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야등
양 승 복
비취빛 보석이다. 바위는 태고 적부터 흐르는 물살을 받아 연마했으리라. 아름다운 곡선이 밀가루를 반죽해 빗어놓은 여인의 살결같이 희고 부드럽다. 청량하기 그지없는 계곡 물길을 잡아 가둔 모양이 청자 같기도 하고, 깨끗하게 닦은 호야 같기도 하다 . 맑지 않으면 낼 수 없는 푸르름은 차갑게 차오르는 가을의 찬 서리가 느껴진다. 설악계곡에 앉아 청정한 물속으로 내 마음을 담금질하다 눈을 들어 보니 호야를 든 아버지가 숲속에서 나오는 듯 했다.
한손으로 간간히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리고 한손에는 호야를 들고 급한 걸음으로 건너오시는 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새끼줄에 꼬여있는 호야가 깨질까 뛰지 못하시고 한손을 살짝 올려 반동을 줄이려고 조심하시는 모습이 역역했다. 지금 그 날의 모습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간다. 너무나 맑아 시린 빛을 내던 영동의 청정한 냇가로 내 어린 맑은 마음을 찾아 담금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모두가 등잔불을 쓰는데 우리 집만 호야 등을 사용했다. 바람에 꺼지지 않게 호야를 씌워 밝고 안전했기에 청주에서 전기 불을 쓰던 우리 집은 호야 등을 고집했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허덕거리는 등잔불과는 다르게 호야 속에서 심지를 태우고 있는 등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지가 잘나서 그런 것처럼 도도하게 흐느적거리며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호야는 심지가 맞지 않으면 시커먼 그름으로 존재감을 나타냈다. 어쩔래 나를 이대로 둘꺼냐며 마치 시위를 하듯 나를 몰아세웠다. 호야 닦는 일은 조심스럽고 섬세한 일이다. 종잇장 같은 유리 속에 비누칠한 수건을 넣고 그름 닦는 일은 외줄 타는 일만큼 긴장되는 일이 일이었다. 냇가로 닦으러 가다 부딪혀 깨고, 닦다 금가고, 잘 닦아 놓고 자갈에 미끄러져 궁둥이로 깨고. 바위에 올려놓았더니 바람이 뒹굴려 떨어뜨려 깨고. 이유도 많은 이별이지만 그때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 아버지얼굴이 스프링에 튕기듯 나타나곤 했다. 실수의 연발에도 호야 닦는 일은 늘 내 차지였다. 찬찬하지 못한 나에게 아버지는 변함없이 호야 닦는 숙제를 주셨다. 잘 닦은 호야를 물속에 넣고 흐르는 물을 흘려보내면 물인지 호야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깨끗함이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놓았다.
영동가실 때마다 호야꾸러미를 들고 오셨다. 멀미나도록 먼 산길을 새끼줄에 호리 병 같은 호야를 두 세 개 씩 꼬여 들고 오셨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께서 오시다가 호야를 깨셨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활기 넘치는 젊음이셨을 것인데 말이다.
종잇장 같은 유리를 들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들을 지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신 내 아버지다. 너무나 엄하여 아버지는 늘 자애로운 어머니에 가려져 어린 시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리도록 푸른 물빛을 만나면 그 속에 녹아 있는 맑은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를 훨씬 앞서버린 지금, 청렴하셨던 내 아버지 사랑의 깊이를 비취빛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다.
깨끗한 호야는 밝았다. 동생들은 자고 아버지는 책을 읽으시며 내 일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데 일기를 쓸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학교에 갔다고만 생각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다음을 고민 하며 호야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애꿋은 붉은 불빛만 멍하게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의 바늘이 천을 뚫는 소리가 똑똑 들리고 아버지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사그락 사그락 가라앉은 공기를 울리는 소리는 내 어린 감성을 행복하게 했다. 바람소리도 듣고 감 떨어지는 소리도 듣고 겨울이면 눈 내리는 소리도 호야등 속에서 들을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도 그 나른한 포근함을 잊을 수 없다.
호야의 둥근 밑 부분은 빛을 붉게 만드는 파장의 비밀이 있었을 것이다. 하늘에 떠있는 작은 물방울들이 햇볕을 받아 무지개의 찬란함을 이루지 않았던가. 분명 호야도 따뜻하고 아늑한 파장을 일도록 되어 있으리라.
여름이면 호야불은 마루에 걸렸다. 그러면 모기가 모두 호야불로 모여 우리는 모기장을 치고 방에 누워 몸부림치는 작은 벌레들의 몸짓을 구경했다, 가끔은 커다란 벌레들도 날라 와 호야를 향해 달려들기도 했다. 쉬지 않고 왜 저렇게도 뜨거운 불빛을 향애 달려드는지 알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어둠 속에 등대 같은 호야 등을 찾아 뒤엉키던 벌레들이 아침이면 뜨락에 호야에 싸늘함으로 존재도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한밤의 호야 등은 작은 생명들이 살다간 마지막 등불이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작은 생명들의 날개 짓이 살아 있는 마지막 행위였음을 그때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둠속에 파장을 일으키며 퍼지는 붉은 빛이 좋았을 뿐이었다.
밤이슬에 모두가 내려앉은 어둠속에서 호야불로만 보았던 포근한 것들이 미세한 공기의 울림들이 아버지가 주신 선물임을 아주 늦게 깨닫게 되었다.
첫댓글 "한밤의 호야 등은 작은 생명들이 살다간 마지막 등불이다" 미세한 공기의 울림들 속에서 아버지의 체취를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 종잇장 같은 유리 속에 비누칠한 수건을 넣고 그름 닦는 일은 외줄 타는 일만큼 긴장되는 일이 일이었다. 냇가로 닦으러 가다 부딪혀 깨고, 닦다 금가고, 잘 닦아 놓고 자갈에 미끄러져 궁둥이로 깨고. 바위에 올려놓았더니 바람이 뒹굴려 떨어뜨려 깨고. 이유도 많은 이별이지만 그때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 아버지얼굴이 스프링에 튕기듯 나타나곤 했다. 실수의 연발에도 호야 닦는 일은 늘 내 차지였다. 찬찬하지 못한 나에게 아버지는 변함없이 호야 닦는 숙제를 주셨다. 잘 닦은 호야를 물속에 넣고 흐르는 물을 흘려보내면 물인지 호야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깨끗함이 긴장했던 마음을 풀어놓았다."
" 깨끗한 호야는 밝았다. 동생들은 자고 아버지는 책을 읽으시며 내 일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런데 일기를 쓸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학교에 갔다고만 생각이 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다음을 고민 하며 호야 속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애꿋은 붉은 불빛만 멍하게 바라보곤 했다. 어머니의 바늘이 천을 뚫는 소리가 똑똑 들리고 아버지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사그락 사그락 가라앉은 공기를 울리는 소리는 내 어린 감성을 행복하게 했다. 바람소리도 듣고 감 떨어지는 소리도 듣고 겨울이면 눈 내리는 소리도 호야등 속에서 들을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도 그 나른한 포근함을 잊을 수 없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작은 생명들의 날개 짓이 살아 있는 마지막 행위였음을 그때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둠속에 파장을 일으키며 퍼지는 붉은 빛이 좋았을 뿐이었다.밤이슬에 모두가 내려앉은 어둠속에서 호야불로만 보았던
포근한 것들이 미세한 공기의 울림들이 아버지가 주신 선물임을 아주 늦게 깨닫게 되었다..."
호야등...등이름이 예쁩니다. 감상 잘했습니다. 선생님.
수필을 쓴다는 것은 잘 쓰고 못 쓰는 것을 떠나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어 좋네요.
여여화님, 오랫만에 편하고 저릿한 글 읽어봅니다. 참 좋으네요. 서정적이고 추억이 서려있어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면 호야등이 불을 밝히고 있을 착각 속에 빠집니다. 제목도 좋고, 은은한 호야등불 같은 그리움도 댕기네요. 감상잘했습니다.
잘 쓰시는 글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훌륭한 문우를 만났습니다. 열심히 하시고 푸른솔 발전을 위해 함께 걸어보입시다. ㅎㅎ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릴 적 추억을 수필이 아니면 그리움 만으로 그치겠지요.이렇게 마음을 옮겨 적을 수 있는 수필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습니다.
필력이 대단하십니다. 대구의 청람 수필에 박시윤, 허도남 수필가들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용기 잃지마시고 급히 서루르지마시고 ㅅ걸어갑시다.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친구가 되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빌면서!! 송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