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못>과 <JSA>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분단의 비극'을 다룬 영화의 반응이 꼭 그렇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던 해에 나온 <공동경비구역>과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이 터진 직후 개봉한 <작은 연못>은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는 영화다.
<공동경비구역>의 경우 충무로에서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3인조>(1997) 등 상업 영화를 만들던 박찬욱 씨를 작품성과 흥행성을 보장하는 일약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린 작품이다. 영화의 원작인 <DMZ>(1997)를 쓴 작가 박상연씨는 영화 <화려한 휴가>(2007), 드라마 <히트>(2007),<선덕여왕>(2009)의 각본을 써내 그야말로 히트제조기라 불리고 있다. 이처럼 잠재력이 풍부한 소설가와 감독, 배우들을 발굴하고 조율해 상업 영화의 장르 안에서도 예술성을 인정받은 명필름(대표:심재명)의 <공동경비구역>은 국내외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연기상을 휩쓸고 그해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2000년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 회담과 햇볕 정책이라는 현실도 영화 흥행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작은 연못>의 경우, <공동경비구역>을 제작한 명필름이 1999년 AP통신의 '노근리 사건' 특종보도 기사를 접하고 영화 기획을 처음 구상했다. AP의 최상훈 기자가 2001년에 영문판으로 펴낸 책 <노근리 다리>와 노근리 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 씨가 이미 1994년에 발간한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검토해 시나리오의 윤곽을 잡았다. 몇몇의 감독 등이 연출을 시도하다 그만두고, 최종적으로 <칠수와 만수><B언소><늘근 도둑의 노래> 등 사회비판적인 연극 연출로 정평이 나있던 이상우 감독이 각본과 영화 연출을 맡았다. 대형제작사, 명필름 대신 (유)노근리프러덕션(대표: 이우정)이 별도로 설립되어 2006년부터 이상우 감독과 힘을 합쳐 영화제작을 해냈다.
<작은 연못>은 제작자와 감독이 바뀌는 난항을 겪으면서 마치 천리길을 가듯, 흙먼지 마시면서 8년 만에 완성을 보았다. 특히 “전쟁의 궁극적 피해자는 민간인이다. 바로 우리다”라는 이상우 감독의 설득에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노개런티로 촬영에 임했다. 송강호, 문소리, 문성근, 강신일, 김뢰하, 유해진, 고 박광정 씨 등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하고 국내 최고의 CG기술을 자랑하는 모팩 스튜디오가 후반작업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유례없는 독립영화 수준의 초저예산으로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작은 연못>은 개봉시기가 2000년 4월 초에 불궈진 천안함 침몰 사건과 맞물리면서 다른 독립영화와 마찬가지로 단기 상영, 단관 개봉의 비운을 맞았다.
그런데 제작 단계를 거슬러 짚어보면 영화 <작은 연못>의 미니 다큐 첫 장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영화를 기획한 가장 큰 동인이 1999년, AP통신의 노근리 탐사보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미국 기자들과 함께 이 사건을 공동 취재했던 최상훈 기자는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취재 자료를 모아 2001년 <노근리 다리>라는 소설을 펴냈다. 하지만 외신 보도에 앞서 이미 1994년 7월, 월간 <말>지에서 "6.25 참전 미군의 충북 영동주민 300여명의 양민 학살"을 특집으로 다루며 '불편한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으나 주류 언론에서 외면한 점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당시 말지에 노근리 특집 기사를 썼던 오연호 기자(현재 오마이뉴스 대표)는 노근리 사건과 이것이 세상에 밝혀지는 과정이 공통점을 지녔다고 지적했다. 36년간 일본의 압제 이후 또 다른 외세인 미국에 의해 해방을 맞은 연유로 무고한 학살을 당하고도 숨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노근리의 진실 또한 국내의 언론이 아닌 외신(외부의 힘)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외신 보도로 <뉴욕 타임즈>,<워싱턴 포스트>지 같은 잡지에 대서특필 된 이후에야 국내의 주류 언론이 노근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사대주의 관행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두 영화에서 비교되는 것은 영화에 쓰인 '음악'이다. <공동경비구역>에 나오는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부치지 않은 편지>가 20대 병사들이 공유할 수 있는 노랫말과 김광석 특유의 애절한 음색으로 남북한 병사들 사이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에 비해 <작은 연못>에 쓰인 김민기의 노래 <작은 연못>과 <천리길>은 각각 분단된 한반도에서 벌어진 공멸의 전쟁을 상징하는 '작은 연못'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즉 멀지만 가야할 길인 평화에의 실천을 뜻하는 '천리길'이라는 주제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특히 <공동경비구역>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이 제대를 앞두고 북의 초소에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카세트 테이프에서 나오는 음악과 병사들의 행동이다. 불시에 들이닥친 북한 상관의 등장으로 병사들이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권총을 뽑아들자 오경필(송강호 분)이 이들을 침착하게 설득하여 총부리를 내리게 하지만 갑자기 음악이 바뀌면서 상황이 반전되는 장면이다. 즐겨 듣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라는 가사로 끝을 맺는 <이등병의 편지>라는 곡이 끝난 후, '오토 리버스' 기능으로 갑자기 빠른 박자의 낯선 음악이 흘러나오자 병사들이 다시 흥분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이다. 그간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고 같은 언어로 지어진 대중가요를 함께 들으며 정서적 공감대를 갖던 병사들은..역방향의 테입에서 튀어나온 비트 강한 음악으로 인해 반사적으로 총구를 겨누어 공동경비구역을 또 하나의 '작은 연못'으로 만들어버린다.
'리버스'(Revers:거꾸로 되돌리기)가 주는 의미가 단지 카세트 테이프에 부착된 물리적 편의 장치를 너머 언제 햇볕 정책이 있기나 했었냐는듯 180도 달라진 북풍 정국으로 거스르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 겹쳐져 섬뜩하기만 하다. 영화는 시대의 산물이라는데, 정국의 기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 상영 현실을 보니 영화 안팎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2010년 <개똥이네집> (보리출판사)에 썼던 글입니다