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후에 대한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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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海垣, 이경국)
왕비는 家門의 힘만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조선시대 27명의 왕은 간택을 하기 위하여 여러방면으로 심혈을 기울렸던 것은 사실이다.
북한의 3대 세습도 무진 웃기는 일이지만 기쁨조 선발에는 미모는 물론이다. 처녀막이 없으면 초기 탈락이라니 더 웃기는 얘기다.
물론 왕후(王后)나 황후(皇后)도 처녀를 고르기 마련이다. 몽고로 처녀 공출(供出)을 피하기 위하여 조혼(早婚)을 하였던 슬픈 역사이다.
몽고와 왜놈 때문에 백성의 고통과 처녀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던 아픈 과거사를 잊어선 아니 될 것이다.
왕비를 많이 배출한 가문 1위는 청주 한씨로 6명이다. 한명회의 딸 두 명은 요절한 비운의 왕비였다.
두 번째가 파평윤씨의 5명이다. 불행하게도 폐비윤씨도 있다.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읽으면서 고교 시절 눈물을 자아 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 번째가 여흥민씨로 4명이 배출이 되었다. 민비라고 격하시켜 부르고 있는 명성왕후는 일본의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준 조선조의 비극이었다.
이번에는 왕비를 두 분이나 배출하였지만 비운의 기록으로 가슴 아리게 한 巨昌 신씨 (愼氏)에 대하여 거론해 보기로 한다.
거창 신씨의 대종회 사무실이 '진성이씨 서울화수회'사무실 옆에 있어 자주 드나 들면서 정이 든 까닭 이기도 하다. 물론 실학자 하빈(河濱) 신후담(愼候澹)은 너무나 유명하다.
우선 연산군의 부인 거창 愼씨는 어질고 덕이 많으며 온순하고 근신한 성품으로 22세에 왕비에 올랐으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그만 33세에 폐비가 되어 버렸다.
이는 고대광실에 살다가 부엌조차 없는 사글세 살이를 하는 것보다 더 비참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어 진다.
조선 27명의 임금 가운데 연산군과 광해군만 왕릉이 아니고 묘소(墓所) 이다. 유네스코에 등재조차 할 수없으니 죽어서도 비운은 지속되어 지고 있다.
다행히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에 있던 묘소를 부인 거창 신씨의 요청으로 도봉구 방학동으로 천장(遷葬)하여 부인의 묘옆에 안치 되었다. 딸 휘순공주의 묘는 앞줄에 있으니 그나마 덜 외로울 것이다.
위치도 좋은 편이며 묘소의 아래에 있는 수령 500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말없이 비운의 역사를 전해 주는 듯한 느낌이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불같은 성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역질과 화병으로 2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연산군의 마지막 말은 '아내 신씨가 보고 싶다.'라고 한다. 그러니 있을 때 잘 해야지....
부인은 왕후에서 거창군부인으로 강등되고 만 것이다.
연산군은 현대의학으로 짐작컨데 극심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고 보여진다.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충격때문이다.
거창 신씨의 두번째 왕후는 11代 중종의 비인 단경왕후 신씨 이다. 20세에 왕비가 되어 7일간 왕비로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의 주인공이다.
부부금슬이 좋았으나 중종반정의 父 신수근 이 연산군의 처남 (좌의정)이라고 살해되어 폐위가 된 것이다. 평생을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 살다가
71세에 승하하여 양주군 장흥면 온릉(溫陵)에 잠들어 있다.
친정에서 외로움 속에서 긴 생을 마무리 했으니 그 상념이 기하려나!
살아 생전 찬바람 속의 생애였으니 온릉에서 따뜻하게 지내실 것이다. 닥치는 역경을 어찌 왕후의 힘으로 피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어쩌면 왕비도 예정조화론적 숙명으로 이해하여야 될지 모를 일이다. 칠거지악으로 찍소리 못하게 왕비들을 제도로 묶어 두었던 왕조시대의 비극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서울근교 서오릉에 있는 장희빈의 묘소에는 '희빈 장씨의 무덤'이라고 되어 있다. 이장하여 바위아래 있다. 아들 경종이 있었으나 어머니는 생전의 질투로 사약을 받았으며 죽어서도 묘소마져 초라하다.
한 때는 미모로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 하였던 왕비였다. 琴瑟도 좋았으나 緣이 다하니 이웃집 아주머니만도 못한 것은 왕이나 범부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경건한 마음으로 무덤앞에 서면 생각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특히 왕릉은 역사를 반추(反芻)해 주는 거울이다. 지도자는 거울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는 생각이다.
國母든 영부인이든 머리에 든게 없고 옷치장만 일삼으면 나라가 망조(亡兆)가 들기 마련이다. 식모같은 국모가 판을 친 비운의 경험도 했었다.
거창 愼氏 가문에서 배출한 두 분의
왕후는 인품이 훌륭하였으나 한 분은 임금을 잘못 만나서 낭패를 당하셨고
다른 한 분은 그와 연류되어 생이별을 하여 장수하셨으니 얼마나 가슴시린
생을 보내셨을까 싶다.
마치 단종의 妃인 정순왕후가 생각난다. 단종이 17세에 죽임을 당했으나 정순왕후는 82세까지 생존하셨다.
비구니가 되어 청룡사의 바루바닥이 닳도록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인근 동망산에 올라 먼 영월을 바라 보면서 단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던 것이다. 후세에 그곳에 東望亭을 지어서 기리고 있다.
중종의 단경왕후를 생각하면 단종의 정순왕후가 오버랩 되어 스친다.
두 왕후는 82세, 71세까지 장수하신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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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국 프리랜서
조선시대 옹후에 대한 생각/이경국
류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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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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