감했다. 첫 사고에 대한 기억과 함께!!!
벌레- 지네가 깨우친 통증에 대한 생생한 기억
아침에는 새 소리에 잠을 깨고, 가끔 집 앞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꿩이나 낮게 나는 제비를 보기도 하고,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노루나 고양이 같은 것들이 길에 죽어 있는, 이른바 로드킬 현장도 목격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달리 집 안에는 벌레가 많다. 제주에는 원래 바퀴벌레가 많다고 한다. 토양 탓인지 새로 지은 집에서도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예전부터 지네가 많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살충제를 구비하고 모기에도 물리지 않도록 각종 용품을 준비했다. 그런데 정작 바퀴벌레는 어두울 때 잠깐 나타나고 화장실에서 죽어 있는 것을 봤지만 크게 신경을 쓰게 하지는 않는다. 가장 귀찮게 하는 것은 거미다. 예부터 아침 거미는 죽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이 사실 거미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사람에게 크게 해를 끼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구석구석에 거미줄을 친다. 아침에 풀밭에 나가도 나무 사이로 걸을라치면 어김없이 거미집에 걸린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또 종류도 참 많다. 내가 본 것만 해도 대략 10가지는 된다. 다리가 아주 가늘고 긴 것부터 몸이 굵고 짧거나 무늬가 화려하고 빨리 움직이는 것 등 처음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지네에 물리고 말았다. 새벽에 화장실에 들어가 신을 신는데 엄지발가락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온다. 잠결에 문지방이라도 찼나 싶어 잠깐 주저앉았다가 나오니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정말 아프다. 잠도 달아나고 혼자서 발가락을 쥐어 잡고는 거의 울음을 쏟을 뻔했다. 곰곰 생각하다 일어나 욕실 신발을 들여다보니 가늘고 긴 것이 그 안에 자리를 하고 있다. 복수하듯이 살충제를 들고 와 뿌리니 꿈틀거린다. 본의 아니게 살생을 한 셈이다. 신발 밖으로 나온 것에 다시 한 번 살충제를 뿌리니 축 늘어져 버린다. 다음 날까지 계속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나 하고 걱정했으나 다행히 좀 나아졌다. 그래도 통증은 둔중하게 남아 있어 이물감이 느껴진다. 자그마한 모기에게 물리면 며칠 가렵다 마는데 이건 사뭇 다르다. 그래도 걱정한 것처럼 나빠지진 않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제주에 적응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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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 계신 덕분에 제주를 두번이나 갈 수 있었습니다. 항상 너른 마음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제주살이 기록, 꼼꼼함과 세심함으로 재미와 함께 여러 정보까지 얻게 됐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회장님 덕에 제주가 더 친근하고 가까워졌어요. 고맙습니다. 전 제주에서 살 생각은 없고 열흘 정도만 머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제주도를 수십 차례 들렀지만 3박4일 이상 머물러본 적이 없네요. 늘 마음이 한가롭지 않고 무언가에 쫓기듯 다녔지요. 이번에 올리신 글도 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처음에는 시처럼 읽혀 좋았는데 차 옆 유리가 없어져 버렸다는 대목에서 뿜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필설로 표현하는 건 어줍잖은 일인 듯합니다. 제주 살이가 형의 인생 항로에 충실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유명 소설가의 소설 속 문장을 읽는 느낌입니다. 특히 박완서...
다들 긴 글 읽고 댓글도 달아줘서 고마워. 다음에 이번에 못 간 계절에 가면 다시 또 초대를 하지요. 거기 사는 내 후배는 12월을 최고의 달로 꼽더라. 가을과 겨울을 온전히 보내 보는 것도 한 방법. 어쨌든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또 이렇게 넘기고 이제부터 열심히 뭘 할지 생각해야 할 듯. 내일 산에서 봅시다.
올 여름 제주의 경험은 정맡 특별했습니다. 제주 숲들의 아름다움과 비슷한 취향(밤잠 없고 먹는 거 별로 안 밝히고 등등)의 사람들과의 여행은 몸에 각인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언니 덕분에, 억지로 떼를 써서 내려간 제주였지만, 그래서 더 감사하고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언니, 다음엔 울릉도 살기, 어때요? ㅎㅎㅎ
최근에 제가 본 비자림 사진은 정말 최고였어요. 몇 해 전, 겨울에 봤었던 그 숲이 정말 맞나 싶을 정도로요. 해서 비자림은 꼭 6, 7, 8월에 한 번 가보는 걸로요...^^
늦게나마 재미지게 읽었어요.제주를 주제별로 아주 편하게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제 운전까지 하시니 다음은 자동차로 세계여행하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