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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묵상글 (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 님 만나는 날에 . 등 )
** 07:25. 김찬선 신부님, 최정훈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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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 만나는 날에>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닮고픈 님을
만나는 설레는 날에
내 닮고픈 님께서
님 닮은 날 보시고
기뻐하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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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27 05:49
-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까지의 단계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오늘 주님 말씀은 당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뜯어보면 주님 말씀을 들어서 실천하기까지의 단계가 있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천국에 가는 사람도 있지만 못 가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말씀을 들어서 실천하기까지의 단계들을 생각해봤고,
그 이전의 단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그러니까 크게 듣는 단계와 듣기 이전의 두 단계가 있고,
그것을 더 작게 쪼개면 더 많은 단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선 듣기 이전 단계들을 보겠습니다.
무식해서 못 듣는 단계와
교만해서 못 듣는 단계가 있겠습니다.
무식해서 못 듣는 단계란 말씀의 가방끈이 짧은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며
바오로 사도가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의 단계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단계는 영적으로 무식한 이의 탓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교만해서 듣지 못하는 단계이며 하느님 말씀을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냐며 무시하기에 듣지 못하는,
그래서 실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기까지가 듣기 이전의 단계라면 다음은 들었지만
무관심해서 듣지 못하는 단계 곧 다른 관심 때문에
무관심하여 주님 말씀을 귀담아듣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우리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신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유튜브에 떠도는 글이나 말은 종일토록 읽고 들어도
주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일절 읽지도 듣지도 않습니다.
이에 비하면 주님 말씀을 즐겨 읽고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미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대개 이런 분들일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바쁜 일이 있으면 빠트리는 분들이 꽤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말씀은 빠트리지 않고 읽고 듣는,
더 나아가 무엇보다 먼저 주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지는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것은 저의 말씀 나누기를 즐겨 읽는 분들의 경향입니다.
주중에는 읽는 분이 많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이 되면 읽는 분들이 반토막 납니다.
다음은 주님 말씀을 정말 충실히 듣기는 하는데 잘 듣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오늘 주님 말씀처럼 실천에 이르지는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것을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음식을 먹긴 먹었는데 삼키지 않는 것입니다.
단것만 빼먹고 뱉어버렸다고나 할까요?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들었는데 원수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영 안에서 가난하면 행복하다는 말씀은 들었는데 가난하지 않습니다.
입혀주시고 먹여주시는 하느님을 믿고 걱정하지 말라시는데 여전히 걱정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러 가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도무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든 걸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셔도 꿈적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아무리 주님 말씀을 들어도,
아무리 ‘주님, 주님’하고 외쳐 불러도
실제로는 천국에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래서 행복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늦게 일어나서 여기까지만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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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책 읽고 또 글도 많이 쓰시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은퇴 후의 삶이 너무나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다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셨습니다. 은퇴하셨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게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 형제님은 삶이 너무 재미있고 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께서는 거실에서 미끄러져서 고관절 골절이 되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졌고,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운동도 또 독서도 또 밖으로 외출 나가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는 지인이 이 형제님을 만나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폭삭 늙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사무엘 울만의 시 ‘Youth’(청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나이를 더해가는 것으로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게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꿈도 없고 또 열정도 없다면 나이가 얼마 안 되어도 늙은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청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또 지금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을 약하고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상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편하고 쉬운 길만을 가려고 합니다. 조금의 시련에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청춘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노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상과 열정만 넘쳐난다면 충분히 청춘으로 삽니다. 이렇게 청춘을 사는 사람만이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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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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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4)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항상 이야기의 결말처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늘나라의 참 행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된 이 설교는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곧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4)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리지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자기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에게서 오신 외아들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과 그 실행방법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 당신이 양식이다.’(요한 4,38 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고, 직접 겟세마니에서는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잔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를 뒤집어쓰고 돌아가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외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곧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에 계신다.’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은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요,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었습니다. 부당함을 당하고도 침묵으로 감싸주고, 그러고도 억울해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신 까닭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선물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정말 ‘슬기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이라고 하십니다. 곧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마태 7,21)
주님!
오늘 하루 아버지의 뜻이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않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곡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알고,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도 감싸 안고,
오로지 ‘당신 뜻’의 실행을 양식으로 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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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석 위에 지은 집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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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상황에 대처하는 인식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황을 문제(Problem)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제(Task)로 보는 겁니다. 문제는 수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 있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를 풀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순위가 정해집니다. 문제를 떠올리면 긍정적이기보다는 일단 머리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과제는 능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계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 불’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바뀌고, 흙길은 포장이 되고,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 화장실로 바뀌었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하나씩 생겼습니다. 과제는 희망이 되고, 과제는 성취가 되고, 과제는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힘든 상황을 문제로 보느냐, 과제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상황은 걸림돌이 될 수 있고,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려의 시인 원천석은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비슷한 시조로, 길재는 고려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인간사 희로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국가도 찬란한 꽃이 피면 사라지는 것이 이치라며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는 이방원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왕조는 사라지고, 화려했던 궁궐은 사라졌지만, 우리 조상들의 멋진 풍류와 문화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의 마음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흥망성쇠를 겪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던 예언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슬픈 역사도 있었습니다. 로마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고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시대를 지내야 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비극과 고통을 ‘문제’로 생각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게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비극과 고통을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를 빼앗겨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희망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 희망이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활 신앙’입니다. 그 희망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희망을 준비한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희망을 온몸으로 드러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문제로 생각하면 피곤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규율과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혼인법을 지켜야 하고, 금육과 금식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에는 미사참례를 해야 하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문제로 접근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리면 곧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을 과제로 생각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아픈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과제로 접근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과 유혹의 비가 내릴지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과제’라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상황을 문제로 인식하는지, 과제로 인식하는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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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라는 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손과 발을 많이 움직이면 건강하다.’
이 두 문장을 가지고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머리 나쁘기를 원하십니까? 아닙니까? 머리가 나쁘면 손발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러면 결과가 건강이라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말이 아닌 실행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말만 늘어놓는 모습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말은 그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행은 우선 내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힘을 써야 하고 내 시간을 내야 합니다.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도 중요합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말은 참으로 감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 뒤에 실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표현은 완성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행이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손이 움직이고 발이 움직이는 것이 바로 사랑의 결실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늘 실행되기를, 그 실행이 하늘나라와 우리가 바라는 건강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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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에 곱슬에 옹니에 자라목
위의 제목을 두 글자로 하면 뭘까요?
누군가는 고집.
누군가는 불통이라 대답합니다.
얼마 전 지인분들과 식사하는 도중 나온 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런 말을 처음 듣습니다.
칠십에 곱슬에 옹니에 자라목….
그런데 이런 사람을 두고 ‘불통’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이중 한가지라도 가지고 계시는가요?
이 말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험으로 만들어진 말인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렇게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자비와 평화와 인자한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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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반석 위에 인생집 짓기
“기본에 충실한,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
성서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내용은 시편에 이어 요즘 계속되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설교입니다. 오늘로서 산상설교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 집짓는 자들의 비유, 청중의 반응 세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집짓는 자들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두 내용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이다.”
어느쪽입니까? 완성형 인생 집은 없습니다. 미완성형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미완성성형 인생 집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쓰는 강론 역시 저에겐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일에 속합니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인생 집 짓기에 최선을 다하는 슬기로운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말마디대로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삶에 도움이 될 예화를 길다 싶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모두 오늘 우리 믿는 이들이 특히 경청해야 할 내용입니다.
“미루게 될 일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은 부지런함의 기본이다. 부지런함이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수 있는 일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다산>
“나는 예순다섯 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나는 지금 수준의 정신적 정서적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식생활을 절제하고 근력운동을 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글 쓰기를 놓지 않으려 한다. 기력이 달릴 때는 남은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젊다는 말을 되뇐다. 함께 나이먹어가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이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을 믿지 말자고. 어리석은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고. 젊은이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자고.”<유시민>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을 묻는 질문에서 서방국가 대부분은 ‘가족’을 꼽은 데 반해, 한국은 첫째가 ‘물질적 풍요’였다. ‘인생에서 친구나 공동체적 유대가 지니는 중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겨우 3%만 응답했고 최하위였다. 독서율을 보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1년에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는다는 것. 이건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때까지 불교, 조선은 유학의 나라였다. 일본의 사무라이, 유럽의 기사도, 몽골과 이슬람의 정복전쟁등 거의 모든 문명이 ‘칼과 피’로 점철될 때 한반도에선 문치가 대세였다. 수천년동안 이 땅에서 삶의 최고가치는 독서였다.
세상을 바꾸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어야 한다. 대화와 토론, 즉 로고스의 향연이 도처에 흘러넘쳐야 한다. 그것은 에로스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했다. 지금은 먹방과 노래, 춤과 피지컬의 시대다. 연애 자체를 포기한 청춘이 수두룩하다. 단군 이래 청춘의 연애가 이토록 힘겨웠던 시절이 있을까? 사랑은 하룻밤의 열기가 아니라 창조와 교감의 열정에서 비롯한다. 출산은 그 절정에 속한다.
정말 중요한 건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다. 그들의 푸르른 청춘이 활짝 피어나야 한다. 청춘의 특권, 즉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을 포기한채 ‘자기만의 방’에 갇혀 속절없이 시들어가는 건 너무 서글픈 일아닌가? 청춘이 쇠락한 시대를 중년과 노년은 또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그야말로 난세다. 특히 청년들에겐 가혹한 시절이다. 이 난세를 명랑하고 슬기롭게 건너가려면? 역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이 곧 길이다!”<고전평론가;고미숙>
참으로 한결같은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책임을 다하는, 반석 위의 인생 집을 짓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분이 얼마전 카톡 메시지로 보내준 감동적인 진솔한 고백을 나눕니다.
“불교신자였던 아오스팅씨를 세례성사를 통해 구원해달라고 만7년 묵주기도 하루에 8시간 이상씩,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기도했던 제 삼십대가 떠오릅니다. 그후 요셉수도원에서 성령받고, 통회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리던 아오스팅씨입니다. 집에 못하나도 칠 수 없었던 남편 아오스팅씨로 거듭나면서 집을 짓는 은사를 받아 세례받고 만10년 만에 요셉수도원 성전을 지은 기적이 기도의 힘입니다.
요셉수도원 수사님들께서 사랑해 주시고 믿어주셔서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집짓는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부님이 보내주신 강론집을 하루도 빠짐없이 읽고 묵상하며 콩나물이 자라듯이 아오스팅씨가 성숙해졌습니다. 우리 부부는 필히 요셉수도원에 감사드리고 보답을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분들 나름대로 성실히 반석위에 인생집을 짓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정말 온전한 인생집 짓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부단한 하느님 말씀의 실천과 한결같은 간절한 기도없이는 불완전합니다. 참 좋은 의견에 완벽한 삶에 이론인데 하느님과 기도가 빠진 삶을 보노라면 참 허전한 생각이 듭니다. 궁극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 대해 답이 없습니다.
지난 24일 화성에서의 배터리공장 화재 참사로 2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새삼 모래 위에 지어지는 집같은 위태한 가정은, 사회는, 나라는 아닌지 매사 깊이 성찰하며 점검하고 보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떠난 이들에게는 주님의 자비를, 남은 유가족들에게는 주님 친히 위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주님,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이 짝을 이뤄야 합니다. 아무리 주님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다 해도 주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자기착각의 피상적 헛된 짝사랑일뿐입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름대로 잘 살았다 자부하는데 이와같은 주님의 반응이라면 얼마나 충격적이겠는지요! 완전히 착각이요, 반석이 아닌 모래 위에 내 뜻대로 지은 인생 집이었던 것입니다. 나름대로 슬기롭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어리석게도 모래위에 인생집을 짓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바로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의 유다 임금 여호야킨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니 그대로 모래 위에 나라집을 세웠던 것이며, 하느님 응징의 도구였던 바빌론 제국의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침공으로 유린되어 박살난 유다 나라입니다. 우리의 인생 집을 짓는데 참 유익한 반면교사가 되는 유다 임금 여호아킨입니다. 위기시 인생 집의 실상이 다음 복음 말씀을 통해 그대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인생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은 모래 위에 인생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 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과연 우리 인생집은 어디에 속하겠는지요? 유비무환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은총과 더불어 한결같은 말씀 실행의 노력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 이들이 정말 슬기로운 이들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경청-묵상-기도-관상-실행”의 렉시오디비나 성독 수행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그리스도 예수님 위에 인생 집을 짓는 마음으로 온힘과 온마음과 온정성을 다해 강론을 썼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제 간절한 소원입니다. 우리 인생 집은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미완성 상태에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지침이 없이, 한결같은 열정과 정성으로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님 반석 위에 인생 집을 짓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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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25)
박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이집트와 아시리아 땅에서처럼 강물이 넘쳐흘러도 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세상의 지혜를 받드는 사람들만 해를 입습니다. 부는 바람은 거짓 예언자들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한곳으로 모여 집에 ‘들이칩니다’. 집이 바위 위에 서 있으면, 이것들은 아무 해도 입히지 못합니다. “바위 위를 기어 다니는 뱀의 길"(잠언 30,19)은 본디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물은 유혹과 박해의 형태로 질서 있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들이칩니다. 집은 그리스도를 바닥과 기틀로 모시고 있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곧, 반석 위에 세우시어 굳건함과 힘을 지니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집에 들이친 모든 박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자, 잘 들어 보십시오! 그 고귀한 능력 속에서 하늘 아버지는 외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 하느님과 영혼의 합일은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심원합니다. 하느님은 지각이나 갈망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하십니다. 갈망은 우리가 지각을 통해 도달하는 모든 것 너머에까지 뻗습니다. 그것은 천상의 존재들보다 멀리 뻗습니다. 실로, 그것은 모든 천사보다 멀리 뻗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천사의 작은 불꽃에 의해 살아질 따름입니다. 갈망은 멀리 뻗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리 뻗지만, 지각이 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갈망이 아무리 모든 것을 동경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하느님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성과 갈망이 끝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십니다.(19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항상 깨어 있으라
잠시 후 두 소녀는 겨우 대모님 집을 떠나 곧장 우물 그늘로 달려가 보였더니 과연 프란치스코는 그곳에 있었다.
“넌 왜 꿀물을 마시지 않았니? 대모님께서 몇 번이고 널 불렀는데 나타나지도않고."
“지금 이유를 말할께, 잔을 손에 들자 갑자기 생각이 난 거야. 좋아, 이걸 희생으로 바치고 예수님을 위로해 드려야지 하고. 그래서 여기로 피해 온 거야."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로써 그가 얼마나 기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두 소녀도 서로 그러했지만 기도하기 위해서 두 소녀들 이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에 마음을 썼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세 목동은 마르뜨의 소유지인 왜전나무 숲으로 양을 몰고 갔다. 이곳은 포르투갈어로 왈제아(평원)라고 하는 곳인데 숲 양편 밭에는 양들이 좋아하는 목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루치아는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양을 지킬 테니 두 사람에게 맞은편 저쪽으로 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히야친타는 루치아를 떠나는 것이 싫었다.
“프란치스코 오빠가 저편으로 가는 것이 좋지 뭐 . 난 루치아와 함께 있고 싶어"
과연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었고 동생보다 철도 들어 있었다.
“나도 함께 있고 싶지만 죄인들을 위해 바치지."
이렇게 말하고 그는 그들을 떠나 왜전나무 숲을 가로질러 그쪽으로 갔다.
얼마가 지난 다음 루치아는 프란치스코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아마 혼자서 쓸쓸해 하리라고 여겨 히야친타에게 오빠한테 가보라고 했다.(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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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7,21)
예수님은 강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하게, 당신의 사명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임을 삶을 통해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 총리 지명 후 14일 만에 결국 사퇴한 분이 어느 교회의 간증에서 언급하기를, 우리 민족의 일제 식민과 6.25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해서 믿지 않은 국민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 이 사안에 대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곡해가 잡음을 일으킨 것 같다.』 하고 발표했다고 하더군요. 진정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예수님의 심령과 같은 지향이 아니라 단지 입술로만 주문을 외듯이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숙고해 볼 일입니다.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기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하느님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기도의 말은 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끝을 맺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때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삶은 아는 것만큼 살면 족하다, 고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문제는 대부분 알지 못해서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아는 만큼 살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앎이 머리로 아는 지식일 뿐, 몸으로 경험하고 체득된 앎이 아니기에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지는 한 마디로 머리로 아는 지식과 삶에서 나오는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 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일부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신학적 논쟁 가운데 하나가 믿음과 행동의 상반된 견해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면서, ‘주님, 믿습니다.’고 열렬히 외쳐댑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에서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구원의 최우선 순위이지만 믿음과 동시에 주님을 섬기는 행위를 실천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것처럼, ‘입으로만 주님, 주님’을 부른다고 해서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라, 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이 바로 이를 입증해 줍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꾀어야 보배’라는 속담대로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은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모래 위의 집짓기와 다를 바가 아니라고 오늘 복음은 적절한 비유로 강조하셨습니다. 누구의 집이 튼튼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큰비가 오면 금방 알게 되어 있습니다. 큰물이 들이닥치면 확고함과 확고하지 않음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사상누각은 큰비가 오면 그리고 큰물이 밀어닥치면 쉽게 쓸려 내려앉고 맙니다. 이렇듯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신앙인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명심하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다짐합시다. 몰라서 살지 못했다고 변명하지 말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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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 아버지 뜻을 실천하는 삶을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098495&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6-26 ㅣNo.173694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다 들어가는 게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만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이가 나에게,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고, 주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무엇이 ‘그분 뜻’이겠는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답은 영성 생활이다.
어떤 이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켰더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다. 무엇이 과연 잘못된 걸까?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버지 본래의 그 뜻을 실행한 것이 아닌 셈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주님의 이름만을 빌려 자기 스스로 여유로운 묵상과 내적 고민도 없이, ‘자신만의 성급한 결정’으로 야단법석을 떨면서 하느님의 뜻과는 상당히 먼 거리가 있었기에 그러할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주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이와 같이 현명한 이란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슬기롭고 지혜롭게 주님 빛 안에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되, 그 끝에 대한 분명한 책임감과 건전한 현실 감각을 지니고 있으리라. 또 그는 영성 생활은 물론 매사에 단호함과 주의력을 단단히 가져서, 올바른 선택을 흔들리지 않게 실천하는 신앙인이리라.
그러기에 변화하는 상황에 주님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길을 주의 깊게 찾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지혜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침묵과 내적 여유 속에 선입관과 욕심에 따른 성급한 결정을 피하려는 노력을 반복함으로써 얻을 게다. 따라서 주님 말씀을 늘 기도와 묵상 중에 새기면서, 현명하게 실천하려는 신앙인의 일상의 삶을 게을리 하지 말자.
사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버지의 뜻’을 ‘기쁨의 생활’에서 찾으려 했다. 하느님의 설계도는 먼저 인간이 감사와 즐거움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거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인류이기에 감사와 기쁨은 삶의 의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튼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가 불안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되리라. 그렇게 사는 것은 분명 ‘그분의 뜻’이 아닐 게다. 믿는 이로 믿음의 향기를 뿜어내면서 바쁘고 고난의 길 한 모퉁이에서 한걸음 물러난 삶을 제대로 살자.
그러기에 누가 뭐래도 신앙생활은 진국을 우려내는 것과 같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깊은 신앙의 맛이 자연스럽게 나오기까지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며 노력해야 할 게다. 미사와 성사, 기도와 선행, 희생과 양보 등 신앙생활의 실천 사항들을 묵묵히 이어 갈 때 얻을 수 있는 커다란 힘이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하지를 말자. 아버지의 그 뜻이 담긴 기쁨이 끊이지 않을 때, 비가 와 홍수의 그 난리에서도, 반석 위에 그 집처럼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따라서 주님 말씀에 귀 기울여, 사랑과 자비로 ‘배려와 겸손’이 배어 있는 삶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다짐하자. 그분은 생명과 함께 우리에게 ‘자유 의지에 따르는 삶’도 주셨기에. 그러니 그 길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이를 영성적인 삶이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이란다. 그러니 종말에 닥쳐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떨거나 숨을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반석 위에 나의 집을 조금씩 지어 가자. 따라서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에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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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산상 설교 부분에 배치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명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여 주고 계십니다. 산상 설교는 참행복을 시작으로 율법의 완성에 관한 가르침과 그 밖의 여러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자신이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참된 믿음에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천 없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실천은 우리 믿음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실천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더 굳건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몸소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게 되는 체험이 있고 그 체험 안에서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려움과 고통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집니다.
좋은 말씀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유튜브,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묵상 글과 아름다운 글귀들을 서로 나눕니다.
이는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 구원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서로 나눈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아름다운 말씀은, 나아가 참사랑의 실천으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 실천 위에 자리 잡은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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