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358) - 추억을 안고 꿈을 새긴 설 연휴
대동강도 풀린다는 우수절기에 설을 쇠기는 드문 일, 낮 기온이 10도를 웃도는 따뜻한 설 연휴를 고향의 명찰 선운사를 거점으로 어릴 적의 무대를 돌아보며 의미 있게 보냈다. 이번 설은 주말까지 5일간이나 이어지는 황금연휴, 국내외로 편한 날이 없는 어수선한 때, 모처럼 심신의 스트레스 풀며 잘 쇠었나요?
설 연휴 첫날인 18일, 천혜경로원에서 생의 마지막 8년여를 보낸 할아버지의 장례예배가 있었다. 캐나다에 있다는 하나뿐인 혈육(딸)은 살기가 고달픈지 연락이 끊긴 체 쓸쓸하게 떠나는 마지막 길을 소담스럽게 장식한 꽃무리가 배웅한다.

예배를 마치고 사촌동생들과 선운사의 우체국수련원으로 향하였다. 광주에서 선운사까지는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 경내에 들어서니 연휴기간 주차요금을 받지 않는다는 안내표지가 찾아오는 손님을 반기고. 수십 개의 객실이 연휴를 쉬러 온 행락객들로 꽉 찼다. 여장을 풀고 가족들과 산책길에 나섰다. 평소에 붐비던 대웅전 뜰이 한산하고 개울 따라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치린 저녁메뉴는 토종닭에 녹두죽, 고향특산의 복분자주를 곁들인 저녁식탁이 깔끔하다.

설날, 가문(할아버지의 후손은 자그마치 230여명)의 평강과 번영을 염원하는 기도를 드린 후 떡국을 들고 고향의 선영을 찾았다. 가족들 대부분이 서울과 경기일원에 거주하고 있어 대표로 성묫길에 나선 셈, 동학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진 고창군 공음면 구수리의 야산과 고향 마을 뒷산 두 곳이 선영이다. 성묘 후 사촌들과 함께 다닌 모교(상하초등학교)에 들르니. 정문에 80회 졸업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나는 21회이고 사촌 동생은 22회와 26회, 어릴 적 꿈이 서린 교정을 떠난 지 어느덧 60년이 흘렀도다. 교정에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과 또 다른 선생님이 정년 후에 기증한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상이 세워져 있고.

고향마을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구시포항이 있다. 어릴 적 또래들과 자주 찾아 멱 감고 조개 캔 추억이 서린 곳, 10년 넘게 조성중인 항만공사가 완공단계에 이르러 그옛날 아스라이 보이던 가막섬까지 방파제가 건설되고 그 너머에 등대와 선착장이 들어섰다. 열세살 때이던가, 썰물에 물이 빠져 가까워진 가막섬까지 접근하던 중 밀물이 밀려오자 황급히 되돌아오다 목덜미까지 잠기는 위험에 처하였다. 세 살 터울의 동생을 안고 위기를 넘긴 한적한 시골바다가 현대식항만으로 탈바꿈하였구나.

선운사로 돌아오는 길에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의 생가를 찾았다.(며칠 인촌타계 6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를 설립한 선각자인 김성수의 생가는 선운사에서 4km 남짓 떨어진 부안면 인촌마을, 한국시단의 거장 서정주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질마재 마을과 가까운 곳이다. 1860년대에 인촌의 조부가 지은 생가는 천석꾼의 집안답게 안채와 사랑채, 소슬 대문이 번듯한 고택이다. 삼양사와 경방의 창업자인 인촌의 동생 김연수가 1970년대에 새로 지은 기와집과 아담한 정원, 집 앞의 넓은 주차공간이 명가의 품격을 드러낸다.

오후에는 선운사에서 3km쯤 떨어진 오솔길에 자리 잡은 도솔암과 등반코스가 아름다운 낙조대를 돌아보았다. 낙조대에서 길게 뻗은 능선에는 용이 뚫고 나갔다는 전설이 담긴 용문굴이 있다. 고향의 초등학교에서 선운사까지는 직선거리로 10여km, 어릴 적 그 길 따라 하룻밤 묵으며 소풍갔던 추억이 서린 옛길을 되짚는 발걸음에 만감이 교차한다. 낙조대는 대장금의 최상궁이 잘못을 뉘우치며 벼랑으로 떨어져 죽는 장면을 담은 운치 있는 장소, 그곳에 올라 일몰직전 뉘엿거리는 석양을 마라보는 정취가 일품이다.

가족들의 애환과 사연이 깃든 고향방문, 주변의 명소탐방, 고즈넉한 산사의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아 주고받는 안부가 명절의 분위기를 돋우고 가문의 화목과 우애를 다진다. 손녀와 함께 세배하는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은 아들은 마치 여행기를 보는 것 같다며 좋아하고 사촌들과 조카들도 반가움과 기쁨을 드러낸다. 명절이면 바라지하느라 애쓰던 아내와 제수도 모처럼 맑은 바람 쐬며 느긋한 시간 누림을 즐거워하고.

연휴동안 주민 센터에서 빌린 책은 김진명 소설 싸드와 앙리 장 마르탱이 지은 책의 탄생이다. 최근 한국과 미국, 중국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싸드의 실체와 그 파급상황을 인식하고 인류문명에 획기적 영향을 끼친 책과 종이, 인쇄술의 변천과정을 살피는 것으로 미진한 정보와 지식의 갈증을 푼 것도 설 연휴가 안겨준 또 다른 소득이다.
연휴 마지막 날은 주일, 예배 후 젊은 교우들이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세 살부터 아흔까지 노소가 한데 어울린 윷놀이가 이어진다. 어린이들은 우리의 미래, 예배 후 가진 회식 자리에서 초중고를 졸업하는 청소년들에게 격려금을 전하며 발전을 기원하였다. 이런저런 사연의 설을 쇠며 느낀 소회, 주일 예배 때 읽은 말씀을 통하여 교훈을 얻는다. '하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너희 자녀는 장래 일을 말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요 너희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라.'(사도행전 2장 17절) 자녀들이여, 미래를 통찰하고 젊은이들여, 비전을 보이며 어른들이여, 못다이룬 꿈을 펼치소서.

* 지난주에 구순의 김종필 씨는 죽음을 관조한다고 적었는데 공교롭게 엊그제 부인 박영옥 여사가 별세하며 그의 언행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빈소를 찾은 문상객들에게 맞춤형 조언을 건네며 애틋한 부부애를 토로한 그의 심경 한 토막, ‘사랑이 뭔지 모르고 지냈는데 부인이 저 세상으로 가니까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된다. 아직도 내 곁에 있는 것 같고 방을 들여다 볼 때면 지금이라도 부인이 나올 것 같다. 내가 먼저 가야 울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을 텐데 반대로 내가 울고 있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 생전에 (아내한테) 잘못해준 게 전부 후회가 된다. 사후에 (후회)하면 뭐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