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門고수와의 Dinner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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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에 교훈을 새긴 까닭이 궁금합니다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20호(2018. 9. 09)
이재후(10회, 79세)김앤장법률사무소대표변호사
총동창회가 이번에 초청한 동문고수는 10회 이재후 김앤장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다. 이 변호사는 일찌감치 로펌에 발을 들여놓으며 김앤장의 영역을 글로벌시장으로 확대했다. 그 주인공이 변호사를 폭우가 쏟아지는 8월말 동문들과 함께 만났다. 후배들이 그에게 “존경합니다”라고
하자 이 동문은 “사랑합니다”라고 화답했다. 후배들은 선배의 삶을 듣기 위해 격의 없는 질문을 쏟아냈고, 선배는
아낌없는 조언을 했다. 디너타임은 선후배의 정을 쌓는, 그런
자리였다.
왼쪽부터 박성수(38회), 조동석(40회), 현천욱(24회), 이재후(10회), 유승엽(38회), 나상용(39회) 동문
참석자: 이재후(10회) 김앤장법률사무소대표변호사
현천욱(24회) 김앤장변호사·총동창회장
유승엽(38회) 삼성엔지니어링법무팀장·변호사
박성수(38회) 김앤장법률사무소변호사
나상용(39회) 법무법인광장변호사
사진: 서정욱(37회·편집위원회간사)
진행·정리: 조동석 (40회, 객원편집위원, 데일리안 정치부장)
일시 / 장소: 2018. 8. 28. 7시 / 압구정 설매네
+남들보다 로펌
행(行)이 빨랐습니다. 계기는 무엇입니까?
“선배의 권유가 결정적이었어요. 제가 로펌에 간다고 하자 남들이 놀랐습니다. 물론 집에서도 반대가 심했어요. 법원에서도 사표수리를 안 했죠.”
당시 이 동문은 부장판사 발령을 목전에 두고 있던 터였다. 주변에서는 부장판사를 거치고 변호사를 개업해도 늦지 않다고 만류했다고 한다.
“대법원재판연구관(1977~79년) 당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어요. 자연스럽게 미국의 대형 로펌을 탐구하기 시작했죠. 우리나라에도 그런 로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질주는 아무도 못 말렸다. 뿐만 아니다. 이 동문의 로펌 행(行) 1년 전 한 변호사가 로펌을 만들었다. 그의 생각이 더욱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동문의 참여로 김앤장 송무파트가 열렸다.
+첫 출발
당시 김앤장은
벤처수준이지 않았습니까?
“김앤장 처음에는 변호사가 10명 정도 였습니다.”
그는 이후 인재영입에 나선다. 세계 최고 로펌을 향한 그의 숙명이었다.
“쉼 없이 최고 인재를 영입했고, 지금도 이런 행보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인재는 꿈을 이루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죠.”
김앤장은 1970년대 설립 때부터 한국에서 가장 선진화한 로펌을 지향했다. 한국경제의 성장에 맞춰 기업들도 쑥쑥 성장했고, 김앤장을 찾는 클라이언트도 많아졌다. 외환위기 때는 M&A건이 몰려들면서 로펌도 커졌다.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해마다 네팔을 갑니다. 엄홍길 휴먼재단 이사장 자격으로요. 지금까지 14개 학교를 지었고, 올해 안으로 1개교를 추가합니다.”
그는 2008년부터 엄홍길 휴먼재단 이사장을 맡고있다. 엄홍길씨는 한국의 대표산악인으로 고(故) 박영석대장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 인류역사상 9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했다.
“첫 학교 기공 때와 완공 때 갔는데, 학교가 해발 4000m에 있어요. 건물 헐고 새로 짓는 것이죠. 이동수단이 없으니 걸어서 갑니다.”
이 동문은 서울법대 산악회와 서울고 OB산악회멤버다. 서울고 동문들과 아프리카 만년설의 킬리만자로, 일본 알프스를 등반한 산악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아픈 기억이 있었다.
“네팔에 휴먼재단 한국지부장이 있었는데, 사고로 숨졌어요.”
안타까운 기억을 회상하자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프로보노 선두주자입니다
프로보노(ProBono)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무료봉사’라는 뜻이다. 이 동문은 이를 몸소 실천한다. 영국의 법률전문매체 후즈후리걸의 사회공헌분야‘ 세계최고 프로보노 로펌’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대표변호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처럼 전문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법조인들은 사회적 혜택을 많이 받은 계층이고, 성공의 상당부분은 우리 사회의 덕분인 것도 부인할 수 없죠.”
이어 “내몽골 사막에 나무심기를 했어요. 나무생존율이 70%나 되죠. 대학생들과 또 미래 숲이란 단체를 함께하고 있어요. UN사막화방지협약에서도 인정했죠. 상징적 의미가 큽니다.”
아울러 그는 사회복지 공동 모금회 (사랑의열매)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법조계에 몸담은 계기는 무엇입니까?
“고교 때 은사님이 권유했습니다. 이 은사님은 1회 사법시험 합격생입니다. 또 야인시대 열혈검사 롤 모델이기도 했죠.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대학 다닐 때 한국사에 큰 일이 많이 벌어졌죠. 3학년 때 4·19, 4학년 때 5·16이 일어났어요.”
이 동문은 사단법인 4월회 2~4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고교시절 김원규 초대 교장선생님이 많이 기억납니다. 엄격했죠. 교장선생님뿐만 아닙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훌륭했습니다. 나중에 대부분 대학교수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이 동문은 은사님 중 조병화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인연을 맺는다.
+청계천에 교훈을 새긴 까닭이 궁금합니다
“동래중 다니다가 서울중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런데 교훈이 아직까지도 머리에 심어져 있어요. 청계천 복원 때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직접 쓰거나 그린 가로 세로 10㎝ 도자기 재질 타일의 ‘소망의벽’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 ‘깨끗하자 부지런하자 책임지키자’를 써넣었죠.”
이 소망의 벽은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있다.
“이 교훈은 우리나라역사를 개조하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민은 변화를 싫어했죠. 이를 감안한 초대 교장선생님의 생각이 투영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그래서 교훈을 청계천 벽에 새겨 넣었죠.”
+사회공헌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요
그는 전문직 성공과 사회공헌간 연관성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성공을 위해 사회공헌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동문은
“변호사 전직 후 사회공헌 활동하는 주변인물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됐어요. 사회공헌에 치중하면 업무에 지장이 있지 않겠어요? 처음에는 업무에 집중했죠.”
나이가 들수록 차근차근 사회모임에 참여했다는 얘기다. 이 동문의 좌우명은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해 도와준다는 뜻이다. 이 동문에게 딱 맞는 말이다. 그의 개척자 정신 덕에 김앤장은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형사건을 가장 많이 수임했다. 더욱이 1999년 국내 로펌 최초 공익활동위원회를
구성해 로펌의 전문성이 공익분야에서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공익활동은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디자인했고, 수혜자도 개인을 넘어 다문화 여성과 탈북 새터민, 장애인, 소외 청소년 등 그룹과 집단으로 확대했다.
+고교시절 가장 기억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TV에 나왔어요. 담임선생님과 함께. 서울법대 수석 자격으로 .또 1957년부터 펜싱을 했는데, 당시 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제가 해보겠다고 했죠. 그게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나라 펜싱은 일본인이 보급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펜싱은 굉장히 낯선 스포츠였다. 이 동문의 개척자정신이 이때도 발휘된다. 고교 졸업앨범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펜싱 인이 아닐까?
그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에 이렇게 잘라 말한다.
“청계천에 가서 제가 새긴 교훈을 찾아보세요. 그렇게
살면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세요.”
이재후(10회) 동문_ 앞줄 맨 오른쪽 <출처> 10회 졸업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