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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다가오는 사순시기,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셨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주시지 않는답니다. 너무나 신박한 표현들 앞에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 주시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구조하시는 하느님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 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 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세상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접촉과 함께 그의 장애를 풀어주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펼쳐 안수를 해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등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치유받은 사람입장에서 묵상해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순간이었는지. 놀랍게도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인데,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수님의 따뜻함과 자상함에 그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깨달았고, 치유 받았습니다.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사실 덤이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르코 8,22-26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이 나의 시력을 결정한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을 때 라이언 긱스라는 전설적인 공격수가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박지성 선수도 한국 대표팀에 한 명만 데려오라면 누구를 데려오고 싶으냐는 질문에 라이언 긱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긱스는 월드컵에서 뛰는 것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조국 웨일스가 월드컵 예선을 단 한 번도 통과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축구는 아무리 혼자 잘 해도 나머지 10명의 평균을 넘을 수 없습니다.
오는 복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해주시는 사건과 장소의 이동이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눈의 치유와 소경이 머무는 장소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바로 볼 수 있고, 또 시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선택하여 속한 가톨릭교회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를 예수 그리스도로 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를 먹어 영원히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그들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십니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창세 3,22)
그렇다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곧 생명나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람을 나무로 볼 수 없다면 성탄트리를 보면서도 그것이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소경의 첫 번째 눈을 띄워주시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한데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는 행위나 그에게 안수하시는 행위가 다 성령을 주시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그러자 그는 눈이 밝아져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어보시는 예수님께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에 이 생명나무를 성탄트리로 장식하며 우리가 이 상징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졌음을 입증합니다.
예로부터 성탄트리 맨 위에 별을 달아 다윗의 별인 그리스도를 상징했고, 불을 밝혀 빛으로 오신 예수님임을 보여주었으며, 둥그런 밀떡을 달아 이 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죄의 동네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공동체에 속하던 그 속한 사람은 그 공동체의 시력을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개신교라는 공동체에 속해있다면 성탄트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성체와 성혈로 볼 수 있을까요?
그 공동체는 성체성혈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가졌던 믿음의 눈을 다시 잃게 됩니다.
그 영적인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믿음이 있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는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수령이 2,3천년쯤 되며, 높이가 100m를 넘고 둘레도 8-9m나 되는 큰 참나무 숲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 덩치 큰 나무들이 깊이 뿌리를 박고 그 뿌리로 다른 나무들과 서로서로를 연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란 이와 같습니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그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각자의 믿음이 있습니다.
혼자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려면 그 공동체를 떠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공동체에 머물면 그 공동체의 평균정도는 자랄 수 있습니다.
한 오케스트라에 속해있으며 혼자 다른 곡을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면 다른 믿음엔 다다를 수 없습니다.
각 공동체가 제공하는 시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벗어난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시력, 내가 속한 공동체의 믿음이 결국 나의 영적인 시력을 결정함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눈의 치유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함께 이끄셨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8,22-26: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신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23b).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이다.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 점차로 이루어진다. 눈을 가지고 있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갖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빛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중국 고전 서적인 이담속찬(耳談續纂)에 등장하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삼세시습 지우팔십(三歲之習至于八十),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기대 수명이 80을 훨씬 넘었지만, 그 옛날에 80까지 산다는 것은 거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올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바뀌지 않을까요?
뇌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뇌는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심지어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단정을 지으면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마음을 고착형 마인드셋과 성장형 마인드셋으로 구분합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지능, 성격,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 어떤 마인드셋을 가져야 할까요?
답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고착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역시 나는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라는 마음을 갖고,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아직 문제를 풀지 못했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충분히 변화될 수 있으며,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너무 쉽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아직’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노력한다면 나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쳐 달라는 청을 받습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쳐서 낫게 하십니다. 먼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다음,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때,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러자 똑똑히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주님의 뜻을 선명하게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냥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에 계속 맡기면서 선명하게 주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형 마인드셋의 모습입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분명히 계속해서 주님 뜻에 다가서면서 주님과 일치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뚜렷이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성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아름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다운 대답을 한다(E.E.커밍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창세 8,21)
노아의 제물은
늘 정결하였으므로
주님 앞에서 향기로웠네.
의로운 이들이 바치는
순수한 제물에는
하느님의 생각을 되돌리는
묘한 힘이 있어서
하느님께서
그것을 보시면
파멸과 저주가 아니라
한없는 자비로
마음을 바꾸신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입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때,
우리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올바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눈을 감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활짝 열려 있을 때 잘 보입니다.
내가 누군가가 미워서 그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있으면 그 사람이 잘 안 보입니다.
미워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사랑스런 자녀로 보일 때
그 때가 바로
믿음의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영혼의 눈에 낀 백태가 벗겨지고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영혼은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눈을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게 너무 많은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또 묻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마르 8, 25)
삶이라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제대로 보고
똑바로
사랑할 수 없어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찾는 것이
다시 똑바로 보는
빛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똑똑히
보게 하십니다.
치유는
주님과 함께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제대로 볼 때
제대로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회복된
건강한 눈으로
제대로 보고
제대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우리는 진실로
똑똑히 분명히
보며 살고 있는지요.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무엇이 보이느냐?"(마르8,23)
'주님, 제 눈을 뜨게 하소서!'
오늘 복음(마르8,22-26)은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 북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고, 베드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사이다로 갔을 때,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어 그에게 손을 대십니다. 그의 두 눈에 당신의 손을 대시어 그가 시력을 회복하여 똑똑히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어제 독서였던 '노아의 홍수'는 '하느님의 분노'입니다.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자,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리게 하시어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십니다.
오늘 독서(창세8,6-13.20-22)는 '노아의 홍수가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땅의 물이 마른 것을 확인한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께 번제물을 바칩니다.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8,21)
하느님께서 분노하신 것을 후회하십니다. 그리고 다시는 사람 때문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죽음(파멸)의 뿌리인 모든 악의 시작은 보는 눈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볼 수 있는 눈은 가지고 있지만 선(善)이신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피조물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적 시력을 잃은 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그래서 악으로부터 해방되어 제대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이 청이 이루어지도록 임마누엘이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주님, 제 눈을 뜨게 하소서!"
복음말씀
제1독서
<노아가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