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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婚興行 쇼
一 松 韓 吉 洙
해마다 벼가 고개를 숙이는 가을철이 되면 이 나라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들머리 益山市에서는 擧市的인 축제가 벌어진다. 백제의 서동인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결혼행사 축제이다. 이를 계기로 익산 시와 경주 시는 자매관계를 맺고 매년 익산 시에서는 서동(무왕)을 선발하고 경주 시에서는 선화공주를 선발하여 익산 시로 시집보내면서 많은 하객이 참여하여 함께 잔치를 벌린다. 익산에서 선발한 맛 동방인 무왕과 신라의 선화공주가 혼례를 치르는 행사, 이것이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포장하여 구경꾼들을 불러 모으는 쇼로 이 거시적인 잔치를 익산 시에서는 시의 대표적인 축제로 키우고 있다.
이 흥행몰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익산 시와 맛 동방 즉 무왕과의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익산시는 시내 석왕동에 소재한 익산쌍릉(사적 제87호)에 잠들고 있는 주인공을 역사서도 아닌 관세음음험기의 내용을 인용하여 백제의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나 이 쌍릉은 馬韓의 始祖이신 무강왕과 왕비의 능임이 분명하다. 이를 규명하기 위하여서는 잠시 역사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멀리 단군조선을 이은 기자조선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愛民如子의 施政을 펼치신 箕子 聖祖께서 平壤城에 개국하시니 이를 箕子朝鮮이라
한다. 이 朝鮮이 929年동안 이어오다가 기원전 194년 41代 哀王 (諱 準)代에 은혜
를 모르고 배반한 연燕의 衛滿에게 나라를 내주고 배로 南下하여 지금의 익산시
금마에 馬韓을 개국하니 이 분이 武康王(諱 準)이시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史記)》와 반고의 《漢書)》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
어 있다. 그에 따르면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
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準王의 外臣으로 있었다가 반란을 일으
켜서 위만조선을 세웠다.
[輿地勝覽]에 이르기를 [秦始皇 27년 辛巳(B.C 220년)에 箕子朝鮮의 準(武康王,哀王)이 왕위에 올랐으나 漢 惠帝 원년 丁未(B.C 194년)에 燕나라 사람 衛滿이 침략해서 왕험성(관미성)을 빼앗자 준왕이 左右宮人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金馬郡에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쳐 馬韓이라 했다.]
安鼎福의 東史綱目에 의하면 [馬韓은 1世 武康王(箕準)부터 10세 學王까지 211년(202년)을 繼承했다. 馬韓의 초대 임금은 衛滿세력으로부터 뛰쳐나온 準王 즉 武康王이요, 제8대 元王의 諱는 勳이다. 癸亥(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元王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맏이는 友平으로 北原 鮮于氏라 하고 둘째는 友諒으로 上黨 韓氏라 칭하였으며 마지막은 德陽 奇氏라 칭하여 分姓하였다.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서쪽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辰韓, 남쪽은 弁韓에 접해 있었으며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해당하며, 그 외에도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를 세력권으로 한 광대한 지역이었으며 마한의 54개국 중 주요국가로는 乾馬國․ 目支國(月支國) ․伯濟國이 있었다.]
箕準王이 建國한 馬韓國이 대한민국 정통 역사가 되었으며 益山의 金馬에 遷都하여 金馬渚라 칭하였는데 최근에 발굴된 성안에서는 왕궁평성, 金馬猪城, 上部大官銘의 기와 쪽이 출토되어 미륵산성, 왕궁평성, 그리고 우금산성과 같은 때의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사유로 사적 제87호인 이 쌍릉이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 아니고 마한의 무강왕과 그 비의 능이라고 하는지 그 근거를 소상하게 제시하겠다.
0, 익산 쌍릉은 이미 고려사절요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엄연히 무강왕과 왕비의 능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0, 청주 한 씨와 태원 선우 씨 덕양 기 씨 등 3성이 합동으로 까마득한 옛날부터 매년 음 3월 15일에 이 쌍릉에 제사를 모셔왔으며 1957년 2월 23일 관에서 발급한 묘적증명에서도 청주한씨 시조 묘라고 인증을 해 준바 있고 능이 있는 토지 42.300평의 소유권도 한 씨들이 연명으로 공동등기를 하여 한 씨들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0,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장을 하던 이병호 박사가 쓴 “내가 사랑한 백제”와 김명환 교수의 논문 “사적 제87호 익산 쌍릉에 대한 연구논고”외에 제주대학교 안창범 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이 이 익산 쌍릉은 무강왕과 그 왕비능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0, 서동은 백제 27대 위덕왕의 아들 혹은 29대 법왕의 서자로 기록되는 등 태생의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맛 동방은 무슨 사유로 사비(부여)의 구중궁궐을 빠져나와 하필 이곳 금마까지 흘러와서 마를 팔아 생계를 이어야 할 정도로 가난하고 구차하게 살았느냐? 더구나 그의 모친은 위덕왕 또는 법왕의 왕비인데 왕궁을 버리고 이곳에 와서 아들과 같이 구걸하면서 가난하고 천하게 산 이유는 무엇인가?
0, 서동은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같은 국내도 아닌데 신라라는 적국에 진평왕의 셋째 딸인 공주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또 예쁘다는 것은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느냐
0, 백제는 적국인 신라와의 싸움에서 성왕이 戰死하고 좌평 4명과 병력 29.600명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가 치열했던 살벌한 시기에 적국의 국경을 넘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데 서동은 대마불사인지 어떻게 서라벌에 들어가서 마를 케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양국 간에 언어가 다를 수도 있는데도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공주를 꼬여 낼 수가 있었느냐? 그리고 신라 진평왕은 어떻게 애지중지 기른 자기 딸 공주를 누구인지도 모르는 비렁뱅이에게 보낼 수가 있느냐? 왕이 아니고 평민인 필자라도 절대로 딸을 그런 뜨내기에게 내어주지는 않는다.
0, 600년 先王인 법왕이 죽은 후 뒤를 이어 백제 30대 왕으로 즉위한 무왕이 자기 처가인 신라를 여느 때와 다르게 12회나 각을 세워 공격을 하는 등 치열한 전투를 했는데 이는 선화공주의 입장이나 장인 장모를 생각해서라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신라와의 전쟁 중 큰 전쟁
*, 602년 신라 아막산성을 공격했으나 패배. *, 611년 가잠성을 공격하여 승리.
*, 616년 신라 모산 성을 공격했으나 패배. *, 623년 신라 늑노현을 침범.
*, 633년 신라 서곡성을 점령. *, 636년 신라 독산성을 습격했으나 패배.
0, 왕위에 오른 무왕이 죽었을 때 사비부근의 집단 능역인 능산리나 그 부근의 야산에 묻혀 있어야할 무왕의 시신이 사비(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옮겨 구지 이곳에다 매장한 이유는 무엇이며 또 왕비의 시신까지 운구했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보아 보행으로는 며칠 걸리는 거리이다.
0, 부여의 궁남지 일대에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만나 사랑 놀음을 했다는 유적이 있는데 이곳과 중복이 되는 설화가 그곳에도 있으니 어느 것이 참 내용인가?
0, 결국에는 선화공주의 실체가 없다는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서동 출신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 서동설화가 나온다. 그러나 익산 미륵사지 서 탑을 해체 중 금동사리함 명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 미륵사지 석탑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닌 사택 왕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선화 공주와의 결혼이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러자 익산 시에서는 사택왕비는 선화공주가 사망한 뒤에 제취한 왕비라고 주장을 바꾸고 있으니 얼마나 낯간지러운 이야기인지.
0, 원광대학의 교수를 중심으로 일부 학자들이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에 따라 이 능을 백제의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으나 위와 같은 사실로 보아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백제 30대 왕인 무왕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부왕으로 29대 왕인 법왕의 子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27대 위덕왕의 子라고도 하며 과부가 용왕과 교통하여 출생했다고 하는 등 설이 많다. 더구나 전남대의 임영진 교수는 무왕은 온조왕계가 아닌 마한계통의 家系일 수도 있다고 주장 하는데 지금 황사가 낀 하늘처럼 흐릿하고 선명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2009년 1월 14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미륵사지 서 탑을 해체 정비하다가 心柱 위쪽 중앙의 사리 공에서 금제 사리 호. 금제사리 봉안기 등 사리장엄을 발견하였다 작은 병인 금제 사리 호를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이 2중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금제 사리 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넓이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을 해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여기에는 백제 왕후가 淨財를 희사해서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施主, 석탑의 건립연대를 정확히 밝혀주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봉안기에는 시주자인 왕후가 백제 8대 귀족 중 하나인 沙宅씨의 딸로 기록돼 있어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조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 선화공주 이야기는 허구라는 사실이 확연하게 들어나는 대목이다.
이 왕릉은 고려 충숙왕 16년 3월 도굴당한바 있으며 2번째로 1917년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일본인 야쓰이 세이이치라는 학자가 이 능을 발굴한 결과 내부에 아무것도 없고 다만 여자 어금니치아가 있었다는 보고서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익산시가 원광대학의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최완규 교수에게 용역을 주어 3번째로 발굴토록 했는데 아무것도 없이 여자 이만 있었다는 곳에서 느닷없이 사람의 뼈 102개가 들어 있는 나무상자가 나왔다고 떠들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도대체 2번째 발굴당시에 없었던 뼈가 나무상자에 담아서 있었다고 하니 이걸 누가 믿고 신뢰할 수 가 있느냐 이 말이다. 어느 개뼈다귀인지 어디에서 누가 갖다가 집어넣은 것인지 도대체 이를 확인하고 믿을 만한 단서가 없다. 이는 역사 날조를 한 범죄행위로서 수사의 대상이다. 왕른 인근에 CCTV가 있었다면 금방 찾아 낼 수도 있다. 이 엉터리 뼈를 놓고 2018. 7. 18. 11:10 높으신 학자들이 회의를 했다고 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7세기 사망한 큰 키의 노년기 남성” 인골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는 내용이다.
“쌍릉의 존재는 「고려사」에서 처음 확인되며, 고려 충숙왕 때(1327년) 도굴되었다는 사건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부터 고조선 준왕이나 백제 무왕의 능이라는 설이 있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쌍릉을 단 며칠 만에 발굴하면서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3줄의 내용과 2장의 사진, 2장의 도면만 공식기록을 전부로 남겨놓았다.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하나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익산시와 공동으로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석실 끝부분에서 여태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바 없던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100년 전 일제가 발굴하면서 다른 유물들은 유출했지만, 이는 꺼내 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목의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되었고, 골반 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고,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며, 불규칙한 결절이 있다. 한편 뼈가 심하게 부식되어 유전자 분석은 쉽지 않았다. 추출한 콜라겐의 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 벼, 보리, 콩 등의 섭취량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고,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으로는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의 가능성도 확인했다.익산은 질 좋은 화강암의 산지로 유명한데, 석실의 석재는 약 9㎞ 떨어진 함열읍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알려진 棺材는 늦어도 7세기 전반 이전에 벌목된 것을 가공한 것이다. 목관은 최고급 건축・가구재인 금송으로 제작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유골함은 잣나무 류의 판자로 만들었다.“필자는 이 보고서를 접하고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동의할 수가 없다. 그 사유는?
첫째로 이 뼈는 일본인 학자가 일부러 들여다 놓을 리는 없고 1327년 고려 충숙왕 때 도굴 범이 집어 넣었다면 그가 우리 一家나 宗員도 아닌데 어떻게 나무상자를 준비하여 뼈를 추려서 상자에 담아 모셔놓았느냐 이 말이다. 도둑이 마음이 급해서 보물이나 훔치려는데 정신이 있지 남의 조상에 예를 갖출 리가 없지 않는가? 도둑이 陵에 구멍을 뚫어놓고 상자를 준비하려고 왔다 갔다 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리 없다.
두 번째는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이치는 장님도 아닌데 이 뼈 상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가 되지 아니한다. 이렇게 많은 유골이 담겨있는 상자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여자의 어금니만 있었다는 보고서를 낼 수 가 있는가? 그가 아무것도 없다고 감추고 허위로 발표할 이유도 없다.
세 번째는 사람의 시신은 육탈이 되면 뼈가 큰대(大)나 ㅣ자 형태로 누워있어야 하거늘 죽은 자의 뼈가 어떻게 잣나무 판재로 만든 상자 안에 기어들어 갈 수가 있느냐 이 말이다. 이것은 후에 누가 외부에서 들여다 놓고 장난을 쳤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2019년 2월 23일자 한겨레신문 토요 판에 보면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최완규 소장은 가톨릭 대 응용해부연구소에 의뢰해서 102개 뼛조각을 컴퓨터단층촬영으로 집중분석한 뒤 이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라면 당연히 필자가 주장한 위의 세 가지 의문점을 짚어내서 심도 있게 토의해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정당한 수순인데도 무조건 “백제 무왕이십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하는 최완규 소장의 지시 한마디에 모든 학자들이 개 뼈인지도 모르는 유골에게 모두 고개를 숙였다고 하는데 누구의 뼈 인지도 모르고 예를 갖춘 학자들의 하는 짓이 처량하고 한심했다. 이것이 과연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우리나라의 학자들의 자세인가?
청주한씨 서원군파 대종회 한만교 감사가 이의 진실을 규명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발굴당사자 들에게 반영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필자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내 보일 내용은 거의 다 제시 했다고 생각되는데 독자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의 공감이 가는지 어니면 다른 의향이 있는지 서슴없는 고견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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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마음에 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영원히 남아 있었으면.
오늘도
사랑으로 가득한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얼마전 인터넷과 익산이 고향인 어느분께 백제에 관해서 자세히 읽고, 듣고, 요즘 그곳의 역사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오늘 자세히 올려주신 글을 대하면서 좀더 정리가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익산, 공주, 경주, 부여등을 여행하고 싶다는 맘이 간절해졌습니다 오늘 백제에 관한 역사탐방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긴 글 정리해 올려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글 마음에 담아 갑니다
감사합니다
가을의 향기를 마음에 담으며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