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로 남제서 본문을 끊었다.
먼저 1번 문장은 백제가 남제에 사신을 보낸 것인데, 언제 였는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앞 부분이 뜯겨 나가, 몇 년도의 일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명 연간(483-493) 초반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런데 이때 백제왕 모대(동성왕)은 광양, 광릉, 대방, 청하 태수라는 관직을 부하에게 주었으니, 남제에게 알아두어라(사후 일방적 통보다)고 사신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사신을 보낸 해를 다시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2번 자료다. 즉 그 해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싸웠는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가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3번 자료를 보면 백제가 지난 경오년에 북위를 물리친 일을 설명하면서, 부하들의 관직을 매라왕, 벽중왕, 불중후, 면중후로 삼았고, 성양태수, 조선태수, 낙랑태수를 삼았다는 것을 역시 사후에 통보하는 사신을 보낸다.
여기서 경오년은 490년이다. 그런데 문맥상 경오년의 일은 2번 문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다시 1번에 백제가 남제에게 사신 보낸 시점이 된다.
그리고 490년의 일을 다시 남제에게 알려주는 시점은 건무2년 즉 495년이다.
왜 백제는 490년의 일을 495년에 남제에게 알렸을까?
그것은 백제가 490년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 전후 처리를 하는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 신하들에 대한 포상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정리된 시점이 495년이라고 볼 수 있겟다. 490년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일등 장군들은 모두 왕에 봉해진다.
그런데 매라, 벽중, 불중, 면중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 대신 이 전쟁 이후 새로 봉해진 3명의 태수 즉 낙랑, 성양, 조선 태수는 그 임지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낙랑과 조선은 현재의 하북성 동부지역, 성양은 산동반도 남부의 지금의 청도시 부근으로 본다.
결국 490년 전쟁은 산동반도 남부의 청도에서 부터 지금의 황하와 난하 하류 일대에 걸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자.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할 것이 490년 전쟁 이전에 이미 백제가 대륙 지역에 태수를 두고 있었다는 것. 즉 1번 자료다. 1번 자료는 백제와 남제간의 상호 우호에 관한 내용일 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한 긱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490년 북위와의 전쟁 이전에 이미 백제가 광릉, 청하, 광양, 대방 태수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광릉은 남제와 가까운 지금의 강소성 남부로 보고 있고, 청하는 산동반도 북부 지역으로 본다. 그리고 대방과 광양은 난하 인근으로 볼 수 있다.
과연 백제가 490년 이전에도 이 지역에 거점을 둔 것일까?
이때 주목할 것이 자치통감에 등장하는 488년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이다. 삼국사기는 남제서 백제전이 아닌, 자치통감 기록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을 488년으로 보고 있다. 488년 전쟁에서 백제가 북위와 전쟁한 후에 백제가 1번 기록처럼 사신을 남제에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광릉은 남제와 가까운 곳인 만큼, 남제와의 연락을 위한 자를 위해 광릉태수라는 직위가 붙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청하태수는 좀 의미가 다르다. 청하라는 지역은 일찍이 송(남제 이전의 나라)이 차지하고 있다가, 북위에게 빼앗긴 땅이다. 송나라는 465년에 청하태수로 담금이란 자를 임명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송을 계승한 남제에서 청하태수로 자국인이 아닌 백제인의 등장을 자연스럽게 그냥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것은 송보다 국력이 약했던 남제가 북위와 상대하기 위해서 백제를 용병으로 끌어왔고, 그 결과 백제가 북위군을 몰아내고 청하 등을 차지했기에, 남제도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다. 즉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은 2회 이상 되었다는 점이다.
488년 전쟁을 수습하면서, 백제가 청하태수 등 4개 태수를 두었고,
490년 전쟁을 수습하면서, 백제가 성양태수 등 3개 태수를 두었다는 점은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백제는 488년에서 495년까지는 최소 7개 태수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백제는 언제까지 대륙에 영토를 지속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기록은 물론 현재로서는 쉽게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무령왕 16년 기록인 516년 기록이다. 백제가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백제가 고구려에 여러번 패했으나, 이제는 다시 강국이 되엇다는 표현이다. 516년에 백제가 강국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료에서도 증명된다.
즉 남조 나라들이 백제와 고구려에 왕들에게 준 장군명칭을 보자.
백제왕은 420년부터 430, 457, 490년에 계속해서 2품인 진동대장군이다.
그런데 고구려왕은 422년에 2품인 정동대장군이었다가, 463년에는 1품인 거기대장군, 480년에도 1품인 표기대장군, 502년에도 표기대장군이다. 이때는 북위에서도 고구려와 남제로 동렬에 놓고 대우할 정도로 고구려의 힘이 막강했던 시절이라, 남조의 나라들도 고구려가 백제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521년에는 백제왕이 2품인 영동대장군인데 비해, 520년 고구려왕은 3품인 영동장군에 불과하다. 물론 북위왕조에서는 여전히 고구려왕을 1품인 거기대장군, 표기대장군의 칭호를 준다.
하지만 왜 양나라가 520년 경에 고구려보다 백제를 더 강하다고 보았을까. 물론 고구려와 관계소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제가 현실적으로 강했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524년에 양나라가 백제왕을 수동장군에 임명한다는 사실이다. 분명 영동대장군 보다 낮은 장군호칭이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는 고구려 안장왕이 백제를 몰라치는 시기다. 북한 학계에서는 529년에 고구려가 백제 깊숙히 쳐들어가 대전일대까지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안장왕과 한씨미녀의 전승은 이 무렵 고구려가 백제의 북방을 공격하여 성공했음을 알려주는 방증이 된다.
이 무렵 부터 백제가 약화되었다면, 대륙의 여러 군들도 이 무렵에 사라진 것은 아닐까. 이런 정황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는 520년대에 대규모의 백성들의 이주사건이 있었다. 즉, 이때 흉년이 들어 약 60만호 정도가 고향을 떠나 떠도는 시기였다. 이런 북위 6진의 난 등 혼란기에 당시 인구가 적었던 대륙 동해안의 백제 군들도 유지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대륙 백제가 통전에는 백제 멸망시점인 660년 이후에도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제의 용병차원에서 가서 얻은 동해안의 영토를 무사히 이때까지 지속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제서에 기록된 백제의 대륙진출. 그 상한과 하한 시점에 대해서는 진서의 요서,진평 2군 점렴 문제나, 통전의 백제 멸망시기의 백제 등과는 별도로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즉 남제서에 등장하는 백제는 488년에서 부터 520년대 중반까지 대륙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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